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에 제시된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철학에 관한 보론과 비판

(해당 에세이는 2022년 가을학기 이승종 교수님의 수업 과제로 제출한 레포트입니다. 오늘 성적 입력이 완료되었길래 정보 공유 차원에서 올립니다.)

서론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이승종 2022, 이하 NRW)는 사람이 언어와 수학을 사용하는 현상을 “사람의 얼굴을 한 자연주의”의 관점에서 해명하려는 시도이다. 이승종 교수에 따르면 PI, §415와 PPF, §365 등의 구절은 비트겐슈타인이 확실성의 지평을 자연사의 관점에서 해명하고 있으나, 그의 관심사는 자연사 전체가 아닌 “사람의 자연사”에 국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NRW, p. 109-113).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작업은 “자연사 그 자체가 아니라 자연사의 지평에서 펼쳐지는 인간 현상을 관찰하고 기술”함으로써 “우리가 자연에 터를 둔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살고 세상을 본다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을 우리에게 환기”(NRW, p. 110)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이승종 교수의 해석이다.

1부에서 “사람의 얼굴을 한 자연주의”의 얼개를 제시한 이승종 교수는 2부에서 이를 수학에 접목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철학을 토대로 이승종 교수는 플라톤주의와 규약주의라는 수학철학의 양극단에 위치한 두 진영을 모두 공격한 후, 대안으로 수학의 필연성과 강제력을 삶의 형식과 자연사의 관점에서 해명한다. 수학의 필연성의 기원은 다름아닌 “판단에서의 일치,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 [그리고] 자연의 제일성”(NRW, p. 219)이다. 그러나 일치는 충분조건이 아니기에 우리는 주어진 삶의 형식과 자연사를 배경으로 상이한 수학 체계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한 수학 체계들은 마치 “캡슐”과도 같은 내적 자율성을 가지며, 캡슐 내부의 “필연적 강제력”(NRW, p. 224)과 캡슐 외부의 자연사적 필연성이 수학적 필연성의 제반을 형성한다. 이렇게 해명된 수학적 필연성은 “자연사적 사실과 삶의 형식의 국소성, 상대성, 변동가능성에 접맥”(NRW, p. 225)되어 있기에, 이로써 “플라톤주의와 규약주의의 양극단을 피해 수학적 필연성을 보존하면서도 변화의 역동성을 적절히 해명”할 수 있다고 이승종 교수는 주장한다.

본 소론에서 필자는 이승종 교수가 제시한 수학의 자연주의적 해석에 보론과 비판을 제시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논리학의 자연화와 모순론에 관하여 보론을, 수학의 자연화에 관하여 비판을 제시할 것이다.

1. 논리학의 자연화에 관한 보론

이승종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물리적, 생물학적 환경 등 사람의 자연사의 사실들은 사람의 인류학적 삶의 형식과 함께 그의 생각과 추론의 패턴을 조건 짓는다. 그리고 이 패턴은 논리학과 수학의 기본 법칙들로 고착된다. (NRW, p. 215, 필자에 의한 강조)

이승종 교수는 ‘생각과 추론의 패턴’의 사례로 무엇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필자는 Garver(1996)에서 제시된 양립 불가능성 논증을 강화해 패턴 고착화의 두 가지 사례를 직접 제시하고자 한다.

소쉬르에 따르면 모든 의미 체계는 부정의 개념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즉, A가 유의미한 개념이라는 것은 곧 A를 발화할 수 있는 상황과 없는 상황이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다. ‘새파랗다’를 발화할 수 있는 상황에서 ‘파랗다’를 발화하는 것은 괜찮지만, ‘붉다’를 발화할 수 있는 상황에서 ‘파랗다’를 발화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허용과 불허의 관계가 ‘파랗다’의 의미를 형성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다. 어떤 언어게임 G가 있다고 하자. G에서 유의미한 상황의 집합을 Sa(G)라고 하고, G에서 사용되는 발화의 집합을 Pr(G)라고 하자. G를 이해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다음의 집합 Sem(G)를 체득하는 것이다.

Sem(G) = { {P, Q} ⊂ Pr(G) | ¬∃x ∈ Sa(G) [⬦P(x) ∧ ⬦Q(x) ] }

여기에서 ⬦는 가능성을 의미하며, P(x)는 ‘상황 x에서 P를 발화한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P, Q} ∈ Sem(G)는 ‘P의 발화와 Q의 발화가 모두 가능한 상황은 없다’를 의미한다. 구체적인 사례로서, 다음과 같이 B, BB, R을 정의하자.

B: “파랗다”
BB: “새파랗다”
R: “붉다”

Pr(G) = {B, BB, R}, Sa(G) = {“사과를 가리킴”, “하늘을 가리킴”}이라면 Sem(G)는 다음과 같다.

{ {B, R}, {BB, R} }

분명히 해야 하는 사실이 세 가지 있다. 첫째, ⬦의 규범성은 자연주의적이며, 형이상학적이지 않다. ⬦P(x)의 의미는 단순히 상황 x에서 P를 발화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의미이고, ¬⬦P(x)의 의미는 단순히 상황 x에서 P를 발화하는 경우가 없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P, Q} ∈ Sem(G)의 의미는 P와 Q를 모두 발화하는 경우는 없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G가 오랜 과거부터 지속되어 왔다는 자연사적 사실에 기반한 기술적 진술이며, 양상 논리의 형이상학적 문제는 이 논의와 무관하다. 후술하겠지만, 필자는 오히려 ⬦의 의미를 상술한 바와 같이 재해석하였을 때 규범성의 진상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둘째, Sem(G)를 체득하는 것은 G를 숙지하기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다. Sem(G)만 체득한 화자는 ‘새파랗다’가 ‘파랗다’를 함의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G가 언어게임이라면 G는 Sem(G)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Sem(G)는 G에서 무절제한 발화 — ‘붉다’고 말할 상황에서 ‘파랗다’고 말하는 따위의 행위 — 가 일어나지 않도록 제약하는 최소한의 규정이기에 Sem(G)를 결여한 발화 행위는 언어게임이 아닌, 백색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 Sem(G)를 체득하는 것은 하나의 실천(PI, §202)이다. Sem(G)는 G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해, Pr(G)의 수많은 멱집합 중 어느 것이 올바른 Sem(G)인지 결정하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NRW의 8장에서는 “사람들이 규칙(Sem(G))에 대해서 일치를 본다 함은 규칙 따르기(G)에 있어서 일치를 본다는 것에 본질적으로 의존해 있다”(NRW, p. 277, 필자에 의한 괄호)라는 지적을 비롯하여 이 논의가 상세히 이루어져 있다.

