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에포크 시대에 유럽에는 성선설이 만연했다?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의 프롤로그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지적 우상도 있는데, 흔히 이를 '이데올로기'라 한다. 에컨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유럽 지식층은 루소의 성선설을 철석같이 믿었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는데,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교육과 사회화가 부실한 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환상은 2차세계대전을 거치며 산산이 부서졌다.
-『내가 만든 신』, 팀 켈러 저, 윤종석 역, p.25.

이 책에서 미주를 실어주긴 했는데 해당 문단의 미주가 없어서 질문이 생겼습니다. 루소의 성선설에 대한 간략한 내용과 동양의 성선설과 무엇이 달랐는지, 또 위에서 언급한 글처럼 실제로 그 시대에 루소의 성선설이 통용되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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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이 저자 홈페이지에 무료로 올라와 있으니 확인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링크)

There can also be intellectual idols, often called ideologies. For example, European intellectuals in the lat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became largely convinced of Rousseau’s view of the innate goodness of human nature, that all of our social problems were the result of poor education and socialization. World War II shattered this illusion.

일단 한가지 저어되는 지점으로는 "became largely convinced of"가 "철석같이 믿었다"로 번역된다는 부분이 있네요. 치명적인 문제는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만 ...

그리고 본서는 찾아보니까 개신교 목사님께서 쓰신 신학서네요.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칸트의 근본악 논제와 관련된 몇몇 논점들이 궁금해지긴 합니다만, 더 잘 아시는 분들이 여기에 많이 계실테니 말을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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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설명은 사실 17-20세기 사이 유럽의 사상사적 흐름에 대한 일종의 '신화'죠. 그러니까, (a) 계몽주의 이후로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에 대한 신뢰가 유럽에 널리 퍼졌다가, (b) 20세기 초반에 두 차례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그 신뢰가 철저하게 무너져서, (c)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사조가 도래했다는 식의 이야기들 말이에요. 주로 그리스도교에서 저런 설명을 많이 차용해요. 팀 켈러 목사님만 저런 설명을 하시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 입문서들을 보면 유사한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하죠.

저는 솔직히 이런 이야기들이 지나친 단순화라고 생각해요. 물론, 일정 부분 일리 있는 설명도 있지만, 사실 그리스도교 신학의 '죄' 개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상 속의 근대철학을 허수아비로 세워두고 비판하는 걸로 보여요. 가령, '성선설'이나 '인간 본성의 선천적 선함(innate goodness of human nature)'을 정말 근대철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신뢰했을까요? 사회계약론을 주장한 홉스, 로크, 루소를 떠올려 보면, 저런 도식에 걸맞는 인물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해석하더라도) 루소 하나밖에 없죠.

심지어, 루소조차도 "인간은 선하다." 같은 본성에 대한 명제를 직접 내세웠다고 보기는 조금 어려워요. 사회계약론자들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적 조건으로부터 정치공동체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논의한 거라서요. 마치 인간 개인의 이기적 행동이 결과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해 모든 사람의 이익이 된다고 강조한 애덤 스미스처럼요. 사회계약론자들도 자연상태에서 인간 각자의 욕망, 감정, 이해관계에 근거한 행동이 어떻게 전체 정치공동체에 기여하게 되는지를 논의한 거죠. 루소의 강조점도 "자연상태의 인간은 여러 주어진 상황으로 인해 결국 협력하게 된다."라는 데 있는 것이지, "인간 개인에게는 선한 본성이 있다."에 있지는 않아요.

더 나아가, 인간에게 '근본악'이 있다고 주장한 칸트라든가, 인간의 동물적 욕망을 강조한 쇼펜하우어라든가, '인간'이란 극복되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비판한 니체라든가, 20세기 이전에도 인간의 본성을 낙관적으로 생각하지만은 않은 굉장히 다양하고 영향력 있는 입장들이 있어요. 그래서 저로서는 칼로 무를 자릇듯이 "근대는 인간에 대해 낙관적이었고, 현대는 인간에 대해 비관적이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그다지 적절하지는 않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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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기 되게 많이 듣고 살아왔는데

이렇게 생각해보니 또 단정지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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