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 크립키에 관하여 -- 어느 천재 철학자의 브랜드마케팅

*혹시 이쪽 분야에 익숙치 않으신 분이 오해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 적습니다. 이하의 내용은 전부 개쌉소리입니다. 언어철학 기말논문을 쓰다가 싫증나서 쓴 거 맞습니다. 재미로 읽어주세요.

저는 솔 크립키라는 철학자에 대해 잘 모릅니다. 제가 크립키의 글을 읽어본 것은, 겨우 『이름과 필연』 및 『비트겐슈타인 규칙과 사적 언어』 두 주요 저작 뿐입니다. 이 두 책의 저자 크립키로 논의의 범위를 한정할 때, 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자 합니다.

크립키는 사실 어둠의 비(트겐슈타인)사모 회원이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이라는 20세기의 희대의 인물의 그림자에 가리워지지 않기 위해, 본인의 천재적인 지능으로 브랜드마케팅에 성공하여 분석철학계에서 위대한, 독창적인 천재 철학자라는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각각의 근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형태로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독자 제현의 질정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1. 크립키는 천재로 이름난 사람입니다. 크립키는 결코, 비트겐슈타인이든 누구든, 다른 학자를 오독했을 리 없습니다. 크립키는 틀리지 않습니다. 모든 겉보기의 잘못은 크립키의 의도된 서술일 뿐입니다.

  2. 크립키는 자신이 비트겐슈타인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천재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자신을 브랜딩하고 싶어합니다. 크립키의 주요 저작의 공통적인 특징은, 비트겐슈타인을 강하게 의식하며 견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을 완벽히 이해했고(희대의 철학 천재 솔 크립키에게 오독/오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결코 틀릴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곧이곧대로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런 내용의 글만을 써낸다면, 자신은 절대로 그와 동급의 천재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도 크립키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크립키가 선택한 전략은, 마치 비트겐슈타인을 타겟으로 놓고 그를 극복하는 견해를 제시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거나(『이름과 필연』), 혹은 그의 견해와 비슷한 것이 역대급의 철학적 떡밥을 던진다는 식으로 서술함과 동시에 자신은 그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두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비트겐슈타인 규칙과 사적 언어』)입니다.