사람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자연사적 사실로 주어져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은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언어게임에 참여하여 언어의 사용을 익힌다. 그리고 언어를 익히는 과정은 Sem(G)를 체득하는 과정을 내포하며, 이 과정은 ¬(⬦P ∧ ⬦Q)라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과 추론의 패턴”을 정착시킨다. 이제 이 패턴이 어떻게 “논리학의 기본 법칙들로 고착”되는지 알아보자.

먼저 ¬(⬦P ∧ ⬦Q)의 패턴은 술어 논리의 모든 명제를 구축하기에 충분하다. Φ(P, Q)를 ¬(⬦P ∧ ⬦Q)로 정의하고, ⬦P와 ⬦Q를 각각 A와 B로 두자. 그렇다면,

Φ(P, P) ≡ ¬A
Φ(Φ(P, P), Φ(Q, Q)) ≡ A ∨ B
Φ(Φ(P, Q), Φ(P, Q)) ≡ A ∧ B

이다. 따라서 상술한 생각과 추론의 기본적인 패턴은 논리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충분조건을 마련한다(Garver 1996).

또다른 예시로 양상 논리를 살펴보자. 필연성을 의미하는 기호 □를 도입하자. □¬P(x)는 ‘상황 x에서 P를 발화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의미이다. 다시 한번, 여기에서 규범성은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아닌 자연주의적 의미이다. □¬P(x)는 ‘상황 x에서 P를 발화하는 것은 언어게임의 참가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또는 이와 비슷한 의미로 해석될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한 가상의 시나리오로, G의 규칙을 모르는 철수가 G에 참여하기 위해 G의 참가자들이 나누는 발화를 지켜보고 있다고 하자. 오랜 관찰을 통해 철수는 P를 발화하기도 하고 Q를 발화하기도 하는 상황이 없다고 추측한다. 그럼에도 철수가 ⬦P(y)인 상황 y에서 Q를 발화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철수는 G의 참가자들이 당황스러워하는 것을 본다. 즉, 철수는 ¬⬦Q(y)로부터 □¬Q(y)를 본다. 이것은 다음의 양상 논리 규칙으로 고착된다.

¬⬦ ≡ □¬

즉, 가능성과 필연성이라는 두 양상 개념의 원천은, ‘언어게임에서 무의미한(가능하지 않은) 발화 행위를 하는 것은 언어게임 참가자들의 배척을 유발한다(해서는 안 된다)’라는 자연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자연사적 사실이 성립하는 근거는 “[의견에서의 일치 이전에] 무엇이 의미 있다, 무엇이 무의미하다 등과 같은 판단의 테두리에서의 일치가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NRW, p. 66)고 지적한 이승종 교수의 단상과 유관하다.

2. 모순론에 관한 보론

본 소론에서 필자는 톰슨의 역설을 통해 비트겐슈타인 모순론의 적용 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톰슨의 역설은 다음과 같다. 전원이 꺼져 있는 램프가 있다. 1/2분이 지나면 램프의 전원을 켠다. 1/4분이 더 지나면 램프의 전원을 다시 끈다. 1/8분이 더 지나면 다시 켜고, 이런 작업을 반복한다. 즉, t분 후 램프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1분이 흘렀을 때 램프의 전원은 켜져 있는가, 꺼져 있는가? 이 역설을 제시한 톰슨은 램프가 켜져 있을 수도, 꺼져 있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켜져 있을 수 없는 이유는 램프를 켜는 단계 이후 램프를 끄는 단계가 항상 있기 때문이고, 램프가 꺼져 있을 수 없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Thomson 1954).

이것은 분명 모순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모순론에 따르면 이것은 전혀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함수 f에 부합하는¹ 램프가 생활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톰슨의 역설은 우리와 무관하다. 그러나 함수 f에 부합하는 램프가 생활 세계에 존재한다면, 톰슨의 역설이 완전히 기술하지 못한, 혹은 부적절하게 기술한 램프의 ‘맥락’이 역설을 자연스럽게 해소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 관한 실례로서 Earman과 Norton이 고안한 아래의 램프를 보자(Earman & Norton, 1996). 구슬이 금속판에 부딪히면 회로가 연결되어 램프가 켜지고, 구슬은 이전 단계보다 조금 낮은 높이로 튕겨 오른다. 금속판의 탄성 계수를 적절하게 조절함으로써 아래 램프가 함수 f에 부합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1분 후 램프의 상태는 명확하다. 램프는 켜져 있다.

반대의 사례도 가능하다. 아래 램프의 경우, 구슬이 금속판에 부딪히면 회로가 접지되어 램프가 꺼진다. 이 역시 f에 부합하는 램프이지만, 1분 후 램프는 꺼져 있다.

이렇듯 생활 세계와 접맥되는 순간 톰슨의 역설은 자연스레 해소된다. 톰슨의 역설이 역설처럼 보이는 이유는 생활 세계와 유리된 공간에서 오로지 추상적인 논증과 논리 규칙만을 통해 역설을 해결하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유한 구간에서 발산하는 수열을 허용하는 해석학의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을 어떻게 회로에 적용할지가 부적절하게, 그리고 불충분하게 설정된 데 있다. 즉, “모순된 계산법…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계산법…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다(NRW, p. 318)”.

이것은 모순을 대하는 자연스러운 태도이자,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는 태도이다. 톰슨의 역설과 폭발 원리를 근거로 유니콘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신 톰슨의 역설을 마주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태도는 그로부터 무언가를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막다른 골목으로 여겨 그로부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NRW, p. 318)”.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는 톰슨 램프가 생활 세계와 접맥됨으로써 해소되는 문제임을 이해할 수 있다.

필자의 요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퍼트넘이 제시한 사례를 거론하겠다(Putnam 1967). 퍼트넘은 수학의 명제와 생활 세계의 사태가 다리 원리(Bridge Principle)들에 의해 매개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다음이 주어져 있다고 하자.

