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에서는 장애나 정신질환의 사례가 꽤 오래 전부터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많이 논의되었어요. 오늘날의 영어권 지각철학에서는 색맹, 맹시, 환각 등의 사례가 지각 경험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에서 거의 빠질 수 없는 주제로 등장하게 되었을 정도로요.
대륙철학에서도,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같은 20세기의 고전적 연구에서부터 이미 뇌손상 환자 사례나 환상통 사례가 다루어져요. 더 나아가,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정신질환과 정신의학 역사를 다룬 책이면서도 20세기 프랑스 철학과 사회학의 고전으로 잘 알려져 있죠. 프로이트의 저작들의 경우, 그가 정신과 의사였던 만큼, 정신 질환 사례로 가득하고요.
주로 이런 사례들은 지식, 지각, 진리 등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상식을 깨는 반례로 아주 중요하게 부각돼요. '정상적 인식 상황'을 자명하게 가정하고서 성립한 철학적 논의들을 무너뜨리기에는, 이런 장애나 정신질환의 반례만큼 강력한 것도 없으니까요. 물론, '장애'나 '정신 질환'이라는 현상 자체에 주목하여 그 주제만 집중적으로 다루는 철학이라면 아주 최근에서야 등장했겠지만, 장애와 정신 질환에서 발견되는 사례들을 통해 우리의 일상적 상식을 깨는 철학적 논의들이라면 이렇듯 철학의 여러 분야에 이미 녹아들어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