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문트 후설, <현상학적 환원> 부록 16번 '에포케는 정립적 세계삶의 의지적 중단이며 그러한 것으로서 세계삶의 하나의 능동적 양태이다' 번역

오랜만에 들어온 김에 가장 최근에 작성한 번역문 하나를 많이 부족하지만 올려봅니다. 후기 후설의 경우, 전기에 자신이 펼쳤던 주장--세계의 존재가 지니는 확실성은 판단중지의 대상이다--을 뒤집으면서 세계존재의 필증성을 다시 역설하기에 이르는데요. 여기 번역되어있는 이 유고는 세계존재를 괄호치는 환원의 활동조차 세계삶의 한 방식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가 입장 자체의 변화일지, 환원 이후의 발견에 따른 것일지, 필증성의 개념이 확장된 것일지, 아니면 다른 이유를 가질지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후설 철학의 변천사에 관심 있는 분이 계시다면 함께 토론해보아도 좋을 것 같아요. 다들 좋은 하루 되세요.

E. Husserl (Hrsg. von S. Luft), Zur Phänomenologischen Reduktion: Texte aus dem Nachlass (1926-1935), Kluwer Academic Publishers, 2002 (Hua XXXIV), s. 262-263, 모든 강조는 필자.

[262] 부록 16. <에포케는 정립적 세계삶의 의지적 중단(Arretieren)이며 그러한 것으로서 세계삶의 하나의 능동적 양태이다>(약 1933년 5월)

나는 모든 (정립적인) 작용을 우선 개별적인 경우에 삼갈 수 있다. 나는 어떤 세계적인 것에 대해 상세한 앎, 나에게 인식의 하부토대로서 현시되는 그런 앎을 얻는 것을 삼간다. 그렇게 일반적으로 경험 속에서 주어지는 세계를 이론적 주제로 만드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세계에 몰두하는 것을 삼간다. 나는 또한 그것을 통일적으로, 한 번의 장악(Umgriff),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인 것 일반의 장악 속에서 할 수 있다; 이는 전체 자연적 깨어있는-삶의 정지(Stockung)를 의미한다. 지속적으로 미리 주어진 세계는 여전히 언제나 거기에 있는데, 나의 그것-안에로-빠져(hinein)-경험함(경험하면서 앎을-취함, 경험함을-포착하면서-나에게로-향함과 개별적으로-나에게-포착된-것을-응시함, -전유함), 빠져-사유함, 빠져-효과냄(hineinwirkung)의, 그에 대해 고통과 쾌감을 경험함 등의 장, 짧게 말해, 세계삶의 장이 될 준비가 된 채로 그렇다[세계는 거기에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것에 대해 나는 삼간다. [세계 또는 세계삶은] 거기에 머무를 수 없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나의 삶 속에서 깨어난 능동성, 개별적인, 다양하게 얽혀가는, 세계삶이 아닌 하나의 능동성[능동적 활동]의 새로운 방식이 또한 가능한가? 내가 자연적 태도의 능동성[능동적 활동]이라고 부르는 모든 능동성[능동적 활동]은 인간적 세계삶[에 속하는 것]이며, 그 속에는 그렇게 살아가는 자, 그렇게 태도-지워진 자에 대하여 그가 세계의 그를-위하여-현존함의 지속성 속에 산다는 것이, 세계가 그를 위해 미리 계속해서 거기 있다는 것이, 그가 수행하는 모든 작용 앞에 미리 계속해서 거기 있다는 것이 놓여있다. 세계는 그를 위해 거기에 있으며, 그는 세계에 대해 [세계를] 그러한 것으로서 의식하고 있고, 선능동적으로 의식하는 자로서 그렇다; 작용들에 대한 전제로서 의식되어(비주제적으로, 선주제적으로) 세계는 [...] 그로부터 이 혹은 저 작용들이 깨어나는, 세계아이로서의 인간의 작용들이 깨어나는 모든 동기를 품고 있다[bewusst als Voraussetzung für Akte(unthematisch, vorthematisch) birgt sie, birgt das sie vorgebende Bewusstsein alle Motive, aus denen diese oder jene Akte erwachsen, die Akte des Menschen als Weltkindes.]

