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의 정신현상학 서문 질문이 있습니다!

후 강의들과 함께 머리 쥐어뜯으며 스스로 읽어보다가(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서) 도저히 안될 것 같아서 질문드립니다ㅠ 너무 어렵네요.. 정신현상학 서문을 읽고 있는데 혹시 이 부분 좀 풀어서 설명해주실 분 계실까요 ㅠ (새로나온 김준수 선생님 번역본 기준 p 59~60)

"지금까지 말한 것을 정식으로 표현하면, 주어와 술어의 구별을 내포하고 있는 판단이나 명제 일반의 본성은 사변적 명제에 의해 파괴되며, 첫 번째 명제(주어와 술어의 구별을 내포한 명제)가 결국 그리로 환원 되는(주어와 술어의) 동일 명제는 주-술 관계로의 반발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ㅡ 이러한 명제의 형식 일반과 이 형식을 파괴하는 개념의 통일성 사이의 갈등은 리듬에서 박자와 셈여림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과 유사하다. 리듬은 박자와 셈여림 사이의 유동하는 중심과 통합에서 생겨나는 결과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철학적 명제에서도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은 명제의 형식이 표현하는 그 양자의 구별을 무화시켜서는 안되고 그 둘의 통일이 화음으로 산출되어야 한다. 명제라는 형식은 규정된 의미의 현상 또는 자신의 충만한 내용을 구별 짓는 셈여림이다. 반면에 술어가 실체를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주어 자체가 보편적인 것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그러한 셈여림의 울림이 사라지는 통일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신은 존재이다.' 라는 명제에서 술어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 명제에서 술어인 '존재;는 주어가 녹아 없어지게 되는 실체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존재'는 단지 술어가 아니라 본질이라고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신'은 문장에서의 위치에 의해 그러한 바의 것, 즉 고정된 주어이기를 멈추게 된다. ㅡ 사유는 주어에서 술어로 이행하면서 전진하는 대신에 오히려 주어가 소실되기 때문에 저지당했다고 느끼고, 주어가 사라지게 된 것을 아쉬워하기 때문에 주어에 대한 사고로 되던져진다. 또는 술어 자체가 오히려 주어로, 즉 존재로, 다시 말해 주어의 본성을 남김없이 길어내는 본질로 언명되었으므로, 사유는 주어를 곧바로 술어 속에서도 발견한다. 그리하여 이제 사유는 술어 속에서 자신 안으로 돌아와 사리를 따지는 요설이라는 자유로운 지위를 획득하는 대신에 내용 속으로 더 침잠하게 되거나 또는 적어도 내용 속에 침잠해 있어야 한다는 요청이 엄존한다. ㅡ 또한 '현실적은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라고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주어인 '현실적인 것'은 자신의 술어 속에서 소멸된다. 이때 '보편적인 것'은 단지 술어의 의미를 지녀서 이 명제가 '현실적인 것은 보편적이다'라는 것만을 언표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보편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의 본질을 표현해야 한다. ㅡ 따라서 사유는 주어에서 지니고 있던 자신의 확고한 대상적 지반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또한 술어 속에서 대상적 지반으로 되던져지고, 술어 속에서 자신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의 주어로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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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이 굉장히 긴데, 그 중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어떻게 이해가 안 된다는 건가요? 그걸 정확히 이야기해주셔야 제대로 답변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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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김준수 선생님 번역본이 나온지 얼마 되지않아서 혹시 모를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전체 문단을 적고 다시 질문을 아래 적었는데 아래 부분이 짤린 것 같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이 문단 첫 부분
"지금까지 말한 것을 정식으로 표현하면, 주어와 술어의 구별을 내포하고 있는 판단이나 명제 일반의 본성은 사변적 명제에 의해 파괴되며, 첫 번째 명제(주어와 술어의 구별을 내포한 명제)가 결국 그리로 환원 되는(주어와 술어의) 동일 명제는 주-술 관계로의 반발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해서 헤겔이 아래 예로 든 신은 존재이다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건지(혹은 위 문단을 왜 이런식의 예로 설명했는지) 궁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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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다른 헤겔 전공자분들도 많은데, 제가 답변을 드리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

