콘셉트로니카의 부상: 왜 최근 10년간의 많은 전자 음악은 클럽보다 박물관에 속하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http://tigersprung.org/?p=3126

가입하고서 꽤 시간이 지났는데, 게으른 탓에 부끄럽게도 이제야 첫 글을 올립니다. 다들 어찌 그렇게 부지런하신지... 아직 학기가 끝나지 않은 관계로 좀 더 아카데믹한 주제에 대해서 정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최근에 공개된 제 번역 작업을 요약적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굉장히 아카데믹한 논의들이 많이 올라오는 곳에 문학적인 상상력을 다소 발휘하는 것 같은 글을 소개하게 되어 민망하지만, 동시대의 철학적 예술 비평들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잘 보여줄 수 있는 글 같아서 이렇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동시대 예술담론을 번역하여 공유하는 플랫폼인 호랑이의 도약에 참여하여, 영국의 음악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의 "The Rise of Conceptronica: Why so much electronic music this decade felt like it belonged in a museum instead of a club"를 번역했습니다.

이 글은 레이놀즈가 웹진 피치포크의 2010년대 음악 결산 특집의 일환으로 동시대 언더그라운드 전자음악을 회고하며 쓴 글입니다. 특히, 'Deconstructed Club'이라고 호명되는 (다소 아방가르드적인) 특정 조류를 중심으로, 동시대 전자 음악을 철학적이고 정치-경제학적인 지점들과 연관시켜 보려는 다소 거시적인 비평을 시도합니다.

엄밀한 논증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글의 요지를 구조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주장: 2010년대의 전자음악 중, 흔히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이라고 호명되는 동시대 언더그라운드 전자음악은 개념 미술 작품과 유사하다. 그래서 이 음악을 "콘셉트로니카"라고 부르겠다.
    (단, 콘셉트로니카는 단순히 소리를 중심으로 분류하는 음악 장르에 해당하는 범주가 아니라, 예술적 작동의 양태와 그 양태에 대한 청중의 수용까지를 의미한다.)

  • 근거 1: 콘셉트로니카 음악가는 이론 친화적이다.
    -이들은 대체로 예술 대학이나 대학원을 다녔고, 그래서 비판 이론이나 철학 이론에 익숙하다.

  • 근거 2: 콘셉트로니카 음악가는 예술-제도에 익숙하다.

  • 근거 3: 콘셉트로니카 음악은 과거의 댄스 음악에 대한 아카이브적 작업에 가깝다.

  • 근거 4: 콘셉트로니카 음악가는 게임 문화에 친숙하다.

  • 근거 5: 콘셉트로니카 음악가는 시각 예술에 익숙하고, 그래서 시청각적 전회(Audio-Visual Turn)를 지향한다. 이를 토대로, 스케일이 큰 종합 예술적 작업을 지향한다.

  • 근거 6: 콘셉트로니카 음악가의 음악 제작 및 공급 방식, 더 나아가 이 음악의 향유 방식까지도 기존의 방식과 다르다.

  • 근거 7: 콘셉트로니카 음악은 명시적으로 정치성을 띈다. 특히, 정체성 정치의 측면에서 그러하다.

  • 근거 8: 콘셉트로니카 음악가는 음악에 정치/경제적인 자신의 입장을 전면에 드러낸다. 이를테면, 브렉시트나 월가 점령 시위 등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출한다.

  • 근거 9: 콘셉트로니카 음악은 소리적으로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갖는데, 그 중 대표적인 특징은 부서지는 듯한 드럼 소리이다. 이 드럼 소리는 시위 현장의 소리 등을 연상시키며, 도시의 불안과 같은 현실을 상기시킨다.