[다음 문장은 비문이다.] 이러한 작용들의 우주--작용들 전체가 다 함께--를 에포케 하에 처하게 함은 그 어떤 정립적 계속-삶의 가능성, 하나의 계속-진행되는, 언제나 새롭게 수행되는 능동성[능동적 활동], 세계를 미리-부여하는 의식, 그 의식 속에서 모든 이전의 세계삶의 작용들이 그것의 습득물과 당시로부터 미리-그려진 가능한 성취들을 가지며 [어디에로?] 흘러들어오게 하고 여전히 타당하고, 여전히 깨어있는-삶의 토대로서 의식되는 그런 의식으로서의 활동성의 가능성도 산출하지 않는다[Das Universum dieser Akte--sie alle in eins--der Epoché unterwerfen, ergibt noch solange keine Möglichkeit eines positionales Fortlebens, einer fortgehenden, immer neu leistenden Aktivität, als das Welt vorgebende Bewusstsein, in welches alle früheren Akte des Weltlebens ihre Erwerbe und ihre von damals her vorgezeichneten möglichen Leistungen haben einströmen lassen, noch in Geltung ist, noch bewusst is als Boden des wachen Lebens]. 나는 내가 숙고 없는 불안 속에서 뻣뻣해지고 모든 행위를 [그에 따라] 태도지울 때, 조금도 보거나 듣고 싶어하지 않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경험하면서 수용하고(앎을 향하여, 가리키기[Aufzeigung]) 싶어하지 않을 때조차 자연적 태도 속에 있다. 세계는 그럼에도 나를 위해 거기에 있다, 나는 뻣뻣하고[starr], 뻣뻣한 기대의 상태 속에 있고, 세계의 능동성[능동적 활동] 속으로 다시 들어설 준비가 되어있지도, 미리 주어진 세계에 질문을 던질 준비가 되어있지도, 세계적인 것에 몰두할 준비가 되어있지도 않다. 계속해서-타당한 세계의 토대 위에서 보편적 에포케는, 뻣뻣함의 상태와 유사하게, 단지 일시적으로[vorübergehend] 정립적 세계삶을 의지적으로 중단함만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그러나 그 자체로 하나의, 독특하기는 하지만, 세계삶의 방식이다! 보편적인 이론적 습관으로서, 기존의 모든 지식, 모든 주장하는 학문, 낡은 보편의미에서의 모든 철학의 괄호치기로서 그것[그 양태?]은 진행 속에서 말하자면 세계에 대한 하나의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엄밀학의 새로운 정초를 의도로 하여 동기부여될 것이다.

원문: 에드문트 후설, <현상학적 환원> 부록 16번 '에포케는 정립적 세계삶의 의지적 중단이며 그러한 것으로서 세계삶의 하나의 능동적 양태이다'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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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부분과 관련된 후설의 전기 텍스트를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저는 세계의 존재에 대한 후설의 입장은 전기나 후기나 크게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후설 연구자분들 중에는 『이념들』 등에서 제시된 전기 후설의 입장을 일종의 ‘관념론’으로 해석하시면서, 그 입장이 후기에 이르러 수정되었다고 하는 분들도 꽤 있지만, 저는 이 해석에 다소 의구심을 갖고 있어요. ‘지향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애초에 의식과 대상 사이의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인데, 어떻게 지향성을 말하는 후설의 철학이 마치 ’대상 없는 의식‘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관념론적 입장인 것처럼 해석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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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적으로, 저는 후설이 세계의 존재에 대한 판단중지를 수행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실재성’에 대한 판단중지라고 봐요. 그러니까, 의식과 동떨어진 사물 자체로서의 세계, 혹은 자연과학이 탐구하는 순수 인과질서로서의 세계 따위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괄호치는 것이 후설의 목표였다고 보는 거죠. 그렇다면 이런 ‘형이상학적 실재성에 대한 판단중지’가 ‘세계의 필증성’과 대립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전자의 ‘세계’는 형이상학적 의미의 세계인 반면, 후자의 ‘세계’는 생활세계라서, 애초에 서로 다른 개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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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후설은 중요한 유고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고 번역본이 거의 안 나온 게 아쉬웠는데, 덕분에 공부의 지평을 넓힐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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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단 자하비의 <후설의 현상학> 같은 짧은 책밖에 읽어보지 않은 저에게 "세계삶" 이라는 개념은 조금 생소하네요. 알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해 기억이 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지만요. <후설의 현상학>을 읽을 때는 "세계의식의 삶(Weltbewußtseinsleben)"같은 개념이 잠깐 언급되는 정도라서 별로 중요히 여기지 않고 대충 표면적인 뜻만 생각하고 넘겼었는데, 번역자료를 보니 더 궁금해지네요. "세계삶"에 대해 기초부터 이해하려면 유고들을 주로 읽어야 할까요? 아니면 <유럽학문의 위기> 같은 후기작을 읽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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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님 안녕하세요, 비판적인 코멘트 감사합니다. 혼자서만 골몰해오던 주제를 누군가와 공유하게 되어 설렙니다. 사견을 몇 자 적어보겠습니다.