(1) 정확히 한 개의 사과가 있다. ( ∃x(Ax ∧ ∀y(Ay → x = y)) )
(2) 정확히 한 개의 바나나가 있다. ( ∃x(Bx ∧ ∀y(By → x = y)) )
(3) 사과이면서 바나나인 것은 없다. ( ¬∃x(Ax ∧ Bx) )

이로부터 사과이거나 바나나인 것의 개수를 추론하기 위해서 우리는 논리학의 추론 규칙을 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대신 우리는 다리 원리를 통해 훨씬 편하게 추론을 진행할 수 있다. 먼저 위의 세 사태를 아래의 세 수학적 명제로 변환하는 다리 원리를 도입한다.

(a) #x(Ax) = 1
(b) #x(Bx) = 1
(c) #x(Ax ∧ Bx) = 0

다리 원리를 건넘으로써 이제 우리는 수학의 영역으로 진입했다. 수학의 영역에서 우리는 명제 (AR)과 추론 규칙 (CA)을 사용할 수 있다.

(AR) 1 + 1 = 2
(CA) #x(Fx) = m, #x(Gx) = n, #x(Fx ∧ Gx) = 0 ⊢ #x(Fx ∨ Gx) = m + n

(a) ~ (c)에 (AR)과 함께 (CA)를 적용하면 다음을 얻는다.

(d) #x(Ax ∨ Bx) = 2

이제 다시 다리 원리를 건너 생활 세계의 영역으로 돌아오면 다음을 얻는다.

(4) 사과이거나 바나나인 것이 두 개 있다. ( ∃x∃y((A(x) ∨ B(x)) ∧ (A(y) ∨ B(y)) ∧ ¬(x = y) ∧ ∀z((A(x) ∨ B(y)) → (z = x) ∨ (z = y)) )

퍼트넘의 논증을 좇아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철학과 모순론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도표를 삽입하였다.

Gerrard(1991)가 지적했듯이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철학에서는 두 가지 논제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첫째, 수학의 명제는 경험에 의해 수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이승종 교수가 “캡슐화된 자율성”이라고 명명한 수학의 특징이며, 위의 도표에서 ‘캡슐 수학’이라는 이름으로 표시하였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 즉 자연사의 가장 기본적인 사실들이야말로 우리의 수학적 실행에 대한 해명에서 제시할 수 있는 최종 지평이다.

[수학이] 경험에 의존하는 까닭은 사정이 달라지면 당신은 이 계산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증명은 오직 그것이 경험에 유용한 결과를 주기 때문에 증명이라고 불린다. (LFM, p. 42)

두 논제는 “필연성은 우연성의 등에 업혀 있다(Tait, 2005)”는 표어로 합치한다. 이 표어에 의거하여 필연성을 주입받는 수학의 영역은 위의 도표에서 영역 A로 표시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의 모순론이 강조하는 점은 모순이 일어나는 영역이 영역 B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영역 B에서는 충분히 모순이 발생할 수 있다. 그것은 러셀의 역설과 같이 수학적 논증의 모델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간과한 허점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고, 바나흐-타르스키 역설이나 톰슨의 역설과 같이 영역 B와 생활 세계를 무리하게 연결하려는 시도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역 B는 생활 세계와 유리된 공간에서 구축된 체계이기 때문에 영역 B의 모순은 다리를 건설하는 등과 같은 수학적 실행과 무관하다. 모순 및 폭발 원리가 수학적 실행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역 A가 지니는 확실성의 원천이 영역 B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영역 A가 지니는 확실성은 자연사의 사실들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따라서 영역 A는 모순의 위협에서 철저히 벗어나 있다.

3. 수학의 국소적 필연성에 관한 비판

이승종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수학적 실행은 경계 안쪽에서 필연적 강제력을 지닌다. (중략) [그러나] 보편성이나 독점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NRW, p. 225)

그러나 필자는 NRW에 제시된 논증만으로는 수학의 국소적 필연성을 개진하기에 부족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수학의 국소적 필연성은 다양한 수학 체계를 일관된 방식으로 설명하는, 필자가 ‘메타수학의 보편적 필연성’이라고 부르는 현상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승종 교수가 직접 거론한 “디지털적 분절이 없는 아날로그적 액체 세계(NRW, p. 222)”를 예시로 논의해 보겠다. 이승종 교수가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는 액체 세계의 수학으로서 실수 이론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엄밀하게 진술하자면 액체 세계의 수학은 닫힌 실수체 이론 ⟨R, +, ·, 0, 1, <⟩일 것이다. 이 이론은 우리의 수학이라 부를 수 있는 페아노 산술 이론 ⟨N, 0, S⟩와 크게 다를 뿐 아니라, 타르스키-자이덴베르크 정리에 따르면 호환이 불가능하다. 실수체 이론은 결정가능한(decidable) 이론이지만, 페아노 산술 이론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승종 교수는 이를 근거로 다양한 수학 체계의 가능성과, 그러한 가능성이 시사하는 수학의 국소적 필연성을 역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 질문이 가능하다. 타르스키-자이덴베르크 정리는 어떤 수학 체계에 속하는 이론인가? 타르스키-자이덴베르크 정리는 실수체 이론에 관한 정리이지만, 이 정리는 우리의 세계, 즉 디지털적 분절의 세계에서도 증명할 수 있다. 말하자면, 타르스키-자이덴베르크 정리는 액체 세계와 디지털 세계 양쪽에서 보편적 지위를 인정 받는다. 이것은 메타수학적 진술이 가지는 특징이며, 수학의 필연성을 국소적인 영역에 국한하려는 모든 철학적 이론에 문제를 일으킨다. 이 문제는 프레게 또한 지적한 바 있다. 프레게가 형식주의 진영을 향해, 형식적 수학 게임에 속한 이론과는 달리 형식적 수학 게임에 관한 이론은 해당 게임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가능하지 않은지를 진술하는 의미 있는 이론이라고 비판하였다(Frege, 1953).

이렇듯 수학은 어느 하나의 캡슐 안에만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학문이 아니다. 수학은 다른 캡슐에 관해서도 의미 있는 진술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두 캡슐 사이에 다리를 놓기도 한다.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과 폰 노이만-베르나이스-괴델 집합론이 보존적 관계에 있다는 정리가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토록 강력하고 유동적인 메타수학의 필연성에 관한 적절한 설명이 없다면 이승종 교수와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의 국소적 필연성’ 이론은 수학자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이다.

