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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도가 철학(노자, 장자 그리고 노/장자 주석들)과 도교 (오두미교/태평도처럼 노자의 철학을 기반으로 형성된 종교 운동부터 신선-방술 전통과 도가를 결합시킨 갈홍의 <포박자> 등이 남방 전통)가 결합하고, 불교의 영향에 대응해서 자신들의 교리를 심화-정리시키는 과정에서 여러 유서(類書 ; 비슷한 종류의 내용을 모아놓은 백과사전 겸 색인집 겸 요약본 같은 책들)이 나옵니다.
연대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 쯤에 나온 <무상비요>이고, 그 다음에 당나라 시기 도교 사상과 불교 사상의 상호 침입이 가장 심화된 시절에 나온 본서 <도교의추>가 있습니다. 그 후로는 송나라 시절 도교 교리 전체를 정리한 <운급칠첨> , 그 후에 <운급칠첨>에서는 미진한 술법들을 정리한 <상청영보대법><도법회원> 등의 책들이 나옵니다.
<도교의추>가 특히 흥미로운 점은, 상대적으로 도교의 신학적 교리보다는 형이상학/심리학/인식론적 측면에서 중요한 술어들을 정의하며, 그 정의의 근거가 되는 경전 원문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당대 불교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데, 주요 술어들이 불교 번역어에서 그대로 차용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도교 사상 전반에 맞게 적당히 윤색되긴 했습니다.)
본 번역은 이 중에서 29장 도성(道性)에 관한 부분입니다.
(원문은 道教義樞 : 卷八 理教義第二十六 境智義第二十七 自然義第二十八 道性義第二十九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입니다.)
올바른 뜻
; 도성은 진정한 끝에 위치한 이치(理)이며 (a) 진실로 막힘 없이 두루 통한다는 뜻이다. 비록 거뭇하고 적막한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가지만, 만물이 두루 가지고 있다. [이를] 가리는 번민과 의심, 대체로 [이를] 잠시 가로막는 원인이 되는 번뇌(障累 ; 번뇌의 옛 번역어)가 소멸되면, 성스러운/위대한 결과에 (b) 되돌아와 오를 것이다. 이를 곧 '도달함'(깨달음)(致)이라 한다.
<태현경>(太玄經)에서 말하길, "도성에 대해 말한다. 이는 진실된 공(空)이로, 이는 '비공'(非空)이자 '불공'(不空), '불공이 아니기도 하다.'(非不空). 도성과 중생은 모두 '스스로 그러함'(自然)과 같다."
[이러한 여러 부정을 통해 '도' 혹은 다른 형이상학적/자연학적 대상을 정의하는 것은 당대 도교 문헌에서 꽤 흔한 방법입니다. 대체로 각 부정마다 다른 의미가 있으며, 문헌의 다른 부분을 보면 자세한 설명이 나오기도 합니다. 물론 누락된 경우(...)도 있긴 하지만요.]
주석
; (a) 도가 두루 통한다는 것이 뜻이라 함은, 두루 통한다는 것을 명백히 알아 밝히는 것이다. (b) 성(性)이 (억지로) 변하지 않는다 말함은 '참된 깨달음'(원만한 깨달음, 圓果)을 반드시 이룬다는 말이다.
(b) 노자의 도에서 서성거리며, 그 경지를 접하게 되는 데 이를 '묘한 이룸/성취'라 말하며, '도의 작용'(道用)이라 말하며, '성'이라 말한다. 지금 이 말을 본 자는 (이렇게) 본 경지의 뜻을 얻을 것이다.
'(b-1) '이룸'은 수행의 결과(證果)가 드러나는 때를 말한다. (b-2) '작용'이란 (결과의) 원인을 숨겨진 때를 찾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사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참된 성'이다. 고로 '작용'이란 곧 '이룸'을 뜻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원인일 때를 찾는다는 것'은 이에 붙인 이름이니, 이를 '작용'이라 하며 '참된 성'이라고도 한다.