  3. 그러나 크립키의 궁극적인 철학적 입장은 비트겐슈타인과 동일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또 크립키는 틀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 인용은, '분절적 인용'이라는, 철학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현대 철학계에서 브랜드마케팅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훌륭하고 위대한 천재적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분절적 인용이란, 인용하려는 부분의 전부를 인용하지 않고, 양적으로는 해당 부분의 대다수를 인용하되 가장 결정적인 내용은 인용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크립키는 이러한 인용 방식을 절묘하게 사용하여 본인을 위대한 철학자로 브랜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4. 『이름과 필연』에서 크립키는 기술주의 이름 이론을 비판합니다. 이 기술주의 이름 이론에 속하는 것 중 하나가 '다발 이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크립키는 다발 이론의 예시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를 인용합니다. 그러나 크립키는 분절적 인용을 할 때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빼먹습니다. 바로 "나는 "N이라는 이름을 고정된 의미 없이 사용한다."는 부분입니다. 사실 이 구절까지 고려한다면, 그리고 정확히 올바르게 고려한다면, 크립키가 인용한 그 비트겐슈타인의 글은 다발 이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읽혀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다발 이론가들은 실제로 존재하고(스트로슨, 설), 또 비트겐슈타인의 그 글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크립키는 다발 이론가들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입장, 동시의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옹호합니다. 크립키가 기술주의를 비판하며 이름의 의미가 어떠한 기술구에 의해서도 구성되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어떠한 기술구도 이름의 지시체를 결정해줄 수 없다고 주장할 때,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크립키의 인과적 지칭이론 역시 비트겐슈타인적인 견해입니다. 이는 결코 순수하게 물리적인 인과 관계에만 호소하여 지칭 개념을 해명하고 있는 이론이 아닙니다. 최초의 명명식(initial baptism)이 '의식'인 한, 이는 언어공동체를 전제할 수밖에 없고, 크립키는 이 점의 중요성을 은연중에 강조합니다.
    그러나 크립키에게 또한 중요한 것은, 이런 비트겐슈타인적인 자신의 견해가 겉으로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자신의 입장을 가능한 한 숨겨야 했고, 그렇기에 몇몇 함정들과 분석철학자들이 물 만한 떡밥들을 숨겨 놓아 어그로를 끕니다. 거기에 낚인 사람들은 크립키가 비트겐슈타인을 극복했다고 생각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예컨대 크립키가 노골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이 '틀렸다'라고 말하는 파리 미터자 논의는 사실 어그로에 불과합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틀렸다는 것을 가정하고 논의를 시작합니다. 그러고는 양상논리 좋아하는 사람들 어그로를 제대로 끌 만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5. 『비트겐슈타인 규칙과 사적 언어』로부터 출발한, 크립키-비트겐슈타인, 소위 크립켄슈타인이라고 불리는 떡밥은, 분석철학계에서 대단히 논쟁적이면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떡밥 중 하나였습니다. 사실 이 내용은 크립키가 본격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을 다루는 부분이기도 하고, 저의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해줄 부분입니다. 여기서도 크립키의 '분절적 인용'은 참으로 절묘하게 사용됩니다. 201절에 대한 내용이 자주 논해지는데, 굳이 여기서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여하튼 크립키의 그 책은, 비트겐슈타인을 철학 역사상 가장 강력한 회의주의를 제기한 인물로 그린다고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크립켄슈타인에 대한 사실주의 해석이라는 게 있습니다. 크립켄슈타인의 지배적 해석은, 크립키가 그리는 비트겐슈타인이 강력한 회의주의를 제기한 인물이라고 해석합니다. '의미함'이라는 사실은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말이죠. 그러나 사실주의 해석을 지지하는 이들은, 크립키가 그리는 비트겐슈타인의 견해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크립키는 자신의 책에서 회의주의자와 비트겐슈타인을 구분합니다. 이는 『철학적 탐구』의 대화를 모방한 것으로,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말과 대화 상대자의 말을 잘 구분하지 않는 것을 오마주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분석철학자들은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낚여버린 것이죠.
    사실주의 해석에 따를 때 회의주의자는 다음의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1) 만약 화자 X가 용어 a로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a의 올바른 적용을 규정하는 이런저런 속성들이 있다.
    (2) 만약 a의 올바른 적용을 규정하는 이런저런 속성들이 있다면, X가 a를 사용하는 것을 규정하는 조건으로 여겨지는 X에 대한 사실이 존재한다.
    (3) X가 a를 사용하는 것을 규정하는 조건으로 여겨지는 X에 대한 사실은 없다.
    그러므로,
    (4) 아무도 용어를 가지고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크립키가 그리는 비트겐슈타인은 다음의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2), (3), ~(4) 그러므로 ~(1)
    그런데 이렇게 정식화된 입장은, 그냥 비트겐슈타인의 충실한 해석자들이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로 여기는 것과 똑같은 입장입니다. 사실주의 해석을 옹호하는 학자들에는 Byrne, Wilson, Kusch 등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크립키 본인이 Kusch에 동의한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크립키의 견해는 비트겐슈타인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역시 이것도 크립키의 탁월한 마케팅 솜씨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사실 그런 엄청나게 강력한 회의주의 따위를 크립키가 받아들일 리 없습니다. 크립키가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초-사실에 대한 회의주의, 그리고 의미를 구성하는 사실에 대한 회의주의입니다. 이는 사실 말이 회의주의이지, 그냥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랑 똑같습미디. 그러나 크립키는 상기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어그로를 끌어야만 했고, 비트겐슈타인 및 그의 일반적인 해석자들과도 다른 노선을 취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기에 크립키는 이런 전략을 취했고, 결과적으로 성공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크립키가 엄청나게 강력한 회의주의적인 색채를 띠는 것 같이 말하는 것은 모조리 어그로입니다. 그의 '회의적 해결책' 역시, 사실은 초-사실 및 의미 구성 사실에 대한 회의적 해결책이고, 주장가능성 조건이라는 것도 그저 진리조건 의미론에 대한 반대에 불과할 뿐입니다. 다만 "철학 역사상 가장 강력한 회의주의"와 같은 엄청난 말들을 던져야 어그로가 끌릴 뿐이죠.

이상의 이야기는 현대철학에서 브랜드마케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립키는 자신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일화에 대해서 즉답을 꺼리고, 결코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저작들을 출판하지 않으면서, 신비주의적 컨셉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마케팅 잡기술보다, 철학자라면 자신의 저작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크립키는 자신의 저작을 철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브랜드마케팅 기법을 동원해 써내려갔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자신의 견해를 어떤 방식으로 표명해야 할지, 또 자신의 작업물을 어떻게 내세워야 할지에 대해서도 우리가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인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 대다수는 크립키 같은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틀리지 않을 수도 없고, 그런 대단한 마케팅적 발상도 하기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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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반대 진영의 어휘들을 적절히 섞어서 뒤로는 비트겐슈타인을 가리키는 천재성에 감탄하고 갑니다... 201절을 절반만 읽고 책 한 권을 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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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키를 거의 뭐 비트겐슈타인 진영의 다크나이트로 만들어버리는...ㅎ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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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내용을 추가하셨네요. 요 부분은 "전부 개쌉소리"라고 하기에는 꽤나 맞는 말 같습니다;;; 제가 언젠가 이 부분으로 논문을 써보고 싶어서 구상하고 있는 내용도 있었거든요. 크립켄슈타인에게서 어디까지를 받아들이고, 어디부터를 버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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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키가 정말 '사실주의적 해석'이 주장하는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을 해석하고 있는지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고 해도, 분명 크립켄슈타인이 "전부 개쌉소리(?)"를 한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해요. 설령, 크립켄슈타인을 회의주의자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회의주의자 크립켄슈타인이 어떠한 주제에서 원조 비트겐슈타인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지(이상하게 크립켄슈타인이 틀렸다는 연구는 많아도 원조 비트겐슈타인과 어떤 점에서 일치하는지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부분들의 정당성을 어떤 방식으로 가장 잘 살려줄 수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회의주의자 크립켄슈타인은 틀렸는지를 명확하게 구분해 보는 게 좀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