각주

¹ ‘부합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램프의 작동 방식이 함수 f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2kg 상자와 3kg 상자를 같이 저울에 올렸을 때 5kg으로 측정되는 사태는 2 + 3 = 5에 부합하는 사태이지만, 각각의 상자가 정확히 2kg과 3kg이지는 않다. 따라서 어떤 사태가 수학적 명제에 ‘부합’하느냐의 기준은, 후술할 ‘다리 원리’에 의해 사태와 명제가 매개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참고문헌

Earman, John & Norton, John (1996). Infinite pains: the trouble with supertasks. In Adam Morton & Stephen P. Stich (eds.), Benacerraf and His Critics. Blackwell. pp. 11–271.

Frege, Gottlob (1950). The Foundations of Arithmetic: A Logico-Mathematical Enquiry Into the Concept of Number. New York, NY, USA: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93.

Garver, Newton (1996). Philosophy as grammar. In Hans D. Sluga & David G. Stern (eds.), The Cambridge Companion to Wittgenstein.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139–170.

Gerrard, Steve (1991). Wittgenstein's philosophies of mathematics. Synthese 87 (1):125-142.

Putnam, H. (1979). The thesis that mathematics is logic. In Mathematics, Matter and Method: Philosophical Papers (pp. 12-42).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Tait, William. (2005). The provenance of pure reason. Essays in the philosophy of mathematics and its history. pp. 116

Thomson, James (1954). Tasks and Supertasks. Analysis 1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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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를 쓰는 게 과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논문을 쓰셨네요ㅎ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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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부분은 조금 오해가 있는 게 아닌가 해요. 비트겐슈타인은 특정한 이론을 바탕으로 수학의 국소적 필연성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서요. 오히려 우리가 굳이 메타수학적 작업을 완성하기 이전에도 이미 수학을 잘 해나가고 있었다는 게 비트겐슈타인이 수리철학에서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힐베르트나, 프레게나, 러셀-화이트헤드나, 괴델 등의 메타수학적 작업을 굳이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수학을 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죠. 초등학생들의 덧셈, 뻴셈은 이미 그 자체로 잘 수행되고 있는 일종의 실천(practice)이고, 그 실천이 반드시 메타수학을 통해 정당화될 때에야 의미를 지니게 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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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댓글로 비판만 하나 제시한 것 같아 아쉬워서 더 추가합니다. 저는 이 글의 몇몇 부분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물론, 제가 수학적인 배경 지식이 충분하지는 못하긴 하지만, 그래도 인상적이었던 건,

(1)

사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게임을 이해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이런 식으로 정식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제가 비트겐슈타인을 해석하는 관점에서는, '언어 게임'이라는 용어 자체가 "우리는 언어에 대한 의미론적 조건을 제시할 수 없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기 때문에, '언어게임 G를 이해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말은 얼핏 형용모순처럼 들립니다. ('게임'이라는 것의 보편적 본질이나 조건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언어'라는 것의 보편적 본질이나 조건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언어게임'이라는 용어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려고 했던 거죠.) 그렇지만, 작성자님이

라고 쓰신 것처럼, 저런 정식화 자체를 일종의 '기술적 진술'이라고 본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도 언어게임에 대한 집합론적인 정식화를 충분히 허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2) 톰슨의 역설과 Earman과 Norton의 램프 사례는 재미있네요. 비트겐슈타인의 모순론을 설명하기 위한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3) 추가적으로, 이전 댓글에 대한 보충이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메타수학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메타수학에 철학적 함의를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메타수학은 수학자들의 작업으로 얼마든지 충분히 성립할 수 있지만, 문제는 이런 작업이 마치 '토대주의'라는 인식론의 기획을 옹호하는 것처럼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중요한 요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a) "메타수학이 가능하다.“라는 주장에서 (b) "메타수학이 없으면 모든 수학적 실천이 무너진다.”라는 주장으로 논리적 비약을 하지 말라는 게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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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앞부분에 관해서만 비판을 좀 달아보고자 합니다.

  1. Sem(G)를 아는 것이 언어게임 G를 이해하는 것의 필요조건이라는 주장.

우선 '체득'이라는 말은 상당히 모호하게 들립니다. 어쨌든 체득은 안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이니 일단 그렇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글쓴이의 주장에 따르면,

임의의 진술 P와 Q에 대해, 어떤 상황에서도 P와 Q가 동시에 발화된 적이 없었다면 오직 그러한 경우에 {P,Q}는 Sem{G}의 원소이다. 즉, 화자가 G를 이해한다면 그는 Pr(G)에 속한 P, Q에 대해 {P,Q}가 Sem(G)에 속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따라서 Sem(G)를 이해하는 것은 G가 언어게임을 이해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저는 유사한 대화상황을 옆에서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A: 오늘 숙제 있었니?
B: 아니.
A: 오, 그럼 숙제 없었나 보네?
B: 아니.

위 상황의 이름을 'v'라고 해보죠. 그렇다면 Pr(G)의 원소인 "숙제가 있었다"와 "숙제가 없었다"는 v에서 동시에 발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숙제가 있었다", "숙제가 없었다"}는 Sem(G)의 원소가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위 언어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화자는 첫 번째 화자와 말을 섞기 싫은 것이죠.
유사 사례는 Paul Grice가 제시한 것으로 유명한 다음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박사과정 추천서 항목 중 추천 학생의 학업 능력에 대해 적는 란에 추천자가 "이 학생은 글씨를 정말 잘 씁니다."라고 썼다면, 동문서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의미가 매우 분명합니다. 얘는 공부할 깜냥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이죠.
이 사례들은 작성자께서 말씀하신대로 "무절제한" 대화인가요? 아니면 두 번재 화자가 의미 없는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인가요? 또한 이러한 발화사례가 이전에 전혀 없었다 하여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발화를 이해한다. 물론 이해하고 못 이해하는 것 사이에 개인차는 있겠지만요. (눈치라는 능력은 참 재밌습니다) 그라이스 등의 영향을 받은 현대 화용론에서는 이를 설명할만한 나름의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 얘기가 맞다면 Sem(G)는 G를 이해하는데 분명 역할을 하긴 하겠지만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 만일 이 사례에 대해 상황이 충분히 구체적으로 기술되었다면 반론이 되지 않는다는 반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충분히 구체적으로 기술된 상황이라는 것은 Sem(G)를 결정하는 데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언어 현상으로부터 합리적 해석을 통해 구성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이게 맞는다면 제시해주신 모델링의 아이디어는 기존에 수행되었던 패턴을 기술하는 모델로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기존에 없었던 패턴의 대화를 우리가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설명은 다소 어려워 보입니다. (물론 이 부분까지는 작성자분의 관심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1. '◇'의 재해석에 관하여