(1) 제가 아는 한에서 세계무화(Weltvernichtung)의 방법론은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의 데카르트적 길의 일부로서 ⟪이념들⟫ 1권 외에도 후설 전기 텍스트 거의 대부분에 등장합니다. 가장 명시적이고 치밀하게 드러나는 것은 Hua VIII(제일철학 2권)의 전반부이고(1923-24), 그보다 1년 정도 앞서는 강의록인 Hua XXXV(철학 입문)에도 세계의 존재가 확실성(필증성)을 결여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믿음/정립을 중지한다는 주장이 명시적으로 공유됩니다. 다만 YOUN님께서 지적해주신 것처럼 '세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어떤 세계는 판단중지의 대상이 되고, 어떤 세계는 그렇지 않게 됩니다. 판단중지의 대상이 되는 세계는 말씀해주신 대로 "의식과 동떨어진" 즉자로서의 대상들의 총체, 곧 자연적 태도에서 보아지는 세계인 반면, 그와 같은 즉자적/자연적 세계--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우주"가 아니라는 코멘트가 늘 따라붙습니다(Hua I, 7)--에 대한 판단중지 이후 드러나는 주관적 구성물로서의 초월론적 세계(초월론적 경험의 상관적 지평)은 에포케에 걸리지 않습니다. 걸리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이 초월론적 세계의 발견이 곧 판단중지의 성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저는 에포케의 성과로서 발견되는 초월론적 세계가 생활세계보다 외연이 더 넓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부분만큼은 YOUN님과 의견이 다르네요.)

(2) YOUN님의 해석대로 '(a)세계의 존재는 필증적이지 않다' vs '(b)세계의 존재는 필증적이다'의 구도에서 두 세계를 서로 다른 세계로 규정할 경우 난점이 사라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첫째, 후설이 (b)와 같은 주장을 펼칠 적에(e.g. Hua XXXIX, 251-258; Hua XXXIV, 467-469 등지) 자신이 말하는 세계가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의 세계인지 명시하지 않기 때문에 (b)에서 등장하는 세계가 (a)에서 등장하는 세계와 동일한 세계인지는 논증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저 역시 YOUN님과 마찬가지로 두 세계가 다른 세계를 가리킨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그저 자명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고, 근거를 요구하는 해석의 일종이 되어버린달까요. 이 해석을 견지할 때 넘어서야 할 또 다른 문제는 둘째, 후설이 환원의 반대작용으로서의 세계화/세속화의 작용 개념을 도입하면서 결국 두 세계 사이의 동일성을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때도 그 동일성이 논해지는 두 항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적 난점이 있습니다. 초월론적 현상학적 탐구의 결과로 인해 자연적 태도 자체가 영향을 받게 되는 '흘러들어옴(Einströmen)' 현상에 대한 언급이 후기 유고에 군데군데 있기 때문인데, 최초에 에포케에 걸렸던 자연적 세계가 곧 동일성의 한 항인지, 아니면 흘러들어옴의 영향을 받아 대상총체에서 지평으로 그 정의가 변모된 자연적 세계가 곧 동일성의 한 항인지 사실 애매합니다.) 아무튼 저의 잠정적인 결론은 두 세계가 존재론적으로 다른 세계는 아니지만 상이한 태도에서 보아진 결과 상이해진 그런 다른 세계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동일한 것의 존재가 어떻게 필증적이지 않은 동시에 필증적일 수 있느냐, 태도변경만으로 그러한 차이를 빚어낼 수 있느냐라는 의문이 남기는 해요.