(1) 일단, 설명의 편의를 위해 아주 과감하고 도식적인 단순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헤겔의 철학에서는

(a) 현상계와 예지계의 통일
(b) 지성과 감성의 통일
(c) 술어와 주어의 통일

이 서로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즉, '현상계'와 '예지계'라는 두 세계 사이의 통일은 '지성'과 '감성'이라는 이성의 두 능력 사이의 통일에 구조적으로 대응합니다. 감성(수용성)은 우리 밖의 사물 자체로부터 주어지는 잡다를 받아들이는 능력이고, 지성(자발성)은 우리 안의 개념을 사용하여 현상의 영역을 구성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성'과 '감성'이라는 이성의 두 능력 사이의 통일은 '술어'와 '주어'라는 판단의 구성 요소 사이의 통일에 구조적으로 대응합니다. 서양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부터 판단의 술어부가 대상의 속성(말하자면, 현상)을 반영하고 판단의 주어부가 대상의 실체(말하자면, 사물 자체)를 반영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2) 바로 이런 맥락에서 헤겔이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을 강조하면서

주어와 술어의 구별을 내포하고 있는 판단이나 명제 일반의 본성은 사변적 명제에 의해 파괴되며, 첫 번째 명제(주어와 술어의 구별을 내포한 명제)가 결국 그리로 환원 되는(주어와 술어의) 동일 명제는 주-술 관계로의 반발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와 같은 이야기들을 하는 것입니다. 현상계와 예지계 사이의 분열과 통일이 주어와 술어 사이의 분열과 통일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통일은, 결코 ("모든 소가 검게 보이는 밤" 같은) 무차별적인 통일이 아니라는 것이 헤겔이 위의 인용구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오히려 주어와 술어의 통일은 갈등을 매 순간 극복하는 방식으로 성취된다는 이야기입니다.

(3) "신은 존재한다."라는 판단을 예로 들어봅시다. 전통적 형이상학에 따르면, 이 판단은 '신'이라는 실체가 '존재'라는 속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즉, 우리는 '신'이라는 실체(사물 자체)를 결코 알 수 없지만, 그 실체에게 '존재'라는 속성을 귀속시켜서 "신은 존재한다."라는 판단을 만든다는 것이 전통적 형이상학의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적어도, 헤겔이 생각하기에, 전통적 형이상학은 이런 함의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헤겔은 판단에서 이루어지는 주어와 술어의 통일을 더 이상 이런 전통적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보지 말자고 권유합니다. 주어에 해당하는 대상이 미리 고정된 형태로 우리 앞에 놓여 있고, 술어에 해당하는 속성이 그 대상에 귀속된다고 보지 않을 경우, 판단이 어떻게 새롭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여기에서 '존재'는 단지 술어가 아니라 본질이라고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신'은 문장에서의 위치에 의해 그러한 바의 것, 즉 고정된 주어이기를 멈추게 된다.

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신'이라는 대상이 고정된 실체라서 우리가 그에게 '존재한다'라는 술어를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한다."라는 술어를 통해 우리가 '신'이라는 대상을 규정한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a) 우선 판단의 주어부는 "확고한 대상적 지반을 상실"하게 됩니다. 더 이상 우리는 세계에 고정된 대상이 미리 기성품처럼 놓여 있다고 상정할 수 없습니다.

