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은 언제 말뿐인 논쟁이 되는가?: 일라이 허쉬의 「존재론과 대안적 언어」 발제문(1)

hirsch-eli
일라이 허쉬

1. 들어가는 말

카르납은 존재론의 문제가 한 언어를 선택하거나 다른 언어를 선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의 입장은 대략 카르납적이다. 세 가지 제한 규정(qualification)이 덧붙여지지만 말이다.

제한 규정 1: 카르납의 공식은 때때로 반실재론적이거나 검증주의적 관점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의 입장은 굳건하게 실재론적이다. 나는 세계와 사물이 우리의 지식이나 언어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우리의 언어적 선택은 무엇이 존재하는지(what exists)를 결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언어적 선택은 단지 우리가 “무엇이 존재하는지(what exists, 존재하는 것)”라는 말과 그와 연관된 말을 가지고서 무엇을 의미하고자 하는지를 결정할 뿐이다.

제한 규정 2: 나는 존재론적 문제가 왜 언어적 선택으로 환원되는지에 대한 카르납의 설명을 이해할 수 없다. 카르납은 어떤 선험적(a priori) (혹은 비경험적non-empirical) 문제는 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이 외적인 것이고 무엇이 외적인 것이 아닌지에 대한 그의 설명은 불분명하다. 만약 카르납의 설명이 검증주의적이라면, 나는 그의 설명을 거부한다. 오히려, 나의 관점에서, 존재론에서의 문제는 다음 조건을 만족할 경우 언어적 선택으로 환원된다는 의미에서 ‘단지 말뿐(merely verbal)’이다.

  • 각 측은 다른 측이 언어를 말한다고 그럴듯하게 해석할 수 있다(Each side can plausibly interpret the other side as speaking a language).
  • 다른 측이 주장한 문장은 그 언어에서 참이다(in which the latter’s asserted sentence are true).1

따라서 나는 존재론의 모든 문제가 말뿐이라는 카르납의 포괄적(blanket) 가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존재론적 문제는 이 조건을 만족하고, 어떤 존재론적 문제는 이 조건을 만족하지 않는다. 가령, 플라톤주의자와 유명론자 사이의 논쟁은 이 조건을 만족하지 않으므로 말뿐이지 않다. 그러나 어떠한 물질(matter)의 집합이 단일한 물리적 대상(unitary physical object)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말뿐이다. 이 논문에서 나는 편속주의자(perdurantist)와 인속주의(endurantist)자 사이의 논쟁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 문제의 말뿐임(verbalness)에 대한 나의 논증은 물리-대상 존재론 속의 다른 많은 문제로 일반화할 수 있다.

제한 규정 3: 나의 기획에서 중심적인 부분은 상식(common sense)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카르납의 관심사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가령, 나는 (편속주의 같은) 수정주의적 존재론의 관점이 일상 언어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로 선택하고 있다고 논증한다. 또한 나는 수정주의 존재론이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자신이 일상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한, 이 입장은 일종의 언어적 실수(verbal mistake)를 범한다고 논증한다.

논문의 몇 가지 가정: 이 논문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가정을 명시적으로 만들자.

― 인속주의자는 과정(process)과 역사(history) 같은 것들이 시간적 부분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인정할(allow)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것들이 이 논의 전체에서 무시되도록 약정하고자 한다. 인속주의자와 편속주의자 사이의 주된 논쟁은, 공간의 부피를 차지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 일상의 물리적 물체의 시간적 부분에 관한 것이다(concern).

― 나는 인속주의자와 편속주의자가 시간적 부분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논쟁에 관여한다고 간주한다. 그들이 불일치하는(불일치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문제뿐이다. 특별히, 그들은 일상적 물체의 통시적 동일성을 위한 조건에 대해 불일치하지 않는다(불일치할 필요도 없다).

