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비전공자의 자기 전문분야에 관한 응용철학하기는 어떻게 가능한가요?

반갑습니다. 제가 어쩌다 서강올빼미까지 와서 이렇게 사적인 의구심을 풀어놓는 처지가 되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목처럼 '자기 전문분야에 관한 응용 철학 하기'를 가장 큰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목표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그에 대한 방법은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추상적으로나마 1. 일련의 철학적 학술 활동 규칙을 익힌다. 2. 내 전공에 해당하는 주제의 논문들을 읽고 요약하면서 내용을 수집한다. 3. 수집한 내용을 전제 삼아 논증하거나, 결론 삼아 개별 디자인 현상에 철학적 설명을 한다. 정도로만 생각 중입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요?

문제는 제 전공입니다. 제 전공은 시각디자인입니다. 이전에 글랜 파슨스의 <디자인철학>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캐나다 토론토의 라이어슨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원서는 2016년에 쓰였고, 이 책의 서문이나 역자 해설을 보면 디자인철학이라는 분과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대형 서점의 디자인 서가에는 주로 디자인 이론 텍스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론이 어떤 철학적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문제로는 제가 철학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저는 현재 디자이너이고, 학사 졸업이고 깜짝 놀라실 수도 있겠지만, 학교 다니면서 논문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논문 쓰기를 요구받은 적이 없었고, 부끄럽지만 읽은 적 또한 없습니다. 대학원 석박사 논문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공 수업은 글을 읽는 수업이 거의 없고, 도제식 훈련 수업으로 이루어집니다. 학사 졸업 논문은 전시회를 여는 것으로 대체됩니다. '학술적'이라는 언어 표현의 외연조차 모르고 있는 지금, 앞에서 언급했던 방법 1번을 이행하려면 구체적으로 제가 해야할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제 나름의 노력으로는 1. 온/오프라인 철학강독수업을 찾아다니며 철학 텍스트에 친해지려고 노력 중입니다. 2. 영어 공부 중입니다. 3. 논리학 책을 몇 권 풀었습니다. 4. 서강올빼미 가입..등등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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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우선 여기서 말하신 "응용철학"에서의 "철학"이 정확히 무엇을 염두해 두신지를 알아야 명확한 답변이 가능할 듯 합니다.

제가 글랜 파슨스의 책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저자의 약력이나 활동 반경으로 보았을 때 크게 "분석 미학"에 해당하는 작업이 종사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특히 글쓴이 분께서 <디자인 철학>과 다른 디자인 이론 텍스트들을 구분하고 계신 점도 이런 느낌을 강하게 받게 합니다.)

(1) 현재 영미권 학계에서 예술에 대한 이론적 접근은 크게 두 방식으로 나눌 수 있을 듯 합니다. 하나는 글랜 파슨스 같이 기존의 영미권 분석 철학의 방법을 각자의 분야에 도입한 "분석 미학"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로는 광의의 대륙 철학(정신분석학, 기호학 등)에서 나온 "(문학) 이론들"이 있어 보입니다. (이외에도, 역사적-사회학적 접근 등등도 있겠지만 생략하겠습니다.

이 두 방식은 겹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서로 다른 영역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분석 미학은 여러 예술 이론들 중에서 소수의 학자들만이 하고 있으며, 분석 철학 전체로 보았을 때도 상대적으로 경시되는 영역입니다.
이러한 상대적 무관심은, 얄궂게도 여러 분석미학에 있어서 훌륭한 논문이나 책들이 상대적으로 덜 생산되고, 학자들 사이에서 덜 유통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글쓴이님이 "분석미학"적 접근에 끌리시는 듯해서, 이렇게 장황하게 현 상황에 대해서 적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제는 실제 필드에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부정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분석미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고 문제에 접근하고 싶다하시면, 다음과 같은 방법이 있을 듯합니다.

a) 노엘 캐럴의 <예술 철학>을 읽는다. (그리고 영어가 된다면 노엘 캐럴의 다른 책들을 읽는다.)
; 노엘 캐럴은 현존하는 분석 미학 학자들 중에서는 가장 인지도가 높으며, 광범위한 매체에 대해서 다룹니다. (제 기억으로는 영화, 춤, 음악, 시각 미술 등에 대해서 모두 저서가 한 권씩은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의 저서 중에서 국역되었으며, 예술에 대한 분석적 접근이 정확히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이 좋은 시작점이 될 듯 합니다.

b) 오종환 교수를 비롯한, 서울대 분석미학과 사람들의 논문을 읽는다.
; 제 기억으로는 국내에서 분석미학을 하시는 분은 서울대 오종환 교수님과 그 제자들을 제외하면 거의 없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한 권의 번역서와, 한 권의 선집 그리고 한 권의 개론서가 있는데 셋 모두 무난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c) 그 외의 채들
; 그레고리 커리의 <이미지와 마음>은 영화에 대한 분석철학적 접근을 바탕으로, 기존의 (대륙철학적) "이론들"을 비판하며 정교화하는 책입니다. 다만 국역본의 번역 상태가 가독성이 안 좋습니다. 영역본과 같이 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켄달 L 월튼의 <미메시스 ; 믿는 체하기로서의 예술>은 여러 예술 영역에서의 재현에 관한 이론을 제시합니다. 책 자체가 난이도가 있고, 난삽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여러 매체를 포괄하는 "예술 현상"에 대한 분석적 이론이 어떻게 제시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보드웰의 <영화 스타일의 역사>. 비록 철학은 아닌, 영화학자입니다만 보드웰은 영화학에서 노엘 캐럴과 함께, 분석미학적-인지과학적-실증적 접근 방식으로 개척한 학자로 유명합니다. 이 책은 특히 보드웰이 꼼꼼한 실증적 자료와 함께, 정교한 영화 "스타일"에 대한 이론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읽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3) 여기까지 오셨다면, 이제 여러 가지 결정을 내리실 수 있게 되었을 겁니다. 아 내가 하고 싶은게 이거구나, 혹은 이거였나? 등등 말이죠. 그 다음부터는 이제 대학원으로 가거나 전공자들 모임이 가거나 아니면 야인으로 남거나 등의 여러 "현실적인 선택"을 내리실 시점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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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 또한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고, 철학에 호감을 느끼는 입장에서 반가움이 더 한 듯 합니다. 처음 제목을 읽었을 땐 '철학을 응용하기'라고 무심결에 읽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응용 철학하기 였군요?!

