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소개글]
최근 헤겔의 초기 사상이 담긴 강연 원고 4천여 쪽이 새롭게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헤겔 연구자들은 반가워하면서도 《정신현상학》 등 그의 주저를 읽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새로운 원고는 또 어떻게 읽느냐는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독일인들도 헤겔을 두고 '독일어 번역'이 필요하다는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말할 만큼 헤겔은 난해한 학자이고 그의 사상은 쉽게 설명할 수 없다.
2020년 헤겔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며 독일에서 출간된 《헤겔의 세계》는 교수, 언론인, 서점인들의 심사를 거쳐 독일 전문도서상 수상작으로 선정되고 《슈피겔》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등 다방면에 걸쳐 고른 인정을 받았다. 이 책은 난해한 정신사와 문화사를 다루면서도 이를 퍽 흥미진진하게 묘사할 뿐 아니라 헤겔이라는 대상에 몰입하면서도 그의 영웅적 이야기를 배제하며 적정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이 독자를 매료한다.
이 책의 표지 한가운데에 놓인 열기구는 헤겔이 살던 시대의 능력의식을 보여준다. 그가 살던 시대는 역사, 진보, 자유, 국가, 시민 등의 개념이 오늘날의 의미를 얻고 계급, 공산주의 등 새로운 개념이 태동하던 시기이다. ‘세계’도 그렇다. 이 개념은 가열된 공기가 양력을 만들어낸다는 ‘거의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생각’을 통해, 처음으로 “더 이상 천상의 관찰자만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 인간도 도달할 수 있는 현실을 가리키는 의미심장한 개념”, 혹은 인간도 도달할 수 있는 높이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현실을 가리키는 개념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헤겔의 관념론이 어떤 초세간적이고 초시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 세계와 밀착하여 시대와 대결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헤겔의 시대만큼이나 격변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우리에게, 세계와 밀착하여 시대와 대결하는 헤겔의 사상적 고투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위르겐 카우베는 19세기 초 독일 지성계와 정치 환경 전반의 분위기를 생생히 전달하며 헤겔을 둘러싼 모든 것을 소개한다. 프랑스 혁명이나 7년 전쟁처럼 헤겔이 경험한 역사적 사건은 물론, 그가 살았던 도시와 몸담았던 대학, 가족인 아내 마리 폰 투허, 누이 크리스티아네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이야기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그와 깊은 교우 관계를 나누었던 셸링, 슐라이어마허, 횔덜린, 슐레겔, 훔볼트, 랑케, 괴테 등 쟁쟁한 지성사의 인물들도 마치 카메오처럼 등장하며 독자를 헤겔이 살던 시대로 안내한다. 헤겔 연구자 외에도 근대철학이 발달한 시대적 배경에 관심 있는 교양인들에게 헤겔을 중심에 놓고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의 독일 지성사를 일람한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평소에 헤겔의 철학에 관심이 있어서 이 책의 북펀딩도 이미 알고 있긴 하였는데, 책 소개에서 몇 가지 궁금증이 생기더라고요. '헤겔의 세계'라는 제목에서 '세계'가 정확히 무엇을 의도하고 쓰인 건가 해서요. 그러니까,
이 부분만 보면 마치 헤겔이 살았던 시대와 사회를 '세계'라고 하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이 부분을 보면 '세계'라는 개념을 실재론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관념론적으로 이해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형이상학 논쟁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또 그 다음에,
이 내용은 다시 시대와 사회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서, 저는 책 소개를 읽으면서 다소 혼란스럽더라고요. 이 책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가 잘 잡히지 않아서요. (a) 헤겔이 살았던 시대와 사회를 '헤겔의 세계'라고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b) 헤겔이 실재성의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형이상학적 관점을 헤겔의 '세계'라고 표현한 것인지 헷갈려서요.
제가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긴 하지만, 책 소개를 보니까 『헤겔의 세계』는 그냥 '헤겔 전기'로 보입니다. 제목은 '헤겔이 살았던 세계'라는 뜻이겠죠. 일단 작가인 위르겐 카우베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문예란 편집자네요. 모르긴 해도 작가의 필력이 좋아서 마치 한 편의 전기 영화나 다큐 영화를 보는 것처럼 헤겔과 그의 시대를 잘 묘사해 놓은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같은 로볼트 출판사에서 나온 만프레드 가이어의 『칸트의 세계』라는 책도 있습니다. 한국엔 『칸트 평전』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네요.
독일엔 이런 유의 책이 은근히 많고, 대중적으로 인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로 치면 '이황의 세계'나 '정약용의 세계' 같은 게 될 텐데, 한국엔 이런 대중서는 거의 안 나오는 것 같군요. '자크북'(Sachbuch)이란 허구적인 '문학'과 대비되는 도서 장르인데, 실화를 바탕으로 쓴 책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자케'(Sache)는 후설 현상학의 '사태 자체'(Sache selbst)에 나오는 바로 그 단어입니다. 이 분야의 대가는 단연 뤼디거 자프란스키(Rüdiger Safranski)입니다. 이 작가는 독일에서 많은 상을 받았고, 이 사람이 쓴 책들은 한국어로 이미 여러 권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알라딘: 뤼디거 자프란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