― 나의 일반적 가정은 존재론적 논쟁이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문제(matters of a priori necessity)에 관련된다는(concern) 것이다. 편속주의자와 인속주의자 양 측은 그들의 주장을 선험적 필연성에 근거하여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 대안적 언어

상상 1. 에드나: 우리는 편속주의자인 척하는 인속주의 옹호자(에드나Edna)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는다.​

“이제부터 나는 대상이 어떻게 특정한 시간에 존재하는지에 대해 말하길 원할 때 ‘대상의 시간적 부분’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이다. 나는 1860년에 링컨이 수염이 있었던 상황을 기술하기 위해 ‘링컨은 1860년에 수염이 있었던 시간적 부분을 가졌다’라고 말할 것이다. 일반화하자면, 나는 ‘a는 시간 t에 F인 시간적 부분을 가진다’라는 형식의 문장을 a가 t에 F인 임의의 상황에 대해 참인 것으로 사용할 것이다. (여기서 ‘F’는―‘청소년(adolescent)’과는 달리―특정한 시간에서의 특정한 대상에 대해, 그것이 그 시간에서 어떻게 존재하는지로 인해, 적용되는 용어이다.)

상상 2. 페드로: 우리는 인속주의자인 척하는 편속주의 옹호자(페드로Pedro)를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는다.

“이제부터 나는 모든 맥락마다 나의 양화사를 인속주의자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대상들에 제한할 것이다.―거칠게 말하자면, 일상적 물체의 (적절한) 시간적 부분이 아닌 대상에 제한할 것이다.”

상상 1과 상상 2에 대한 설명: 에드나의 비밀 언어에서는 편속주의자에 의해 주장된 문장이 참이고, 페드로의 비밀 언어에서는 인속주의자에 의해 주장된 문장이 참이다. 각각을 P-영어와 E-영어라고 부르자. 우리가 대상이 시간적 부분을 가지는지를 물을 경우, 우리의 언어가 P-영어라면 대답은 “그렇다”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언어가 E-영어라면 대답은 “아니다”가 되어야 한다.

대안적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과 대답: 각 입장이 옳은 것이 되도록 하는 대안적 언어를 어떻게든지 발견함으로써 모든 논쟁을 말뿐인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가? 그 대답은, 철학 바깥의 임의의 일반적 논쟁에 대해서는, 우리가 적절한 대안적 언어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용어 정리: 이 요점을 더 전개하기 전에, 몇몇 용어를 고정시키자.

― 나는 ‘명제(proposition)’를 가능세계의 집합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 루이스를 따른다.

― 나는 문장의 ‘특성(character)’을, 발언의 맥락과 관련하여, 명제를 문장에 할당하는 함수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 카플란을 따른다. 특성은 문장의 ‘진리 조건(truth conditions)’을 준다고도 말해질 수 있다.

― 나는 언어에 대한 ‘해석(interpretation)’으로 그 언어의 각 문장에 특성을 할당하는 함수를 의미한다. 해석이 표현의 지시(reference of expressions)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문장의 특성(character of sentences)의 측면에서 정의된다는 사실에 주의하라. 우리의 현재 목적을 위해, 나는 언어가 해석에 의해 개별화된다고 가정한다. 즉, 구별된 언어는 같은 해석을 가지지 않는다.

대안적 언어의 정의: 두 입장 사이의 논쟁에서, 주어진 입장을 위한 ‘대안적 언어(alternative language)’란

  • 다른 입장의 옹호자가 주장할 문장만을 주장하면서도
  • 그 입장의 옹호자가 그들 자신이 믿는 모든 (대상-수준의) 명제를 그 속에서 표현할 수 있는 언어

이다. 가령, P-영어는 이러한 의미에서 인속주의자를 위한 대안적 언어이고, E-영어는 편속주의자를 위한 대안적 언어이다. 대안적 언어의 의미 구조에 대한 어떠한 제약도 다음을 넘어서는 것으로 가정되지 않는다.

대안적 언어 속 문장의 특성의 집합은 본래 언어 속 문장의 특성의 집합과 같은데, 특성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전환할 때에 문장에 단지 재분배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대부분의 논쟁에서, 설령 대안적 언어가 존재하더라도, 그 대안적 언어가 논쟁을 말뿐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요구되는 방식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한다.

모든 논쟁을 말뿐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 고찰하기 위한 사례: 중세에는 많은 유대교인이 박해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인인 것처럼 가장하였다. 그런데 기독교인과의 논쟁에서 유대교인을 위한 대안적 언어가 존재하였는가? 즉,

  • 기독교인[의 언어]처럼 들리는데도
  • 유대교인으로 하여금 유대교인이 믿는 모든 명제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비밀 언어​

로 유대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대안적 언어가 존재하였는가? 이러한 비밀 언어에서는 “예수가 물 위를 걸었다.”는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다는 명제를 표현할지도 모르고, “모세가 산에서 내려왔다.”는 예수가 물 위를 걷지 않았다는 명제를 표현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유대교인은 기독교인이 그런 것처럼 이 문장들을 모두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프로그램이 그 언어 속 모든 문장을 포괄하도록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었을까?

