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예시로 드는 행위

평소에 철학 논문이나 책(특히 소위 '거장'들의 것)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인데,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근거로써 문학 작품의 내용을 예시로 드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다고 보시나요? 그냥 일반적인 에세이를 쓰거나 개인적인 쪽글을 쓰는 것은 논외로 하고, 학계의 피어 리뷰 대상이 되는 논문들이나 학술서의 경우에 더욱 궁금합니다. 특별히 누구의 논문이나 책을 대상으로 하는 질문은 아니니 부담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이 질문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그것은 들뢰즈가 프루스트를 분석하는 것과 하이데거가 횔덜린을 분석하는 것에서 그 궁금증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문학 작품은 주로 허구의 이야기다 보니 실제 사례에 적용해야 하는 윤리학의 분야에서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작은 우려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이 철저히 윤리학에 대해서 문학을 분석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문학 작품을 예시로써 분석하여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는 것이, '현실이 아니므로 적절치 않다'는 게 아닌 이상, 저는 개인적으로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조건에서는 한편으로 굉장히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서 이 질문을 드립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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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철학 논문이나 책 속에 등장하는 문학작품은 논증을 뒷받침하는 근거보다는 예시로서 유용하다고 봅니다. 예컨대 들뢰즈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마들렌 체험 같은 걸 이야기하는 이유도, 결국 '차이 자체'와 '공명', '기호의 폭력을 통한 사유의 발생' 같은 모델이 마들렌 체험에서 잘 나타난다는 걸 보이고 싶어서이니까요. 설득력의 측면은 잘 모르겠지만 설명력의 측면에서는 하나의 유용한 전략이라고 봅니다. 다만 예라는 게 그렇듯이, 너무 난해하면 안 드니만 못한 예시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죠.

개인적으로는 문학에 큰 관심이 없고 문학적 소양도 없어서 글을 쓸 때 문학 작품을 예시로 들지는 않지만, 종종 이론적 설명에 기가 막히게 들어맞으면서 난해한 이론을 단순명쾌하게 만들어버리는 문학적 예시들은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도르노는 『도덕철학의 문제』 16강에서 칸트 도덕철학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예시하기 위해 『야생 오리』라는 작품을 가져오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원문의 인용이 너무 길어서 예전에 요약했던 요약문의 일부를 가져와 공유합니다.)

칸트는 일반인의 도덕 의식이 무엇이 옳은지 잘 판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듯하지만, 도덕적인 것은 사실 그리 자명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그 순수성을 통해 악으로 전도될 수도 있다. 도덕법칙의 충실하고 순수한 대변자가 객관적 현실의 짜임관계 속에서 어떻게 악으로 전도되는가를 입센(Henrik Ibsen)의 『야생 오리』는 탁월하게 서술하고 있다. 순수한 도덕을 대변하는 인물인 그레거스 베를레는 친한 친구인 얄마르 엑달의 아내 지나가 베를레의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한 채 엑달과 결혼했다는 비밀을 알고 있다. 엑달은 그레거스 베를레의 아버지가 (불법적인 사업의) 동업자였던 자신의 아버지를 감옥에 버려둔 채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고 자신의 아내마저 임신시켰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 아이를 키우며 단란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아간다. 베를레는 자신의 순수한 도덕적 양심에 따라 엑달에게 진실을 모두 밝히고, 엑달은 자신의 가짜 딸에 대한 믿음과 애착을 잃게 된다. 엑달은 그의 딸과 갈등하게 되고 결국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잃은 딸은 자살한다. 『야생 오리』는 이처럼 순수한 추상적 도덕 의식에 따른 행위가 한 가정의 행복을 파괴하는 과정을 보임으로써, 순수한 도덕적 양심에 따른 시도가 어떻게 부도덕한 결과를 낳는지를 그려보인다.

부정과 비판 : 네이버 블로그

제 생각에도 문학작품이 실제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두 갈래로 나뉜 철로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나 철학적 좀비나 흑백 방에서 자라온 메리가 실제 있는지 없는지 중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철학 논문에서 중요한 건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고, 예시들은 그런 구상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서사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유용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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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TheNewHegel 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특히 윤리학 쪽의 논문을 보면 문학 작품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철학자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의 패러다임 케이스로서 제시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고, 아니면 작품 속에서 묘사된 캐릭터의 행위나 발언으로부터 중요한 통찰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특히 윤리학에서는 그냥 만든 가상의 상황보다 작품의 한 장면을 들고와서 예시로 보여주는 게 더 설득력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소설을 그렇게 많이 읽진 않아서 그런 논문을 읽을 때마다 상당히 고통스럽기도 하고 저 스스로도 논문쓸 때 활용할 수 있는 소스들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합니다. 언젠가 젊은 세대가 학계에서 기성세대가 되면 그 때는 논문에서 애니메이션이나 웹툰, 드라마도 자유롭게 끌어다 쓸 수도 있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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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예시를 담은 설명과 의견 감사드립니다! "부정과 비판"에서 사용된 예시가 정말 저도 한 번에 와닿는 것을 보니 잘 분석된 예시는 그 설명력 하나는 기가막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위와 같은 선생님의 말씀에 정말 깊이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논증을 뒷받침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이 가능하다는 것을 예시로써 보이는 것...

저 또한 문학적 소양이 깊지 못한데, 선생님이 예시로 보여주신 내용을 읽고 나니 문학 작품도 다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시 한번 친절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이러한 의견에 정말 공감합니다.. "만약 ~하다면"으로 시작하는 가상의 상황보다도 누군가가 치밀하게 짜 놓은 세계관 속의 상황에 더 공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편,

저도 항상 이런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비록 저는 아직 논문을 쓰는 위치는 아니지만, 가끔 제가 예시를 들어 풍부하게 설명하고 싶은데도 사용할 수 있는 소스가 제한적이라 못다한 말들이 너무 아쉽게 느껴질 때가 많아서요. 이번 겨울엔 많이 읽고 또 적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상상도 정말 멋진 것 같습니다... 특히 음성을 통해 전해들을 수 있는 매체의 경우엔 텍스트로만 전달되기 어려운 뉘앙스까지도 추측할 수 있는 근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예시 소스가 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친절한 답변과 의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