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철학과에서 공부할 당시에 김영건 선생님께 배웠던 여러 가지 중요한 교훈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런 거였어요.
"텍스트가 어렵게 쓰여 있으면, 이걸 이해 못하는 우리가 아니라, 애초에 글을 이따위로 쓴 놈이 멍청한 거지!"
복잡하고 난해한 글들이 수업에서 등장할 때마다, 김영건 선생님이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면 참 속이 시원했습니다. 고전적인 철학자들이 쓴 고전적인 논문에 대해, "글이 개판이라 괜히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는 거다."라고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해주시는 분은 정말 보기 드물었으니까요.
특별히, 저 같은 대학원생들은 항상 배우고 평가 받는 위치에 놓여 있다 보니, 고전적인 텍스트를 읽을 때면
'내가 빡대가리(?)여서 이 위대한 글을 이해 못하는구나!'
하고 무조건 숙이는 자세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김영건 선생님을 통해 애초에 텍스트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그 이후로는 철학 텍스트를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게 되더라고요.
그렇다고 김영건 교수님이 난해한 내용에 대해 무조건 텍스트 탓만 하시는 분은 결코 아니었죠.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그 내용을 한두 문장으로 간략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게 김영건 선생님이 항상 강조하셨던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죠.
"뭐든지 자신이 읽은 걸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어야지! 좀 더 나가면, 전제와 결론 두 문장으로! 틀리면 뭐 어때? 잘못 이해한 내용은 나중에 고치면 되는 거야."
공부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읽은 내용을 대담하게 자신의 말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렇게 요약한 내용이 정말 옳은지를 사람들 앞에서 검토해야 한다는 거였죠. 그래서 김영건 교수님의 수업에서는, 어떤 복잡하고 난해한 텍스트에 대해서라도, 한두 문장으로 요약하여 토론하는 일들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종종 생각하는 것이지만, 김영건 교수님처럼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는 철학 공부에서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철학자들의 글이라는 게, 언제나 깔끔하고 완벽하게 쓰여 있지만은 않으니까요. 사실, '개판'인 경우가 훨씬 많죠. 고전적인 논문들조차도 종종 특정 부분에서는, 글을 쓰는 사람 본인의 머릿속에 내용이 충분히 정리되지 않아서, 문장과 문장 사이나 문단과 문단 사이를 굉장히 엉성하게 맞춰놓기도 하고요. (러셀의 "On Denoting"에서 '그레이(Gray) 연가 논증'이 그 대표적인 예죠.) 이런 경우에는 표현이나 구절 하나하나에 대단한 의미를 두면서 텍스트를 심각하게 해석하려는 게 애초에 그다지 생산성이 없는 일일 거예요. 오히려 그 부분에서 텍스트가 말하려는 요지를 대강 한두 줄로 정리해 보고, 이후에 잘못 해석한 게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면 그때 가서 수정하는 게 훨씬 낫죠.
그래서 저는 철학 텍스트를 읽다가 난해한 부분에 부딪히게 될 때 항상 이렇게 질문합니다. (a) 이 부분이 정말 내가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통찰을 담고 있어서 어려운 것인가, 아니면 (b) 단지 글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서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인가? 물론,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는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가 곧바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적어도 (b)라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만으로도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하지 않게 되었거든요. 텍스트에 있는 모든 난해한 내용 하나하나에 반드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난해한 내용을 과감하게 요약하고 그 다음 내용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적어도 저는, 학생들에게 텍스트를 '가볍게' 대할 수 있는 용기를 길러주셨다는 점에서, 김영건 선생님께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