주의 사항 1​: 대안적 언어를 단어와 대상 사이의 지시적 관계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비밀 언어의 의미론적 구조에 대한 선행적 가정을 만들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언어 속 문장의 특성이 단어와 대상 사이의 지시적 관계에 의해 표준적 방식으로 규정된다고 밝혀질 필요는 없다.

주의 사항 2: 나의 질문을 실재론에 반대하는 퍼트남의 모델 이론적 논증의 요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퍼트남의 요점은, 기독교인에 의해 주장된 문장이 논리적으로 일관적인 한에서, 그 문장을 참으로 만드는 모델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진리에 대한 실재론적 관념에 근거해서는 유대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부정할 어떠한 이유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결론내릴 것이다. 그러나 나의 요점은 실재론적이고, 나는 모델에 대한 물음을 묻고 있지 않다.

물어져야 하는 두 가지 질문: 여기서 정말로 물어져야 하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논리적 공간에서 유대교인을 위한 가능한 비밀 언어가 존재하는가? 유대교인은 그런 언어를 어떻게든 배울 수 있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사소할 경우 (맥락의 요소를 고려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기독교인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모든 문장이 나열 C로 배열되었다고, 유대교인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모든 문장이 나열 J로 배열되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비밀 언어에서, C의 n번째 문장의 특성은 단순히 J의 n번째 문장의 특성일 수 있다. 이러한 도식의 사소한 버전은, 나열에서 대응하는 문장들이 논쟁의 대상이 된다면, 그 문장들을 모순되는 것들로 만들고, 그 문장들이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그 문장들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2​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사소하지 않을 경우 (맥락의 요소를 고려할 경우): 그러나 일단 우리가 맥락을 고려하면, 이러한 단순한 종류의 도식은 작동할 수 없다. “저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다.”라는 문장 A를 고려하라. 이 문장은, 유대교인과 기독교인 모두에게, 어떤 맥락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어떤 맥락에서는 아니다. 비록 두 그룹이 어떤 맥락에서는 불일치할 것이지만 말이다. 비밀 언어에서 A의 특성은

  • 기독교인이 A를 표준 언어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맥락에서 그리고 오직 그러한 맥락에서만(in all and only contexts)
  • 유대교인은 A를 비밀 언어에서 받아들일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 두 언어가 같은 특성을 지닌 문장들을 포함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 비밀 언어에서 A의 특성이 표준 언어에서 B의 특성과 같고,
  • 기독교인이 A를 표준 언어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맥락에서 그리고 오직 그러한 맥락에서만 유대교인은 B를 표준 언어에서 받아들일​

그러한 문장 B가 존재해야 한다. 더 나아가, 비밀 언어에서 B의 특성이 표준 언어에서 C의 특성과 같고, 기독교인이 B를 표준 언어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맥락에서 그리고 오직 그러한 맥락에서만 유대교인은 C를 표준 언어에서 받아들일 그러한 문장 C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면 B가 A에 대해 관련되고 C가 B에 대해 관련되는 방식으로, C에 대해 관련되는 D도 존재해야 한다.

그러한 나열이 그 언어에 존재하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유대교인을 위한 비밀 언어란 가능하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허구주의적 전략: A가 표준 언어에서 가지는 것과 같은 특성을, “유대교의 가정에서, A”라는 형식의 문장이 비밀 언어에서 가지게 하자. (B가 “유대교의 가정에서”라는 말로 시작하는 문장이 아닐 경우) “기독교의 가정에서, B”가 표준 언어에서 가지는 것과 같은 특성을, B가 비밀 언어에서 가지게 하자. 특정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기독교인의 믿음에 유대교인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 유대교인은 “그 사람은 지옥에 간다.”라는 문장을 주장함으로써 동의하는 척할 수 있다. 이 문장은 비밀 언어에서 이러한 것(“그 사람은 지옥에 간다.”)이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바(what Christians think)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 유대교인은 “유대교의 가정에서, 그 사람은 지옥에 가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사람은 지옥으로 가지 않는다는 그들의 비밀 믿음을 표현할 수 있다.3​