영미권의 동시대 좌파 지식인들이 현실을 어떻게 읽어내려고 노력하는지 볼 수 있어서 흥미롭기도 하고, 한국의 문화예술 비평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거시적인 시각의 글이라 개인적으로는 작업하면서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류의 글이 조금 더 보고 싶다면, 마크 피셔의 글들도 추천드립니다. 모쪼록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번역 오류에 대한 지적이나 수정 제안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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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흥미로운 주제로 투고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음악예술에 대한 철학적 비평은 대체로 제도권 엘리트 예술에 해당되는 순수 예술에 치우쳐져 있는 줄 알았습니다. 저 유명한 한슬릭(Eduard Hanslik, 1825-1904)의 바그너론, 들뢰즈의 불뢰즈(Pierre Boulez, 1925-2016) 비평, 아도르노의 쇤베르그 비평 등을 대표적 예시로 들 수 있겠죠. 현대 클래식 음악(Contemporary classical music)의 주류 경향 너머로는 어떤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에 관한 사상계의 반응은 어떠한지 종종 궁금해하고 했었는데 글을 통해 견문을 넓혀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 한 가지가 있습니다. 미리 앞질러 질문부터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술일반에서 해체 혹은 해체주의를 개념적으로 정의한다면 무엇을 뜻하는가?

위에서도 "디컨스트럭티드 클럽"을 언급하면서 해체(deconstruction)라는 개념어를 언급하셨습니다. 종종 현대 문학론에서 데리다를 언급하기도 하지만, 예술계 일반에서 말하는 해체주의는 기실 하이데거-데리다로 이어지는 해체 개념의 정의 및 사용 맥락과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하는 듯 합니다.

예술에서 해체주의 또는 해체를 말할 때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해 이해를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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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학기 말이라 정신이 없네요.

우선 주신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입니다. 영미 분석적 전통에서 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보니, 해체주의 계열의 논의를 잘 알지 못하는 탓입니다.

다만, 음악미학과 음악학에 한정해 어렴풋이 알고 있는 바를 이야기드리자면, 해당 영역들에서의 해체주의는 기존의 담론을 해체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것 같습니다.

우선, 음악사를 잠깐 살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바로크 시대 이래로 조성 체계는 서구 클래식 음악의 강력한 규칙이 되어 왔습니다. 물론 그 이전의 선법 음악(Modal Music)과 같은 것도 떠올릴 수 있지만, 시대가 흐를 수록 점점 조성은 절대적인 무언가(특히, 조성을 "문법"이나 "규범성" 등으로 표현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요)에 가까운 것이 되어갔습니다. 이러한 조성을 해체하고 대안을 모색하거나, 그러한 규칙 자체가 없는 음악을 추구하려는 시도들이 대체로 해체주의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음악 미학이나 음악학에도 당연히 반영이 됩니다. 언급하신 한슬리크를 필두로, 20세기 이전의 주류 음악학과 음악 미학은 조성을 중심으로 음악 내재적인 규칙이나 문법 등에 천착한 탐구를 시도했습니다. 특히, 이는 단지 연구자나 비평가 혹은 예술가에게 국한되지 않고, 서구 클래식 음악의 청취 자체로 확장됩니다. 애당초 서구 클래식 음악이 창작되는 기반 자체가 조성과 같은 규칙이나 문법을 매우 강력한 전제로 생각하고 있기에,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을 청취하는 것도 어느 정도 (전제된) 구조 하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도 있겠죠. 그래서 해체주의는 구조적 청취, 음악에 대한 (조성을 중심으로 한) 구조적 분석, 음악 내재적 요소들에 천착하는 담론 등과 같은 지점들을 해체하고자 하는 듯 합니다.

예전에 공부했던 것들을 더듬어가며 답변했지만, 제가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라 죄송할 따름입니다. 음악학과 음악 미학에서의 해체주의에 대해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아도, 다음의 자료를 보시면 도움이 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Dell’Antonio, A. (Ed.). (2004). Beyond Structural Listening?: Postmodern Modes of Hearing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Retrieved June 24, 2020. 이 앤솔로지에서 서보트닉과 쉐르징어의 글에서 해체주의나 데리다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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