도를 '깨달음'이라 말하는 것은 온전하고 지극한 법신(法身)을 가리키는 것이다. 성을 '원인'이라 말하는 것은, '깨달음의 성'을 얻음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 해석은 (완전히 정확한 것이 아닌) '억지로 된 것'이며 또한 이치가 아직 통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까지는 중언 부언이 반복되지만, 대략 요점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도가 곧 결과 - 깨달음이고, 성이 곧 원인이자 작용이라는 점이지요. 하지만 마지막 질문은 이 모든 정의가 '부정확함'을 역설합니다. 도와 성, 깨달음과 원인이 같다는 것이죠!]
(사실 이러한 주장은 원인과 결과를 일종의 '사건'으로 이해한다면,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넌센스입니다. 아마 이들은 원인의 존재론적 대상인 '성'과 결과의 존재론적 대상인 '도'가 같다는 점을 역설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즉, 이들은 어느순간 원인-결과라는 [형이상학적 범주로서의] 사건에서 원인이라는 대상과 결과라는 대상이라는 [형이상학적 범주로서의] 존재론으로 도약하는 셈입니다.
이러한 도약은 중국 불교의 불성론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만약 도가 '결과'에(만) 있고 성이 '원인'에(만) 있다면, 즉 성이 진정한 도가 아니며 도가 진정한 성이 아니라면, 어찌 중생이 도성을 가진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해석)은 명백히 번뇌를 가진 마음(礙心)이 만든 해석이며, 한 가지 답과 한 가지 병(을 모두 가진 것)이다. 도성의 올바른 의미는 '진정한 성'이란 (i) '유'도 아니며 '무'도 아니라는 것이지 어찌 있거나 혹은 있지 않다는 것이겠는가?
[도가 곧 성인 이유는, 이 둘이 비유비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비유비무는 무엇인가? 아래에 나옵니다.]
<서승경>에서 말한다. "올바른 "머물 곳이 없음(無處)'에 있어라." 이는 어디에 있는 것을 말하는가?
<서승경>은 또 이리 말한다."(어디에) 진정으로 있다는 것" (이 말이 맞다면 우리는) 어찌 어디에 있지 않는 곳으로 돌아가는가?
이는 '어디 있지 않음'이 곧 '어디 있지 않은 것이 없음'과 같기 때문이다. 원인에 있음은 곧 원인이요, 결과에 있음은 곧 결과다. 원인에 있다는 것은 곧 '원인의 성'을 따른다는 것이요, 결과에 있다는 것은 곧 '결과의 성'를 향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좀 쌩뚱맞습니다. <서승경>을 가져와서 결국 도라는 것이 '어디 있지 않기에'-'어디에도 있지 않은 곳이 없음'을 말하고 - 이를 '유/무'의 유비로 연장되어서 '인/과'의 유비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아래의 반문이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는 더 타당하게 들립니다.]
그렇다면 도성과 바른 이치, 이 둘이 '있지도 않으며' '없지도 않는다면' 어찌 '이름을 붙이며' 어찌 '성'이라 할 수 있는가? 이는 성이 아닌 것을 성이라 하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이름 붙이며, 이해되지 않은 것을 이해되었다하고, 구별되지 않은 것을 구별되었다 말하는 것이다.
[논자는 "그래 니 말이 맞다고 해보자. 근데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건 그럼 논의할 수 없는 거 아니야? 그걸 어떻게 성이라 말하는거지? 난 납득할 수 없는데?]
각기 다른 깨달음/의미를 논하는데, 그 뜻을 나누는 방법은 끝이 없다. 하지만 (이를 모두) 모아 돌아가 말하면, 그 개요는 다음 다섯이다.
첫째는 정중(正中)이다. 중이란 치우치지 않았다는 뜻이며, 정이란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바른 도인 진정한 성은 태어나지도 소멸하지도 않으며, 유도 아니며 무도 아니다. 이를 '정중도'라 한다. [원문은 非有非無,<無>名正中道입니다만, 아무리 봐도 무명정중도는 해석이 이상해서 <무>를 겹자로 보고 제거했습니다.]