⬦P(x)의 의미는 단순히 상황 x에서 P를 발화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의미이고, ¬⬦P(x)의 의미는 단순히 상황 x에서 P를 발화하는 경우가 없었다는 의미이다.

우선 '◇'를 포함하는 문장의 의미가 불분명해 보이는 게 있습니다. 표준적인 방식으로 이해하자면 이 연산자는 문장에 붙어 새로운 문장을 만듭니다.
그렇다면 '◇P'와 '◇Px' 모두 문법적으로 맞는 문장이죠.
그런데 만일 후자가 '상황 x에서 P를 발화하는 경우가 있었다'를 의미한다면 전자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제가 생각하기에 두 가지 옵션을 제시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산자 '◇'는 단지 상황들의 집합에 걸리는 양화사와 같은 기능을 하거나 시간 연산자로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즉, ◇Px <=> (∃x)Px로 보거나 '◇P'는 'P가 임의의 시간 t에 발화된 적이 있다'와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죠. 하지만 양화사로 보는 해석은 여전히 '◇P'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의 새로운 해석이라고 하기도 어렵지 않을까 싶네요.
시간연산자로 보는 해석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해석에서도 작성자 분께서 주장하는 양상 연산자의 규범적 의미는 직접 도출되지 않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만약에 이 같은 연산자 해석이 기존의 양상연산자 해석을 대체하려고 하는 시도라면, 표준양상논리의미론으로 설명하는 많은 문장들의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해야 하는데 저는 좀 회의적입니다. de re 문장이나 반사실적 조건문 등 양상 연산자를 형이상학적 혹은 적어도 인식론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어느정도 해명된 의미들이 아주 많다고 생각합니다.

  1. 가상의 상황과 양상 연산자의 규범적 의미에 관해

작성자 분의 양상연산자 해석에는 발화규범성에 대한 생각도 같이 포함된 것 같습니다. 요컨대 기존에 특정 발화가 특정 상황에서 발화되었는가와 해당 발화가 적절하게 발화될 수 있는가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그 사이를 매개하는 것이 언어를 통한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 고착되는 추론패턴이라고 주장하시는 듯합니다. 그리고 중간에 철수의 예시를 통해 이를 보여주려고 하는 듯합니다.
읽으면서 든 한 가지 의문은 '~Qy'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y에서 Q를 발화한 적이 없다'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양상연산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y에서 ~Q를 발화한다'이거나 'y에서 Q를 발화하지 않는다'일 것이고,
'□~Qy'의 의미는 '언제나 y에서 ~Q를 발화한다'이거나 '언제나 y에서 Q를 발화하지 않는다'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바, ~◇p와 □~p 사이에는 그런 애매성이 없습니다.
즉, 작성자분께서 제시한 방식의 추론 패턴으로부터 논리적 규칙이 고착화된다고 말하려면 이 애매성이 어떻게 제거되는지에 대한 설명도 필요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애매성이 제거되는 과정이 순전히 언어 패턴에 대한 관찰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저는 다소 회의적입니다.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다른 한 가지는 이 주장의 지위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경험적 사실에 관한 것인가요? '자연사적 사실'이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런 추론 패턴의 고착화가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실제로 논리적 추론에 관한 발달심리학적 연구도 있구요) 사실 그렇다면 이건 어느정도 철학이 아니라 언어학이나 심리학의 영역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언어현상에 대한 가설적 설명이라고 봐야 할까요?

질문이 길어졌네요. 괜히 다 끝난 페이퍼를 다시 보게 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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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읽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자세한 비판까지 달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연말에 여행을 다녀오느라 답글이 늦었네요. 먼저 Sem(G)에 대한 답변을 달겠습니다. 양상논리에 대한 부분은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답변드릴게요.

'체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Some Reflections on Language Games (Sellars, 1963)’의 서론에서 설명되었듯이, 언어게임의 참여자가 해당 게임의 규칙 준수를 배운다고 상정하면 무한퇴행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리포트 작성 당시 저는 이 논증을 알고 있었기에 '규칙을 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를 망설였으나, 리포트의 분량이 1500자 내외로 정해져 있었기에 ‘안다’보다 나은 표현을 도입해야 하는 근거 및 정당성을 충분히 거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체득'이라는 표현을 보충 설명 없이 사용했는데, 저에게도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무절제’라는 표현의 의도를 더 자세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술에서 규칙 따르기의 중요성을 분명히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발화와 의미 없는(nonsensical) 발화, 올바른 발화와 틀린 발화를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PI, p.222가 한 사례입니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그리고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안다"라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 (철학을 뒤덮고 있는 구름의 전부는 한 방울의 문법으로 응축된다.)