결론: 따라서 유대교인을 위한 고유한 대안적 언어는 실제로 존재한다. 같은 추론에 따라, 기독교인을 위한 대안적 언어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이 단지 말뿐이라는 사실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말뿐인 논쟁에서는 다음의 발화를 각 측에 대해 만드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당신은, 다른 측 언어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해석에 근거하여, 다른 측이 당신의 견지에서의(by your own lights) 참을 주장한다는 사실에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저 사람은 지옥에 간다.”와 “유대교의 관점에서, 저 사람은 지옥에 가지 않는다.”라고 주장할 때, 유대교인은 위와 같이 생각할 수 없다. 즉, 그 사람이 지옥에 가지 않는 세계에서 참이 되는(hold true) 명제를, 그러나 기독교인의 가정에서는, 그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명제를 기독교인이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4​

사례의 교훈​: 문제가 “단지 언어를 선택하는 문제”로 격하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 즉, 각 측은 다른 측이 다른 측의 언어에서 참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

3. 말뿐인 논쟁과 해석적 자비

우리는 말뿐인 논쟁을 각 측이 자신의 언어에서 참을 말하는 논쟁이라고 정의하도록 유혹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옳지 않다.

사례 1. 비언어적 사실에 대한 오해에서 발생한 논쟁: 논쟁자들이 비언어적 사실에 대해서 오해할 때도 논쟁은 말뿐일 수 있다. 가령, 해리가 다람쥐 주위를 달라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다람쥐가 있는 나무 주위를 달리고 있는지에 대한 말뿐인 논쟁이 있을 수 있다. 사실 해리는 집에서 자고 있고, 달리는 사람은 해리와 닮은 누군가일 경우에 말이다.

사례 2. 일차 수준의 논쟁에 대해 이차 수준에서 발생한 논쟁: 일차 수준에서의 논쟁이 불가피하게 (일차 수준에서의 각 측이 자신의 언어에서 참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차 수준에서의 논쟁으로 귀결되는 사례는 단순히 말뿐이지 않다. 가령, 플라톤주의자와 유명론자의 논쟁에서, 플라톤주의자는 유명론자가 그들 자신의 언어에서 참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반면, 유명론자는 플라톤주의자에게 그러한 양보(concession)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플라톤주의자와 유명론자가 그들의 일차 논쟁이 말뿐인지에 대한 이차 논쟁을 벌인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경우의 일차 논쟁이 말뿐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말뿐인 논쟁의 정의: 따라서 나는 말뿐인 논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것이다.​

말뿐인 논쟁이란, 언어적 해석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고려할 때, 각 진영은 다른 진영이 그들 자신의 언어에서 참을 말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논쟁이다.

더 간략히 말하자면,​

말뿐인 논쟁에서 각 진영은 다른 진영이 그들 자신의 언어에서 참을 말한다는 사실에 동의해야 한다.

이 정의가 지닌 사소한 문제: 버지에 따르면, 만일 개인이 특정 언어적 공동체에 소속될 경우, 공동체의 언어가 개인의 언어가 되고, 개인의 언어적 행동이 드러내는 고유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규약적으로 옳은 특성이 개인이 주장한 문장에 할당되어야 한다. 이러한 요점은 말뿐인 논쟁에서 각 논쟁자가 그들 자신의 언어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문제를 우회하는 방법: 임의의 논쟁에서 X 측의 언어는 상상된 언어적 공동체에 속하는 언어인데, 그 공동체의 전형적 구성원은 X의 언어에 적절하게 유사한 언어적 행동을 드러낸다. 가령, 만일 X 측이 편속주의면, X의 언어는 그 공동체의 전형적 구성원이 “편속주의자처럼 말하는” 그러한 상상된 언어적 공동체에 속할 언어이다. 즉, 그 구성원은 편속주의자가 주장하고 인속주의자가 거부하는 문장들을 주장한다.

