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의 한정기술구와 프레게의 동일성에 관하여

안녕하세요,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이고, 언어철학은 이번 학기에 처음으로 입문하게 되었는데,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어서 선생님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전에 서강 올빼미에서 진행한 스터디 영상도 잘 참고해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러셀의 한정기술구를 이용하면, 프레게의 의견에 따랐을 때 진리값을 구할 수 없는 문장, 가령 a) 현재 그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의 진리값을 구할 수 있게 되고, 배중률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은 잘 알겠습니다. 프레게는 단칭어든 문장이든 지시체가 없어도 뜻이 존재할 수 있기에, 사실은 그 뜻이 정보값을 지니기에 여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보았다면, 지시주의자인 러셀에 의하면, 뜻이라는 또 다른 개념을 가정할 필요 없이, 애초에 한정기술구가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는 식으로 empty noun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이해는 되는 것 같아요.(잘못 이해했다면 말씀해주세요.)

그런데, 이런 러셀의 이해에 따르면, 프레게가 뜻과 지시체의 관하여에서 도입했던, 동일성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건가요? 동일성과 관련하여 대상과의 관계를 지시체로 이해한다면, a=a와 a=b의 cognitive value에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되는 것으로 보이는데..러셀의 주장이 프레게가 언급한 (proper)지식의 확장이나 informative value을 어떤 식으로 확보할 수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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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이름에 대한 기술주의 이론' 에 따르면 대부분의 이름은 한정기술구의 위장일 뿐입니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의 위장이라는 식이죠. 러셀의 존재론은 그 자체로 복잡한데다 그 의견을 계속 수정해나갔기에 상술하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상 아리스토텔레스를 직접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이름'은 아니라는게 기술주의 이론의 요점입니다.

프레게 문제, 즉 '샛별=개밥바라기' 문제를 생각해보죠. 기술주의에 따르면 '샛별'은 '새벽에 뜨는 별', '개밥바라기'는 '저녁에 뜨는 별'이라는 기술구 각각의 위장일 따름입니다. 따라서 '샛별=샛별', '샛별=개밥바라기'는 각각 의미가 달라지므로, 지식의 확장 및 정보적 차이를 설명할 수 있스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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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 깊은 답변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런데 여전히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 러셀의 기술주의를 따라, 새벽에 뜨는 별 = 새벽에 뜨는 별, 새벽의 뜨는 별=저녁에 뜨는 별로 환언해본다면, 여전히 프레게가 반대했던 지시체에 관한 동일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 되지 않나요? 아니면 혹시, 기술구 자체가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게 아니기에, 프레게가 제기했던 문제를 문제로 만들지 않는 게 러셀의 방식이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러셀이 동일성을 어떻게 확보하는지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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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dbunny님이 설명해주신 내용이 기본적으로는 맞습니다. 다만, 의문을 해소하시려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알아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1) 러셀의 「지칭에 관하여」가 물론 프레게의 「뜻과 지시체에 관하여」를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은 맞긴 하지만, 이 논문이 다루고자 하는 기본 문제는 한정기술구의 지칭 문제이다 보니, 프레게의 논문과 내용이 1:1로 대응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동일성에 대한 프레게의 고민을 러셀이 정확히 겨냥해서 완벽하게 설명하였다고 보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2) 실제로, 「지칭에 관하여」에서 러셀이 프레게를 비판하는 부분은 내용이 불분명하기로 악명 높습니다. (초창기 분석철학이 자신들이 지향하는 것만큼 명료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자주 인용될 정도로요.) 러셀이 프레게를 오해하여서 완전히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해석자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3) 제가 보기에, '샛별(=새벽에 뜨는 별)'과 '개밥바라기(=저녁에 뜨는 별)'라는 고유명사가 어떻게 동일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러셀의 기술 이론의 중요한 약점입니다. 고유명사를 한정기술어구로 설명하려 하면, 동일하지 않은 것들이 동일해지거나 동일한 것들이 동일하지 않아지는 문제가 발생하죠. 크립키의 고정 지시 이론이 바로 이 점 때문에 러셀의 기술이론을 비판합니다. (크립키의 예시에서는 '물'과 'H2O' 사이의 관계를 들 수 있겠네요.) 흥미롭게도, 이런 크립키의 주장은 다시 '비존재의 역설'이라는 문제에 빠집니다. 러셀이 자신의 기술이론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가 다시 등장하는 거죠. 그러니까, 한 쪽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쪽 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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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는 적절한 해석인 것 같습니다. 요컨대 "샛별=개밥바라기"는 곧 대략 "새벽에 뜨는 별이 하나 있고 또 저녁에 뜨는 별이 하나 있는데, 사실 그 둘이 같은 별이다"라고 분석이 되니만큼 '지시' 없이도 정보성과 관련된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제가 「지칭에 관하여」라는 구체적인 논문에 대한 언급없이 "'이름에 대한 기술주의 이론'"라고 추상적으로만 언급한게 이런 까닭 때문이었습니다 ... 첫번째로 러셀 식의 한정기술구 분석 자체는 이름을 위장된 한정기술구로 보는 것과 논리적으로 독립적인 것도 있겠고, 둘째로 말씀해주신 바처럼 ...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는 「지칭에 관하여」 후반부의 악명높은 Grey's elegy 논변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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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악명이 높다고 하니, 저 혼자 끙끙 앓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약간은 위안이 되네요. 개인적으로 러셀을 읽으면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프레게를 적극적으로 논박한다는 느낌보다는, 다른 개념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프레게의 주장보다 경제적(?)이고 보다 간단한 주장을 내놓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보다 경제적인 주장을 전개했다고 해서 곧바로 프레게의 주장이 기각되는 것은 아니니, 다른 철학자들의 주장에서는 어떻게 보완되고 새롭게 비판될 수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겠네요.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여전히 걸리는 것 같습니다. 가령, 선생님께서 기술구를 사용해서 분석하신 것처럼, "새벽에 뜨는 별이 하나 있고, 또 저녁에 뜨는 별이 하나 있는데, 사실 그 둘이 같은 별이다"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정보성이 그 안에 함의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둘이 사실 같은 별이다"라는 말 때문에, 저 문장이 "새벽에 뜨는 별은 새벽에 뜨는 별이다" 혹은 "저녁에 뜨는 별은 저녁에 뜨는 별이다"라는 동어 반복과 어떻게 결정적으로 다를 수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조금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아직 러셀의 논의가 완전히 머리에 자리 잡히지 않았나 봅니다. 답변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