둘째는 인연성(因緣性)이다. 인(因)이란 능히 있게 하는 것으로, (대상이) 그렇게 되는 이유다. (깨달은) 경지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은 '분별하고 이해함'의 인연이며, 이는 인연이 지성을 만들고 도를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관조성(觀照性)이다. 인(因)이란 곧 '이름을 안다는 것'(通名)으로, 유/무 두 관점으로 보아, 유/무 두 경계의 갈라짐을 파악하는 것이다. 원인이 있기에 무로 들어가니, 진정한 경지를 명확히 밝힌다. 이는 '[신]묘한 관점'을 이루는 것이다.
넷째는 지혜성(智慧性)이다. 이는 깨달음의 극치로, 거뭇하고 적막하며 현묘하고 두루 통하며, 큰 지혜의 근원이다.
다섯째는 무위성(無為性)이다. 이는 지혜를 말하며, 이는 원인과 결과를 두 미혹을 잘라 없애는 것이다. 신(의 경지에)는 (그 구분이) 없으며 무위한다. 이는 곧 도이며, 이는 곧 도성이 가진 근본적인 의미다. 드러났을 때는 도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며, 숨겨졌을 때는 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이 부분이 논의의 하이라이트인 동시에, 끔찍한 범주 오류들로 가득한 느낌이 드는 구절입니다. 우선 첫째로 도가 비유비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당대 중현학에서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논의였습니다. <도교의추>에서도 군데군데 나오고요.
이제 여기서 두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여기서는 도교의 기본 전제를 알 필요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이 세상이란 도에서 생겨났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도 -> 인간의 지성 -> 이 지성이 다시 인간을 도로 돌아오게 만드는 도식이 생겨나는 겁니다. 넷째 역시 이와 비슷한 말이고요.
세번째와 다섯번째는 이제 너가 인과-도성을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을 멈출 필요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유/무 두 관점을 보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죠. 이것이 곧 지혜이며 무위인 셈입니다.]
도성은 맑고 비어있으며 스스로 그러함을 그 근본으로 삼는다.
모든 식(識)을 가진 것들, 동물, 과일과 나무, 돌에는 모두 도성이 있다.
궁극적인 뜻이자, 모든 법칙인 진정한 성은 있지도 않으며 없지도 않다. 원인도 아니며 결과도 아니다. (ii) 구체적인 사물(色)도 아니며 마음도 아니다.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잃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침내 (결론에) 도달하니 이를 '성'이라 한다. 이는 곧 '바른 도'를 이룬다는 것이며, 스스로 그러하는 진정한 '공'(空)이며 '도성'이다.
<승현경>에서 말한다. "신은 도를 알고 속세를 멀리합니다." 무엇이 그 까닭인가? 법과 성 그리고 공이 그 까닭이다.
<승현경>은 또 말한다. "기를 빌린다."
품기(사람이 본래 가지는 기질)란 중생의 본질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원래 맑고 깨긋하나 뒤집히고 엎어져 망념이 생긴다. 지성으로 말미암아, 식과 신(識神)이 있으니 생각 한 번에 신이 일어난다. 이는 곧 욕망에 의해 막히고 오염되는 것이다.
업은 이미 (중생을) 약하게 만들어, 스스로 능히 살 수 없게 한다. 반응하는 기을 기다리고 기대어 생을 빌려 (감각으로) 접하는 것에 끌리게 한다.
어차피 태어나 버린 뒤니, 기대는 것 멀리하고 지혜를 갈고 닦아 원만함에 이르러야 한다. 이는 곧 지극한 도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마치 죽순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날에 비유할 수 있다.
사건이 아직 비고 없는 곳에 있을 적에, 하나의 생각에 죽순이 태어나니, 그 순은 자랐지만 그 힘은 이미 약하여 스스로 능히 자랄 수가 없기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기다리고 기댄다. 도움은 죽순을 자라게 하여, 마침내 대나무가 되게 한다. 점차 껍질을 벗으니, 껍질이 두꺼워져 대나무가 된다. 껍질이 없는 것이 그 근본이다. 대나무가 되는 날, 껍질이 자라는 것을 바꿀 필요가 없듯, 온전(한 진리)를 논하고 아는 때, 더 이상 일어나고 넘어지는 것을 고칠 필요가 없다.