자비의 원칙: ‘사용(use)’에 대한 호소가 내가 언어적 해석에 대한 올바른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핵심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호소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자비의 원칙(principle of charity)’이라고 불리는 것에 기초를 둔다. 가령, 사과가 있을 때에만 전형적 화자가 어떤 문장 S에 동의하는 언어적 공동체를 상상하라. S를 통해 그들이 코끼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이 사과를 코끼리라고 체계적으로 혼동한다고 말하는 것은 왜 사용에 대한 호소가 되지 않는가? 그 대답은, 사용에 대한 호소가 언어에 대한 사람들의 사용으로부터 최대한 의미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라는 것이다. 올바른 해석이란 언어에 대한 사람들의 사용을 가능한 합리적인 것으로 만드는 해석이라는 가정은 언어적 해석에 중심적이다.

자비의 원칙의 적용 1. 편속주의: “편속주의자처럼 말하는”(P-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상상하라. 평범한 나무 막대를 보여주면, 그들은 “우리 앞에 잠깐 지속되다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매우 가시적이며 나무로 된 대상의 연속이 있다.”라는 문장에 동의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E-영어를 말하고 있다면, 그들은 어떠한 가시적 대상이 눈앞에 존재하는지에 대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된다. 왜 그들이 이러한 종류의 오류를 만든다고 예상되는지에 대한 비일상적으로 가망 없는 설명을 제외하면, 사용에 대한 자비(charity to use)는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P-영어를 말한다고 해석하도록 요구한다.

자비의 원칙의 적용 2. 인속주의: 유사한 논점이 “인속주의자처럼 말하는”(E-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도 유효하다. 그들의 언어는, 사용에 대한 자비를 통해 지시되듯이, E-영어이다. 물론, 우리 자신의 공동체 속 사람들은 인속주의자처럼 말한다. 따라서, 인속주의자와 편속주의자가 평범한 영어를 말한다고 주장하는 한, 인속주의자는 옳다.5

루이스와의 차이: (a) 루이스는 “모든 것이 말해지고 행해진”, “모든 까다로운 논증과 구별과 반례가 발견된”, 그래서 각 입장이 “평형” 상태에 이르게 된 단계가 결국 존재론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한다. 내가 인속주의자와 편속주의자의 논쟁이 말뿐이라고 말할 때 생각하는 것은 이러한 단계다. 그러나 (b) “모든 것이 말해지고 행해진” 단계에 도달한 이후에는, 단지 각 측이 그들 자신의 언어에서 참을 말할 뿐이다. 즉, 나는 우리가 “모든 것이 말해지고 행해진” 단계에 도달한 때에, 한 측이 “사실(fact)에 대한 오류를 만들고 있는,” “의견의 문제(matter of opinion)”가 남게 된다는 루이스의 주장을 거부한다.

루이스와의 차이가 미치는 영향: 편속주의자들이 나에게 귀를 기울일 경우, 그들의 태도는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주장을 고수하고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최소한 우리의 언어에서 옳을 것이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a) 그들이 처음에 평범한 영어에서 옳기를 원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b) 그들이 얼마나 근사한 논증을 떠올리든지에 상관없이, 더 넓은 언어적 공동체에는 편속주의로 전환하려는 일반적 성향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왜 편속주의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P-영어라는 그들의 특화된 언어를 말하는 것을 유지하도록 허용할지도 모를 근사한 논증을 떠올리길 시도하는 것에 전력을 다해야 하는가? 인속주의로 되돌아가 평범한 영어(=E-영어)를 말함으로써 “모든 것이 말해지고 행해진” 단계로 단순히 빠르게 점프하는 것이 더 낫다.6

편속주의를 옹호하는 루이스의 논증 비판​: 편속주의를 옹호하는 루이스의 주된 논증은 ‘시간적 내재 속성의 문제(problem of temporary intrinsics)’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제시하고자 하는 요점은, 그 논증이 사실상 검토되지 않고서도(sight unseen)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논증이 일반적인 영어 화자를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질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히 인속주의자처럼 말하고자 하는 일반적 화자의 성향은 시간적 내재성에 대해 우려하는 어떠한 성향도 능가한다. 따라서 평범한 영어는 E-영어로 남는다. 논쟁에 개입한 철학자들이 평범한 영어를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 이 사실이 바로 그들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다.

카르납적인 아이디어를 위한 두 가지 주장: 나는 무엇이 말뿐인 논쟁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말뿐인 논쟁을 장려하고 있지 않다. 나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를 주장하고 있다.