(3) 또 다른 시나리오는 후설이 전기의 견해를 완전히 폐기한 채, 동일한 세계를 두고 (a)에서 (b)로 견해를 수정했을 가능성입니다. 실제로 후설이 전기의 저서들에서는 세계무화의 조작이 전혀 부조리하지 않다고 주장했던 반면 후기의 저서에서는 (전기의 저서에 대한 언급 없이) 세계무화의 조작은 부조리한 게 맞다고 말하거든요. 이 문제를 다루는 페이퍼의 초고를 써둔 것이 있는데, 언젠가 세상에 내놓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4) 지향성에 대한 YOUN님의 해석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사실 " 『이념들』 등에서 제시된 전기 후설의 입장"이 관념론으로 해석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 물론 후설이 해당 사조를 정확히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논구의 대상이 되겠지만, 후설 자신이 스스로의 철학을 '초월론적 관념론'이라 명시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초월론적 관념론은 그 어떤 실재론보다도 실재론적이다, 같은 코멘트가 따라붙긴 하지만요...) 다만 개인적으로 저는 관념론이 어떤 의미에서 대상 없는 의식에 대해 강조하는 사조가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예컨대 버클리만 해도 대상을 비물질적 관념으로 규정할 뿐 대상을 부정하지는 않기 때문에 YOUN님께서 "관념론적 입장"으로 의도하신 바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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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1st님 안녕하세요, "세계삶"은 단순하게 세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삶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딱히 특정한 저서에 구애받으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위기>를 읽으셔도 많은 도움이 되실 것 같고, 만일 유고를 보신다면 Hua XXXIX(생활세계) 및 Hua XXIX(위기 보충판)를 추천드립니다.

여담이지만 후설이 독일어의 특성을 이용하여 이런 식으로 신조어 만드는 일을 그냥 좋아하는 것 같아요. 말씀해주신 것처럼 "의식삶"이란 말도 종종 쓰이고, "인식삶", "충동삶" 등 신조어는 끝이 없습니다(하하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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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주신 내용에 대해 거의 대부분 동의합니다.

(1) '초월론적 세계'와 '생활세계'를 구분하신 것도, HARIBO님의 설명처럼 '초월론적 세계'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2) '초월론적 관념론'에 대해서는, HARIBO님이 괄호에서 적어주신 것처럼, 후설이 '관념론'과 '실재론'을 서로 엄격하게 대립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칸트가 자신의 철학을 '초월론적 관념론'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그가 '경험적 실재론'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듯이 (오히려 '경험적 실재론'을 포함하는 입장이 '초월론적 관념론'이듯이,) 후설도 '관념론/실재론'이라는 이분법 자체를 극복하려 한다고 봐요. (사실, 버클리도 이런 의미에서 관념론을 주장했다고 저도 생각하고요.)

(3) 다만, 대부분의 후설 비판자들이 후설을 '관념론'이라고 말할 때는, 이 용어를 일종의 회의주의나 반실재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영미철학에서도 '관념론'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어감을 지니는 용어로 자주 쓰이는 것 같고요. 그러니까, 의식을 철학의 토대로 삼은 나머지, 외부 세계의 존재를 의식에 의해 구성된 '허구'나 '가짜'쯤으로 보는 관점이 '관념론'이라고 자주 일컬어지곤 하더라고요. 경멸적인 의미로 '관념론'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인데, 적어도 저는 이런 경멸적인 의미의 '관념론'은 후설과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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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참에 후설과 독일어 공부에 열정을 쏟아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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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사실 버클리는 관념만이 실재라고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에 그에게 이를테면 '반실재론'이라는 수식을 적용한다면 부적절해지겠지요. 사실 저는 칸트도 그렇고 심지어 버클리를 읽었을 적에도 크게 반직관적인 부분이 없었는데, 관념론 자체를 실재를 부정하는, 말씀해주신 것처럼 세계를 허구로 생각하는 사조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래서인지 언젠가 관념론의 역사를 제대로 갈무리하고 싶은 욕망도 있고요.) 오히려 관념을 넘어서는 외부자의 실재에 대해 단언하는 쪽이 더 독단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고요. 물론, 어쩌면 저 혼자서 근대를 살고 있는지도...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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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비슷한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특히, 영어권 형이상학이나 인식론을 공부하다 보면, 관념론에 대한 논의 자체를 그다지 진지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형이상학적 실재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면, 마치 '논의의 장' 자체를 벗어나서 괜히 철학적으로 튀어 보이기 위해 딴지를 거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리곤 해서요. 오히려 저는 실재성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 없이 성립한 형이상학이 피상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문제제기가 마치 진지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져 버리니, 좀 아이러니하더라고요. 가끔 이 점 때문에 저도 철학적으로 외롭다고 느끼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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