(b) 오히려 우리가 새로운 속성을 발견하여 주어를 규정할 때마다 주어의 존재가 증대됩니다. 가령, 우리가 "착하다."라는 술어로 철수를 규정하면 철수는 착한 애가 되고, "성실하다."라는 술어로 철수를 규정하면 철수는 성실한 애가 됩니다. 철수가 미리부터 착하고 성실하게 존재해서 우리가 "철수는 착하다."와 "철수는 성실하다."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철수는 착하다"와 "철수는 성실하다."라는 판단을 내릴 때마다 철수는 그러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c) 따라서 판단은 더 이상 미리 주어져 있는 실체에 대한 표상(representation, 재현)으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판단을 계속 형성하는 과정에서 대상 자체가 점점 불어나기 때문입니다. 고정된 대상을 판단의 형식 속에 있는 그대로 그려내겠다는 시도는 허구적이라고 비판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시하신 구절을 이런 식으로 독해합니다. 물론, 항상 강조하는 것이지만, 저는 헤겔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제 해석이 주석적으로 엄밀한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확신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제 해석은 저의 철학적 관심과 선이해를 상당 부분 반영하기 때문에, 다소 편향된 강조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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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윤님이 설명해주신 방식으로 책을 읽긴 읽었던 것 같은데 워낙 제가 철학 초심자라 용어들에 익숙하지도 않고 명증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써주신 글 덕분에 완벽하다고까지는 아니지만 제 스스로 헤겔이 왜 이 부분에서 이런 식으로 글을 남겼는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많은 도움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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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님께서 해당 문단의 철학적 함의를 잘 밝혀주셨기 때문에, 저는 무미건조하게 텍스트에만 집중해서 해설하겠습니다.

둘째 문단에서 나온 헤겔의 예시는 바로 앞 문단이 아니라 두 문단 앞에서 언급된 표상적 사유(das vorstellende Denken)에 관한 서술의 예시로 보입니다.

“신은 존재이다”에서 ‘신’과 ‘존재’는 각각 외견상 주어와 술어로 나타납니다. 사유는 이 구별을 그대로 고수하려고 하지만 문장을 잘 살펴보면 ‘신’이라는 주어는 의미상 ‘존재’에 완전히 포섭되는 것이고, 따라서 원래 형식상 술어인 ‘존재’가 내용상으로 진정한 주어가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형식상의 주어를 진정한 주어로 고수했던 표상적 사유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애초에 주어라고 생각했던 것이 술어에 녹아 없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형식적 술어 속에 진정한 (내용상의) 주어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표상적 사유는 이러한 판단의 내적 모순에 맞닥뜨리면서 주어-술어의 구별을 단순한 문법상의 주어-술어 구별과 동일시해왔던 당초의 형식주의적인 전제를 잃어버리고, 문장 내에 주어가 무엇이고 술어가 무엇인지를 내용상으로 고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첫째 문단에 나와 있듯, 철학적 명제에 대한 진정한 인식은 주어와 술어 사이의 형식적 구별을 아예 없애버리지 않으면서도 양자를 통일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헤겔이 항상 말하는 “지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상적 사유는 명제 혹은 판단 내의 모순을 통해 처음에 자기가 갖고 있던 전제를 깨뜨리기는 했지만 이와 같은 진정한 철학적 인식의 단계로까지는 올라서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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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렇군요 이제야 조금 이해하고, 확실히 어떻게 읽어야할지 감이 잡히는 것 같습니다. 두 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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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두 분이 상세히 설명해주셔서 저는 간단히 첨언하겠습니다. 저도 헤겔 전공자가 아니어서 헤겔 철학을 잘은 모르지만, 인용하신 부분은 헤겔 변증법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주어와 술어의 구별을 내포하고 있는 판단이나 명제 일반의 본성은 사변적 명제에 의해 파괴되며"라는 구절에서 핵심어는 "사변적 명제(spekulativer Satz)"입니다. 서양 철학 전통에서 진리는 대상과 개념의 일치이며, 그것은 '명제(Satz)'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대상의 진리를 표현하는 판단 형식인 'X는 Y다'는 내용의 측면에서 대상의 진리를 온전히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판단과 존재>를 쓴 횔덜린이었습니다. 헤겔은 횔덜린의 이러한 문제 의식을 받아들여 사변 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헤겔이 보기에 '주어 + 계사 + 술어'로 구성된 판단 형식은 존재하는 것과 개념적인 것의 완전한 일치인 사변적 진리를 표현하지 못하므로 파괴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술 관계가 파괴되고, 고정되어 있던 주어 개념과 술어 개념이 움직이면서 변증법적 운동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운동은 상당히 복잡해서 쫓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외국의 연구 문헌은 상당히 많습니다. 국내의 관련 문헌 또는 논문은 '사변 철학/사변적 명제'라는 키워드로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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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제는 갈피를 잡은 것 같습니다. 관련 논문들도 나중에 한번 참고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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