― 만일 전형적 구성원들이, 모든 것이 말해지고 행해진 이후에, 편속주의자들이(인속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문장을 언명하는 언어적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사용에 대한 자비는 이러한 공동체의 언어를 P-영어(E-영어)로 기술하도록 강요한다.

― 한 쪽 언어의 화자는, 다른 언어의 화자가 그들 자신이 주장하는 문장과 같은 특성을 지닌, 그러므로 같은 진리값을 지닌 문장을 주장한다고 허용해야 한다.

나에게 이러한 두 주장이, 편속주의 대 인속주의의 문제 맨 밑바닥에는 단지 P-영어나 E-영어 둘 중 하나에 대한 선택만 있다는 카르납적인 아이디어를 함축하는 것으로 보인다.

첨언 1: 나는 편속주의 철학자와 인속주의 철학자들이, 두 개의 상상된 언어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관련되는 방식과는 중요하게 다른 방식으로, 서로에게 관련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편속주의와 인속주의 철학자들은 같은 언어 공동체에서 성장하였고, 그에 따라 그 공동체의 언어에 개입한다.

첨언 2: 모든 것이 말해지고 행해진 이후에도, 철학자들은 그들의 과거를 벗어날 수 없으며 철학 이전의 순진함으로 돌아갈 수 없다. 만일 누군가가 이러한 점이 철학자들이 말뿐인 논쟁에 연루되지 않는다는 뜻(sense)를 함축한다고 고수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을 필요가 없다. 나는 단지 철학자들이 말뿐인 논쟁에 연루된다고 하는 것이 의미(sense) 있다고, 그리고 이러한 의미(sense)가 카르납적 결론을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사이더에 대한 논평: 사용에 대한 자비가 유일하게 적절한 해석적 원칙은 아닐 것이다. 사이더는 단어(words)가 자연적 속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루이스의 생각이 언어의 논리적 장치(logical apparatus)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그래서 존재론에 특별한 함의를 지니는 해석적 원칙이 존재할 것이라고 참신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는 언어가 세계의 ‘논리적 결(logical joint)’에 더 잘 들어맞거나 덜 들어맞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더 잘 들어맞는 해석을 선호할 추정상의 근거(presumption)가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러한 입장이 두 가지 근본적 문제를 지닌다고 본다,

― ‘논리적 결’이라는 관념이 나에게는 불분명하다. 사이더는 종종 언어 속의 양화사-같은 표현(quantifier-like expression)이 존재(Existence)를 표현할 경우에만 세계의 논리적 결에 응답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명백하게도 설명이라기보다는 ‘논리적 결’과 ‘존재’를 일차적 관념으로 받아들이라는 제안이다.

― 만일 사이더가 논리적 결에 의해 강제되는 추정상의 근거에 대해 말한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더라도, 이러한 추정상의 근거는 사용에 대한 자비를 고려하여 파기될 수 있다. 자연의 결이 E-영어를 선호하든지 P-영어를 선호하든지, 공동체의 언어적 행동이 일차적으로 그들이 어떤 언어를 말하고 있는지를 결정한다.


  • 이 글은 2022년 2학기 연세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형이상학 및 존재론의 문제’ 수업에 제출한 발제문이다. 수업의 발제문 작성 원칙에 따라, 원문의 내용에서 중요한 부분을 가급적 직역하여 정리하였다.
  1. 즉, 각 측은 상대가 말한 문장이 상대의 언어에서는 참이라고 그럴듯하게 해석할 수 있다.

  2. 따라서 나열 C와 나열 J의 모든 문장의 특성이 동일할 경우, 유대교인을 위한 대안적 언어가 존재한다.

  3. 즉, 다음의 표와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1. 즉, 기독교인이 유대교인의 진리(“그 사람 지옥에 가지 않는다.”)를 단지 기독교인의 언어에서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2. 자비의 원칙에 따르면, 우리는 일상인들이 잘못된 P-영어를 사용하면서 막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3. 인속주의와 편속주의 사이의 논쟁이 ‘말뿐’이라는 주장이 옳다면, (a) 편속주의는 단지 평범한 영어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을 뿐인 것으로 드러나고, (b) 편속주의가 인속주의보다 옳다는 주장을 정당화할 만한 어떠한 근사한 논증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편속주의자가 굳이 평범한 언어(=E-영어) 이외의 편속주의적 언어(P-영어)를 고수해야 할 필요성은 사라진다.

7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