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는데, 20세기에 출간된 현상학의 고전들은 대개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를 먼저 제시하고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하더라고요. 아무래도 후설이 '현상학'이라는 분야를 창시하자마자 이 명칭이 철학의 온갖 주제들로 폭발적으로 퍼져 나갔다 보니, 당대 사람들도 자신들의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선 '현상학'이라는 명칭과 방법에 대해 교통정리를 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런 '교통정리'가 현상학 입문에 꽤 유용하다는 점이에요. 현상학 고전들은 어렵기만 할 것이라는 흔한 편견과는 달리, 이 고전들 앞부분에 있는 '현상학의 의미'에 대한 설명들은 정말 입문자들을 위해 굉장히 친절하게 쓰여 있거든요. 물론, 그렇다고 아무런 철학적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이 눈으로 쓱 훑어서 한 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철학과 학부 고학년생이나 대학원 초년생 정도가 읽기에 "아, 현상학이란 대략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고, 대략 이런 주장을 하는구나!"를 알 수 있을 만큼의 평이한 난이도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 자신도 처음 현상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현상학 고전들 앞에 있는 이런 '교통정리' 글들에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어요. 가령, 제가 학부 시절에 서강대학교에서 개설된 '현상학' 수업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전체를 한 학기 내내 꼼꼼하게 읽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거든요. 이때 수업을 주관하셨던 S 교수님은 『존재와 시간』에서도 '탐구의 현상학적 방법'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7을 가장 먼저 다루셨어요. 순서상으로는 §1부터 읽어야 하겠지만, 내용상으로는 §7부터 다루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현상학에 입문하시려는 다른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고전적' 현상학자들이, 현상학 '고전들'을 통해, 현상학의 의미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를 간략히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텍스트들은 모두 한국어로 번역도 잘 되어 있다 보니, 언어의 장벽에 대한 부담이나 걱정을 가지지 않고 읽으실 수 있으실 거예요.
1. 에드문트 후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현상학적 심리학』, 이종훈 옮김, 한길사, 2013 [1927], 325-355.
현상학 고전을 처음으로 직접 읽어보시려는 분들께 추천해 드리는 글입니다.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이 직접 작성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4판 제17권의 '현상학' 항목입니다. 백과사전에 수록된 글인만큼, 현상학이 어떠한 문제를 다루는지, 어떠한 방법을 받아들이는지, 어떠한 세부 분야로 이루어져 있는지, 어떠한 철학적 의의를 지니는지가 굉장히 포괄적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후설은, 소위 '심리학적 길'을 따라, 순수심리학으로부터 초월론적 현상학을 해명하는 전략을 취합니다. 그래서 '본질'의 문제로 곧바로 들어가는 『이념들』과 같은 책에 비해, 현상학이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 적용되는지가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드러나 있기도 해요. 게다가, 이 텍스트는 후설이 말년에 굉장히 공을 들여 쓴 글이기도 하고, 본래는 후설과 하이데거가 공동으로 작성하려 하였다가 의견 충돌로 인해 갈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철학사적 의의도 있기 때문에, 단순한 '해설'을 넘어서 그 자체로 '고전'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습니다. 아래는 제가 예전에 이 텍스트를 블로그에 정리해 본 내용입니다.
오징어의 철학 노트: 후설의 현상학 개념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2. 마르틴 하이데거, 「탐구의 현상학적 방법」,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글방, 1997 [1929], §7.
"사태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라는 현상학의 유명한 구호가 처음 등장하는 글입니다. 대부분 이 구호를 후설이 말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 구호는 하이데거가 후설의 현상학을 해설하면서 처음 사용한 것입니다. 후설이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에서 "우리는 사태 자체를 심문해야만 한다."라고 이야기한 것을, 하이데거가 "사태 자체로!"라고 요약한 것이죠. 더 흥미로운 건, 이 글에서 하이데거가 후설의 현상학을 전유하고 확장하는 방식입니다. 하이데거는 현상학에서 제시된 '현상(Phänomen)'이라는 개념이 고대 그리스에서 사유된 '존재(Sein)'라는 개념과 분리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현상학은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학문, 즉 존재론이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거든요. 더 나아가, '현상학', '존재론', '해석학', '실존의 실존성에 대한 분석론'이 어떻게 서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아주 흥미로운 방식으로 해명하고요. 저는 『존재와 시간』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 부분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요약하였습니다. 아래는 제가 예전에 블로그에 §7을 요약한 내용들이에요. 가장 아래부터, (a) 대학원 석사 입학 직전 요약, (b) 대학원 석사 시절 수업 발제문, (c) 대학원 석사 졸업 이후 박사 입학 직전 요약입니다.
오징어의 철학 노트: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념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하이데거의 현상학 개념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존재와 언어,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4)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3. 장 폴 사르트르, 「머리글: 존재의 탐구」, 『존재와 무』, 정소성 옮김, 동서문화사, 2009 [1943], 11-44.
저도 이번에 처음 읽어본 글입니다. 그런데 읽으면서 감탄했네요. 사트르트가 굉장히 평이한 어조로 현상학의 근본 문제의식을 잘 짚어내고 있어서요. 첫 문장부터 마음에 들더라고요. "현대사상은 존재하는 것을, 이를 밝히는 나타냄들의 연쇄로 환원시킴으로서 뚜렷한 진보를 이룩했다."라고 하거든요. 현상학은 '현상' 배후에 무엇인가가 '사물 자체'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가정을 거부하는데, 이렇게 하면 전통 철학이 빠져 있던 "배후 세계의 착각"이 원초적으로 해소되기 때문에, "존재와 현상의 이원론"이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르트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아무것도 숨겨져 있지 않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구절이 생각나게 하는 글이더라고요. (참고로, 동서문화사 고전 번역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자주 제기되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 번역만큼은 상당히 훌륭하다고 프랑스 철학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평가받더라고요.)
4. 모리스 메를로-퐁티, 「서문: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2 [1945], 11-33.
현상학에 대한 '교과서적' 혹은 '표준적' 해설이라고 해도 좋은 글입니다. 『지각의 현상학』은 매우 독창적인 책이지만, 『지각의 현상학』의 서문은 오늘날 출판되는 현상학 입문서들과 비교해도 좋을 만큼 매우 평이하고 체계적으로 현상학을 해설하고 있어요. '순수 기술', '현상학적 환원', '형상적 환원', '지향성'이라는 후설 현상학의 핵심 개념들이 잘 소개되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후설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함께, 현상학에 처음 입문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특별히, 이 글의 앞부분에서 메를로퐁티가 현상학의 연원을 헤겔, 키에르케고어,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같은 '후설 이전의' 철학자들에게 둔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비록 후설이 20세기에 '현상학'이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철학자인 것은 맞지만, 사실 '현상학적' 사고 방식 자체는 철학사에서 훨씬 이전부터 내려오고 있었다는 게 메를로퐁티의 지적입니다. 현상학이 대단히 특별하고 낯선 사유라기보다는, 우리가 대상을 기술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일은 체계화한 사유라는 거죠. 아래는 제가 예전에 이 텍스트를 블로그에 정리해 본 내용입니다.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서문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