따라서 '무절제’라는 표현으로 제가 의도한 바는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옳다' 또는 '틀리다'를 따질 수조차 없는 발화들입니다. 물론 그라이스의 관점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안다"는 완전히 ‘올바른’ 발화일 수 있습니다. 작전 상황에서 불안해하는 병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장교가 이런 발화를 할 수 있겠죠.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차원에서 발화의 올바름 여부를 따지고 있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사는 원시적 의미 작용(primitive meaning act)의 근거를 추적하는 것입니다. 일련의 가설들(그림 이론, 심리적 이론 등)을 검토한 끝에 그는, 인간의 자연사와 관습에서 기원하는 발화 행위의 규칙성이야말로 의미를 해명하는 최종 지평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오직 한 사람이 하나의 규칙을 따른 경우가 오직 한 번만 있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보고가 이루어진 경우, 명령이 부여되거나 이해된 경우 등이 오직 한 번만 있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 규칙을 따른다, 보고를 한다, 명령을 내린다, 체스 게임을 한다는 것은 관습들(용법들, 제도들)이다. (PI, §199)

PI, §199를 보면 라쿤님의 주장과는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기존에 없었던 패턴의 대화"는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이에 따르면 상황 v가 성립할 수 있는 이유는 '대화에 참여하기 싫어하는 상대와의 대화는 상황 v와 유사하게 흘러간다'는 규칙성이 오래 전부터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제가 해석한)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모든 언어게임에는 의미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규칙이 있습니다. 그 규칙을 정확히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Sem(G)를 거론함으로써 저는 그런 규칙이 어떻게 생겼을 법할지 추측해 보고, 나아가 어떻게 그러한 규칙성이 기초적인 논리학의 틀이나 양상적 개념을 형성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고자 했습니다. (유사한 시도가 Garver 1996, p.144-145에 있습니다)

물론 라쿤님이 상황 v를 통해 지적하셨듯이 제가 제시한 Sem(G)는 '의미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규칙’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논리철학논고의 ‘대상(object)’이 무엇인지 아무도 명확히 제시할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논리철학논고에 제시된 논증에 따르면 대상이 반드시 존재하듯이, 철학적 탐구에 제시된 논증에 따르면 Sem(G)는 반드시 존재합니다. 물론 철학적 탐구에 제시된 논증이 틀렸거나, 비트겐슈타인의 의미론에 대한 저의 해석이 틀렸다면, 저의 주장 또한 공허참이 될 것입니다.

제가 아직 그라이스의 이론을 자세히 읽어보지 못한 탓에 그라이스와 비트겐슈타인의 접점이 어떠한 양상을 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을 일단 밝혀 보자면, 결국 논점은 의미의 형성 과정에 있어 규칙의 정초가 필수적이냐의 여부에 있는 듯합니다. 혹시 제 답변이 부족했거나, 제가 라쿤님의 비판을 잘못 이해했다면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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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이 리포트를 쓰면서 윤유석 님의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했는데, 흥미롭게 읽으셨다니 기쁘네요 ㅎㅎ

윤유석 님은 제가 '수학을 정당화하는 데 메타수학이 필수적이지는 않다'라는 주장을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의 의도는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읽힐 여지가 분명 있었지만요. 저는 한 수학 체계가 필연성을 누리는 영역은 국소적일 수밖에 없다는 이승종 교수님의 주장에 회의적이었습니다(비트겐슈타인도 이렇게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즉, 저는 수학의 인식론적 정당성보다 상이한 수학 체계가 누리는 필연성의 위계에 주목했습니다. 수학 체계가 필연성을 인정받는 영역은 이론의 발전에 힘입어 전역적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제가 '수학의 국소적 필연성'이라는 주장을 비판적으로 바라 본 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에서 이승종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강조된 부분은 제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대목입니다)

가시세계에서 필연성을 행사하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표준논리학은 거시세계에서나 미시세계에서는 그 장악력을 상실하여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나 양자논리학과 같은 대안들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유클리드 기하학이나 표준논리학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보편적이라는 믿음은 수정된다. 즉 그것들은 제한된 영역 안에서 그리고 자기 체계 안에서는 여전히 필연적으로 작동하지만, 그 너머에서는 더 이상 대안적 체계를 불허하는 독점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p.223)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 '삶의 형식과 자연사 1'의 원 안에 '수학 1'뿐 아니라 '수학 2', '수학 3' ... 등의 원들을 그려 넣을 수 있다. [...] 수학이라는 원은 내적으로는 자율성을 갖는 캡슐에 견줄 수 있다. 그 자율성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 강제력에 의해 통제되는 자율성이다. 그것은 삶의 형식과 자연사를 수학이라는 캡슐 외부에 가하는 외적 강제력과는 캡슐이라는 경계로 구별해야 하는 좁은 의미의 강제력이기도 하다. 캡슐 내부의 관점에서는 다른 캡슐들은 이해나 양립 혹은 호환이 불가능하겠지만, 캡슐 밖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규칙에 의해 작동되는 다른 수학들이 저마다 캡슐화된 필연성을 실행하고 있을 뿐이다.

위의 구절은 이승종 교수님이 수학의 변화 과정을 도약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못을 박을 때에는 망치가 필요하고 나무를 자를 때에는 도끼가 필요하듯이, 영역 A에서는 수학 A가 필요하고 영역 B에서는 수학 B가 필요하며, 수학 A와 B는 망치와 도끼만큼이나 단절된 두 이론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토마스 쿤의 관점과 매우 유사합니다. 패러다임 이론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날 때 구 과학 이론과 신 과학 이론 사이에 단절이 일어난다. 둘째, 구 이론과 신 이론은 서로의 언어로 번역될 수 없다. 제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이승종 교수님은 동일한 주장을 수학의 변화 과정에 적용합니다. 유일한 차이점은, 패러다임 전환의 계기가 비정합적인 관측 결과의 축적이 아닌 인류학의 동적 변화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근거는 자연과학의 확실성이 실험적 관측에서 연원하듯이, 수학의 필연성은 "인류학적 강제력"에서 연원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제가 수학을 공부하면서 느낀 바는, 수학의 변화 과정은 자연과학의 변화 과정과는 달리 도약적이지 않으며, 보편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올바르다는 것입니다. 이승종 교수님이 직접 거론한 유클리드 기하학과 쌍곡기하학의 예시를 살펴 보겠습니다. 국소적으로 보았을 때 두 기하학은 양립 불가능합니다. 일례로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삼각형 세 내각의 합은 180도인데, 쌍곡기하학에서는 항상 180도보다 작으니까요. 그러나 두 기하학을 통일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양체 이론을 사용하면 되는데, 그러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Screenshot 2023-01-03 at 3.02.40 PM

유클리드 기하학은 ∫K = 0인 경우이고, 쌍곡기하학은 ∫K < 0인 경우입니다. 즉, "[유클리드 기하학이] 보편적이라는 믿음이 수정"되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닙니다. 이제는 새로운 이론(다양체 이론)이 보편성의 지위를 획득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론이 누리는 보편성의 영역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누렸던 보편성의 영역보다 훨씬 넓습니다. 이와 같이, 수학의 발전사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이론 체계들이 메타이론적 고찰을 통해 통일되는 과정으로 가득합니다. 특히 현대 수학의 주요 업적인 랑랜드 프로그램은 많은 수학자들이 현존하는 수학 체계를 모두 통일하는 이론의 존재를 믿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저는 이승종 교수님의 '국소적 필연성' 논제가 현 수학 연구의 동향과 벗어나 있을 뿐 아니라, 상이한 수학 체계의 통일화를 이끌어 냄으로써 더 깊은 수학적 통찰을 얻기를 처음부터 포기하는 태도라고 비판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제가 이승종 교수님의 논제를 잘못 이해했거나, 너무 현업 수학자의 태도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그런 것이라면 다시 한 번 지적 부탁드리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이승종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자연사 자체가 변화하는 경우도 거론합니다.