철학을 응용하는 방법은 꽤나 많을 텐데, 되려 디자인으로 철학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예컨대 디자인의 무엇을 철학적 대상으로 삼아야 할까요? 그것부터가 시작이 될 것 같습니다.

Mandala님께서 예술의 관점으로 철학을 할 수 있는 좋은 가이드라인을 제안 주셨기 때문에, 저는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배우고 있는 교수님의 특성상, 학부생임에도 디자인 논문들을 많이 읽어보았는데요. 디자인 석박사 논문은 대체적으로

  1. 프로젝트에 이론적 개념을 적용하여 분석 및 제안
  2. 특정 관점에서 프로젝트들을 아카이브 혹은 분석하는 방식

정도로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즉, '프로젝트'가 주가 되는 것이지요. 논문에서 주장하는 바를 검증하기 위해선 사례 분석이 필요하고, 디자인 분야에서는 그 사례들이 디자인 프로젝트가, 철학에서는 텍스트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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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신 논문 중에 꼭 읽어봐야할 좋은 논문이 있다면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design 지금 관심 가지는 분야가 어떤 쪽이신가요? 해외 영본까지 찾아보진 못해서 고전이라고 할 만한 논문을 알고 있진 않네요...

시각디자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일천하기에 구체적인 조언은 드릴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만, "비전공자의 자기 전문분야에 관한 응용철학하기"에 대해서는 부족하나마 몇 마디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철학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좀 어려운게, '철학자'의 정의부터가 좀 모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철학자가

강단에서 정규 철학 과목을 가르칠 수 있고, 표준적 형식의 철학적 논문을 출판함으로써 철학계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

이라고 한다면 사실 현역 사회인으로 활동하시는 이상 쉽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왜냐면 결국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 철학 연구 능력 역시 어느 정도는 도제식의 훈련을 거쳐야 하고, 파트타임 대학원을 다니던가 하는 경우에는 정말 피나는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 것을 봐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규 과정의 철학자'들과 같은 출발선 상에 서계실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됩니다. 특히나 '자기 전문분야에 관한 응용철학하기'만이 목표시고, 나아가 현업 종사자시라면요.

왜냐면 (제가 아는 한) 대부분의 응용철학 분야에서는 '현업자들의 현장 체험'에 목이 말라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현장 체험을 공유해주는 것만으로도 해당 학계에는 큰 도움이 됩니다. '아 그거 그렇게 하는거 아닌데;; ㅡㅡ' 같은 것이라도요.

물론 이 지점으로부터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다양합니다.

  1. 기존 철학적 작업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판단해서 '역시 강단철학은 쓰레기야! 내가 현업자의 철학을 보여주겠어!'라고 흑화해서 독고다이로 소셜 미디어를 비롯한 각종 매체를 활보하는 케이스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언급하기는 힘듭니다만) 대개 그 결과물은 학계에서 보면 영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학계에서는 이런 케이스를 보면서 '역시 철학이 동네북이지 ㅎㅎ'하고 자조하고는 합니다.

  2. 근데 '현업자' 포지션을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기존 결과물에 대해 비판을 하고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이 관련 분야의 철학자와 컨택을 해서 협업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업계에서 명망이 있어서 그 철학자가 이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면 두말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학문적 프로토콜을 이해하고 있는 철학자는 '현업자'의 한계를 잘 메워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또 일이 나빠지자면 무슨 정치적인 문제가 벌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 뭐 그렇게 가다보면 한도 끝도 없지요.) 하여튼 이런 과정이 잘 풀린다면, 이를 시작으로 얼마든지 철학계에서 '외부의 시각을 수혈해주는 고마운 전문가'의 포지션을 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점이 되면 이 사람은 충분히 '철학자'로 불릴만할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제가 디자인 분야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기에 이런 말씀이 얼마나 적확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해당 분야의 '현업자'로 계신 이상 굳이 꼭 '정규 테크트리'를 타실 필요는 없으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려 말씀을 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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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넘게 진부한 이야기하자면 철학을 전공한다, 너는 전공자고 나는 비전공자다라는 틀을 깨는 것이 철학의 출발이 아닐까 합니다 대학 전공이 어떤 사람을 철학자로 만들어주지는 않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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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공자가 철학을 공부하다고 해서 꼭 본업을 그만두고 철학과 대학원 진학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 듯 합니다. 학부시절 철학을 전공한다고 해도 대부분의 경우 깊은 수준까지 알고 졸업하기 어렵습니다.

철학사 공부하고 본인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심도있게 온라인 강의 등을 듣고 책을 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학부전공은 철학을 했지만 졸업 후 약 30년을 철학하고는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철학 분야의 책을 읽고 삽니다. 공부는 삶의 도구이지 목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철학 공부를 통해서 얻은 통찰과 깨달음을 삶에서 활용하려고 노력합니다. 거창한 소리 같지만 주어지는 일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해보는 정도만 해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일종의 방법론이자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공학도 졸업하고 몇년만 지나도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른 현실을 마주칩니다. 그래도 그걸 기초로 새로운 일을 배워 가면서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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