[이 부분이야 사실 뻔한 이야기입니다.]
<서승경>은 말한다. "도는 나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만물은 모두 가지고 있다."
이는 (만물이) 지(의식?)을 가진다는 근거이지만, 각기 다른 식(識)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오늘날 아직은 그에 대한 해석이 안정되지 않았다.
만일 지를 가지고 있으면 성이 있고, 지를 가지지 않는다면 성이 없다고 해보자. 이는 도에 반응하는 것은 곧 지를 가지고 있고, 지가 없는 것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지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고 해보자. 큰 도는 있지 않은 곳이 없지만 지가 있는 것이 반응하기도 하고 없는 것에 반응하기도 하는 셈이다. 이는 사실 모두 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만일 지가 있는 것과 지가 없는 것이 모두 성을 가지고 있다 하면, 식(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모두 도를 이룰 수 있는 셈이다. 만약 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결국에는 도를 이루거나 도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이는 지를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은 모두 성이 있거나 무성이 있는 셈이다.
(ii) 이 뜻은 도성이란 색도 아니며 심도 아니지만 동시에 색이며 심이라는 것이다. 또한 심은 연습을 통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까닭이지만, 색은 기와와 자갈 (같은 것도) 모두 존재하는 까닭이다.
[사실 번역하면서 이 부분이 제일 재미있었습니다. 이제 누군가가 반문한 모양입니다. "그래 너네 말대로, 도와 성이 같고 만물이 도성을 가진다고 해보자. 근데 왜 인간만 도를 이루고 다른 사물들은 도를 이루지 못하지? 말이 안 되는 거 아니야?"
이에 대해서 저자 역시도 당황했던 모양입니다. 우선 도에서 만물이 태어난 이상, 만물은 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는 그냥 가정해버립니다. 여기서 '지'(知)가 굉장히 번역하기 까다로운 편입니다. 지가 1) 지성이라는 뜻일 때도 있고 2) 의식이라는 뜻일 때도 있습니다 (<순자>에서 관련된 구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 만물이 모두 '지'를 가진다니? 돌이 의식을 가진다고? 저자는 정말로 돌도 의식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지를 다른 형태의 번역어로 보아야 하는 걸까요? 이 문헌만으로는 정하기가 굉장히 어려워 보입니다.
저자의 탈출구는 '식'입니다. 식도 보통 의식 작용을 의미하는데, 지와 구분되는 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하튼 저자는 만물은 식에 있어 차이가 보인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저자는 '지'가 없는 것이 있는지부터 탐구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지'를 도에 반응하는 특성으로 보는 듯합니다. 이렇게 되면 만물 중에 지가 없는 것은 없습니다. 도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만물은 도에 반응하기 때문이죠.
저자는 다른 가정 역시 해봅니다. 만물에 지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고 해보자. 그래도 어쨌든 (도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만물은 도에 반응하므로, 오히려 지가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도에 반응한다고 할 수 있죠.
정리하자면, 지/~지든 어쨌든 도에 반응하여, 모두 성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 논의에 들어갑니다. 만물은 모두 성을 가지니깐, 식이 있든 없든 모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즉, 기와처럼 의식이 없는 사물조차 원칙적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제가 보기에 저자는 의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성-식을 모두 갖춘 인간도 깨달음을 이룰 수도 있지만, 깨달음을 이룰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을 가진다는 것이 곧바로 깨달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닌 셈이죠. 즉, 부단한 노력을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심이 필요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드는 의문은 왜 기와 같은 사물은 '심'을 가지지 않는가, 입니다. 모두 도성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성과 함께 심 역시 가지는게 맞지 않을까요?
여기서 저자는 편리한 주장을 합니다. 어찌되었든 사물은 심을 가지지 못했지만, 색은 가졌으니 도성을 가진 셈이라고요. 음. 네.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