즉 '삶의 형식과 자연사 1'이 '삶의 형식과 자연사 A'로 변화한다면, 이러한 변모는 '수학 1', '수학 2', '수학 3' ... 등과는 구별되는 '수학 A', '수학 B', '수학 C' ... 등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충분조건이 된다. 이 충분조건 역시 외적 강제력에 해당한다. (p. 222)

이 논제는 정당성 여부를 따지기가 매우 까다롭습니다. 우리는 수학에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외계인의 수학이 어떻게 생겼을지 우리로서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연수 이론과 실수체 이론 사이에 메타수학적 '다리'를 놓을 수 있듯이, 아무리 우리와 다른 수학 체계가 있다고 한들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부를 만큼, 서로 간에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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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수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많지 않다 보니, (더군다나, 저는 비트겐슈타인의 수리철학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알지는 못하다 보니,) 적극적으로 의견을 펼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는 것, 그리고 이승종 교수님도 이전에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해석을 수업에서 다루시면서 강조하신 것 중 하나는, 수학자들의 작업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메타이론적 고찰을 통해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체계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서 수학 체계의 통일성애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현업 수학자들의 작업이라면, 비트겐슈타인이나 이승종 교수님이 이 작업 자체를 비판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철학자로서 비트겐슈타인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런 작업들의 철학적 의의에 대한 '해석'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와 괴델의 플라톤주의적이고 유신론적인 철학관이 반드시 필연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비트겐슈타인도 수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메타적 작업에서 너무나 손쉽게 철학적 주장들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경향에 반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순율이 지켜져야 하는 것은 실재의 형이상학적 구조 때문이다."처럼, 논리학이나 수학의 필연성을 형이상학의 필연성으로 확대해석하려는 경향 말입니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 219-220쪽에서 수학을 '캡슐'로 비유하는 내용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 비유가 캡슐과 캡슐 사이의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을 필연적인 것으로 강조하기 위해 제시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패러다임'이라는 쿤의 비유나 '캡슐'이라는 이승종 교수님의 비유는, 지적하신 것처럼, 자칫 통약불가능성의 혐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사용되어야 하는 비유이긴 합니다. 저는 이런 비유를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1) 실천은 '캡슐'에서 시작된다.

적어도, 우리가 일종의 캡슐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가령, 수학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은 아주 제한된 실천 속에서 1, 2, 3 같은 수들과 덧셈, 뺄셈, 곱셈 같은 연산들을 숙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어느 누구도 페아노 공리계부터 시작해서 수를 배울 수는 없죠. 전문 수학자들조차 역사적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이나 쌍곡기하학 같은 각각의 캡슐화된 기하학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캡술'이나 '패러다임'이라는 비유는,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가 처해 있는 실천적 출발점을 묘사하기 위해 주로 도입되는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2) 보편성은 '사후적으로' 발명된다.

물론, 아주 기본적인 숫자와 사칙연산을 익히던 아이가 나중에는 수학자가 되어 페아노 공리계를 통해 자신이 알던 내용을 보편화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하신 것처럼, 유클리드 기하학과 쌍곡기하학을 다양체 이론으로 통일시키는 방식이 발견되기도 하죠.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캡슐'로부터 시작해서 '다리 놓기'가 사후적으로 진행된 결과입니다. 처음부터 각각의 캡슐들을 해명하는 보편성이 먼저 존재한 것이 아니라, 캡슐과 캡슐을 연결하는 다리가 사후에 '건설'된 거죠. 제가 주로 공부한 가다머의 해석학에서는 이런 과정을 '지평 융합'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합니다. '캡슐'이나 '패러다임'은 단절을 함의하는 용어로 오해되기 쉽기 때문에, 가다머는 '지평'과 '지평 융합'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서로 다른 두 이론, 체계, 관점 사이의 대화가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곤 합니다. 물론, 그 대화는 사후적인 '융합'의 결과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처음부터 존재한 형이상학적 보편성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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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저는 비트겐슈타인의 글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전무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글을 바탕으로 어떤 것을 의도하셨는지 비교적 선명하게 보이는 것을 보면, 작성자께서 상당히 세심하게 글을 써주신 것 같다고 느낍니다.

  1. PI p.222의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네요. 왜 그게 틀린 말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ㅎㅎ.. 뭐 제 입장에선 그런 게 한두 개가 아니긴 했습니다만!

  2. 원시적 의미작용의 추적이라는 테마는 흥미롭네요. 비록 제 입장은 잘 모르기 때문에 유보적이지만, 기본적인 방향성에 대해선 우호적입니다. David Lewis의 박사논문인 Convention이 비슷한 접근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읽어보려다 실패하긴 했는데 내용은 대략 아주 단순한 Cooperative action을 분석하는 프레임으로 어떻게 의미가 형성될 수 있는지를 다룬 연구로 알고 있습니다.

  3. 의미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규칙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마 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마도 불일치가 일어나는 지점은 다른 동기들이 아니라 언어 활동의 전사(前史)를 통해 구성되는 Sem(G)가 언어이해의 필요조건인가인 것으로 보이네요. 제가 갖고 있는 생각은 대략 발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합리성의 틀 안에서 발화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조건이라는 것입니다. Gricean Program이라고 하는 흐름에 편승하는 입장이죠.('편승'이라고 쓴 이유는 이 입장에 대해 제가 딱히 숙고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맞는 얘기라고 생각했고, 언어철학이 주전공은 아닌지라 ㅎㅎ)

p.s.
아래 논의에서

수학적 체계가 필연성을 인정받는 영역은 이론의 발전에 힘입어 전역적으로 확장될 수 있다

라고 쓰신 부분에서 생각나는 논문이 하나 있어서 메모 남깁니다.
Timothy Williamson이 쓴 "Alternative Logics and Applied Mathematics"라는 논문의 2절을 보시면 아마 비슷한 아이디어를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윌리엄슨은 콰인의 주장대로 논리학이 어떤 경우에도 바뀔 수 없는 예외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논리체계가 defensible하다고 보는 입장이고 그와 독립적으로 논리학이 형이상학적인 함축도 갖는다고 주장하는 입장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번 참고해보시면 좋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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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감사합니다! 윤유석 님이 텍스트를 이해하신 방식이 저와 다소 달랐네요. 저는 이승종 교수님이 수학의 이론적 특징에 관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윤유석 님은 수학의 실천적 특징에 관한 주장으로 받아들이셨군요. 책의 전체적인 맥락이나, 앞서 거론하신 수학을 향한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를 고려하면 윤유석 님의 해석이 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저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없도록 이승종 교수님이 표현을 더 적확히 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요). 그리고 그 해석이 주장하는 바에 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많은 수학자가 다양한 '캡슐'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한 수학 체계들을 — 사후적으로나마 — 하나의 체계로 통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형이상학적 함의를 끌어내기 충분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네요. (저도 그렇고요)

가다머의 해석학을 언급하신 점 또한 흥미로웠습니다. 이전에 윤유석 님이 비트겐슈타인에 관해 쓴 글을 봤는데, 그때도 해석학과 연관 지어 논지를 펼치셨더라고요. 제가 해석학에 관해 아는 바가 전무한 탓에 심도 있는 대화를 하지 못하는 점이 아쉽습니다. 철학적 역량을 꾸준히 쌓다 보면 언젠가는 저에게도 철학의 각종 분야를 잇는 통찰력이 생기기를 기대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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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dimen 님의 글과 이승종 선생님의 견해에 대한 저의 생각을 간략히 적어보려 합니다.

(1) 위에서 다른 분들께서 이미 좋은 말씀들을 해주셔서 저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우선, “논리학의 자연화에 관한 보론”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물리적, 생물학적 환경 등 사람의 자연사의 사실들은 사람의 인류학적 삶의 형식과 함께 그의 생각과 추론의 패턴을 조건 짓는다. 그리고 이 패턴은 논리학과 수학의 기본 법칙들로 고착된다. (NRW, p. 215)

여기서 ‘자연사의 사실들’에 의해 조건 지워진 ‘생각과 추론의 패턴’이 ‘논리학과 수학의 기본 법칙들로 고착된다’는 이승종의 주장은 다음 1 또는 2 중 하나로 해석/연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우리 인간과 다른 자연사의 사실들에 의해 조건 지워진 (외계인의) 문명에서는 현재 우리의 것과는 다른 생각과 추론의 패턴이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이들의 논리학과 수학의 기본 법칙들은 우리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상호 통약불가능한 것일 수 있다.

  2. 인간과 다른 자연사의 사실들에 의해 조건 지워진 다른 문명이 존재할 수 있고, 이들이 우리의 것과는 다르게 보이는 논리학과 수학의 기본 법칙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치더라도, 그들의 논리학과 수학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그것들과 통약가능한 것일 것이다.

우리가 1과 2중에서 어느 것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논리학과 수학의 본질에 관하여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될 것 같네요.

1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주장하겠지요 – ‘현재 우리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수학은 분명 가능하다. 수학은 근원적으로 증명하지 않고 사용하는 공리들(axioms)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완전히 다른 공리들을 사용하는 문명이 존재한다면 그들의 수학은 우리의 그것과 아주 다른 것이 될 것이다.’

2를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그렇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다른 공리들을 제시해보라. 그리고 어떻게 완전히 다른 수학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도록 하라. 당신들이 몇몇 분야에서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수학의 모든 부분에 대해 당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현실에 존재하는 형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위상수학 내지는 기하학에서까지 완전히 다른 수학이 가능할까?’라고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는 이러한 흥미로운 문제가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네요.

(2) “모순론에 관한 보론”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철학에서는 두 가지 논제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첫째, 수학의 명제는 경험에 의해 수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이승종 교수가 “캡슐화된 자율성”이라고 명명한 수학의 특징이며, 위의 도표에서 ‘캡슐 수학’이라는 이름으로 표시하였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 즉 자연사의 가장 기본적인 사실들이야말로 우리의 수학적 실행에 대한 해명에서 제시할 수 있는 최종 지평이다.

  1. 여기서 ‘캡슐 수학’이라는 것을 상정하는 것은 수학의 분야 간에 어떤 근원적 단절성이 있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표현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dimen 님께서도 ‘캡슐 수학’이라는 것에 대한 비판적 주장을 뒤에 가서 해 주셨죠.

  2. 그리고 자연사의 사실들 중 ‘가장 기본적인 사실들’은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고, 그 인정 범위에 대한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즉, 기본적인 사실의 범위를 우리의 일상적 생활세계에 한정해야만 하는지, 혹은 훨씬 미시적인 영역까지도 우리의 현실로 볼 수는 없는지 말이죠. 또, 우리가 최종 지평으로서 제시할 수 있는 자연사의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 수학적 실행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도 조금 의문이 들었습니다.

(3) “수학의 국소적 필연성에 관한 비판”에서 ‘메타수학의 보편적 필연성’이라는 현상을 언급하신 것이 인상적입니다. 여기서 위에 제가 (1)에서 제시한 다음과 같은 주장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메타수학적으로 보편적 필연성이 성립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논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 인간과 다른 자연사의 사실들에 의해 조건 지워진 (외계인의) 문명에서는 현재 우리의 것과는 다른 생각과 추론의 패턴이 존재할 수 있고, 따라서 이들의 논리학과 수학의 기본 법칙들은 우리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상호 통약불가능한 것일 수 있다.

깊은 사유가 담긴 좋은 글 감사했습니다. 다비트 힐베르트가 남긴 말처럼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언젠가는 알게 될 때가 올 거라 믿습니다.

"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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