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믹하지 못한 철학의 피드백 요청

안녕하세요. "나만의 철학"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속칭 도사입니다.
피드백을 받아보고 싶습니다.
열려 있는 철학 커뮤니티로써 올 것이 왔구나, 여길 분들이
많으실 수 있단 걸 잘 짐작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서 글을 적어볼게요.

저는 드디어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철학이라는 학문을 마스터했습니다.

이렇게 건방지게 전도하려는 접근이 전혀 아닙니다. 진짜 아니에요...
그냥 개인적인 내용을 이해받아보고 싶어서,
저도 좀 당황스럽지만, 방황하다보니 여기까지 와버렸습니다.

살면서요. 소심해서, 피드백 시도도 몇 번 못 드려봤습니다.
그냥 조용히 재밌다 하면서, 혼자 만들어왔거든요...
근데 애초에 항상 보여드리면 자의적인 표현으로
이해부터 어렵다고 하시는 게 공통 피드백이라
한 번도 제대로 이해받아본 적이 없어요...

왜냐면 애초부터 학술적인 글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개념 정의도 엄밀하게 들어가지 않고,
누군가에게 설명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서 만들어왔고, 하물며 사상누각일 가능성도
부정 못해요. 다분하죠.

특히 엄밀하지 못한 개념의 정의와 더불어
표현력이 안 좋아서 주관적인 개념을 남발하는 탓에
글이 굉장히 지저분한데, 이 때문에 장벽이 높습니다.

때문에 그냥 갈증이 해소될 수는 있을까 싶은
막연한 기대로 글을 남겨보는데요.

여론이 부정적일 경우 분쟁나면 안 되니 이 글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만약에 호기심에서라도 한 번 봐주시겠다고 말씀주시는 분이 계실지라면,
화면 바깥에서 절하면서 답글로 링크 게시해드리겠습니다.

제가 링크를 바로 드리지는 못하겠는데, 이유는
제 철학을 보여드린다는 게,
여러분들께 쓰레기장을 선물하는 모양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좀 엄밀치 못한 쓰레기들을 십년 동안 모아는 놨는데,
한 번 쓸만한 게 있을지 뒤적거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이거는 좀 예의를 갖췄다 하여도
학술적 토론의 공간에 반갑지 못한 잡상인 찾아오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 들어서요.
바로 상품 소개부터 들어가듯 게이트를 열어버리는 건
많이 이기적이고 안일한 행위라고 생각 돼서
최대한 조심하려는 점입니다.

저를 계기로 하여
이 희소하고 가치 높은 국내 커뮤니티가
쓰레기장 범벅 되면 안 되니까요...

그럼에도 여론이 강하게 부정적일 수 있음을 알고,
커뮤니티에 해가 될 수 있음에도 올리려는 이유가 뭐냐고
여쭤보실 수 있으신데요.

그에 대한 대답은 국내 철학 커뮤니티가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온라인의 멀쩡한 곳이라 해봐야 네이버 카페, 철학의 세계 단 한군데고,
(분량이 많아서인지 이곳에 올려봤는데
가벼이 오신 분들이 대부분이시라 관심조차 주시지 않으시더라고요...
애초에 가장 활성화된 철학 커뮤니티임에도 활동인구가 적습니다.)

그렇다고 일반 커뮤니티에 올리기에는 철학이라는 네임 자체가 마이너해서
다가와본 모두가 부담을 느끼고 돌아가며,
(올려봤지만, 관심은 가서 응원은 하지만 분량 문제로
읽어보기에는 부담스럽다는 반응만이 있었습니다.)

현실, 오프라인에서는 일반인도 학자도 아닌 그 사이에 어중간하게 낀
괴짜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숙명이기에
선뜻 말부터 꺼내기도 어려워요...

그래서 저에게 남은 길 중의 유일한 커뮤니티가 서강올빼미인데,
몇 주동안 고심하다가 염치를 불구하고 게시는 해보기로
마음 먹고 이번 글을 적어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아카데믹하지 못한 철학" 자체가
서강올빼미라는 커뮤니티에서 소화될 수 없는 맥락 밖의 주제일지라면
기타 어떠한 이유에서든 수긍하고 물러나겠으며,
이러한 반려의 여지 및 성가신 문제의 유발성을 명백히 가짐에도
양해해주신다면 저는 진심으로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래도 해보고 관두는 거랑 안 해보고 관두는 건 차이가 크니까요.
지금 글을 게시해냈다는 것만으로도
개인적으로 만족할 수 있을 낙관을 갖춰놓고 있겠습니다.

추신인데요. 진짜 철학을 학계에서 다루시는 분들 살면서 느낀 바 모두 존경 드리며,
초심자분들을 위하여
질 좋은 자료 번역해주시고
기꺼이 질문에 답해주시는 올빼미분들의 부득이한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제 가치관상 그냥 활동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외의 요약인데, 링크 게시로써 덩그러니 막대한 분량의 글만 제시하면
난처하실 수 있으시므로
의도 파악이 되실 지는 저조차도 잘 모르겠으나
일단 아래에 간단한 요약을 적어보도록 할게요...

여기까지라도 읽어주셔서 우선 감사드립니다.


밥먹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선택권을 먼저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철학 연재글 링크모음 - 인디철학 미니 갤러리 (dcinside.com)

위가 해당 글의 링크이고, 덧글 안 남겨주셔도 좋으니까 자유롭게 확인해주세요.
혹여나 반감으로 불편을 겪으실 분들께 미리 죄송합니다.


요약 [총 50편] :
○ 내용 전반을 관통하는 의의 소개 및 흐름 요약 (48, 49, 50편)

  1. 무의식-의식으로 구별되어 대중화된 개념 중 개인을 수동적이게 만드는 무의식 개념 의도적 배제

  2. 무의식-의식 중 무의식이 배제되고 남은 "의식"을 무자각-자각으로 다시 구별함.

  3. 무자각"성"-자각"성"의 워딩으로, 개별화된 단어 간 연속성 부여.
    --- 자의적 표현으로써 이같은 숨은 관계를 "맥락"으로 일컬음.
    ex) 무자각하다면 자각하게 될 수 있고, 자각한다면 무자각하게 될 수 있다.

  4. 그로써 "무의식적인 것"은, 배제되었으므로, 표현될 수 있는 것 중에서 표현되기를,
    "무자각적인 것"이 되며,
    "강하게 무의식적인 것"을 "약하게 의식적인 것"으로 바라보게 하여, 무의식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관점 변화를 유도한다.

무의식적인 것 (강하게 무의식적인 것) → 무자각적인 것 (약하게 의식적인 것)

  1. 무자각하다면, 비로소 "내가 자각해낼 수 있는 것"으로써
    개인의 능동성, 잠재성을 강조할 수 있게 된다. * 의식-전의식의 긍정 및 강조 (최종 의의)

  2. 무자각성-자각성의 맥락을 이후에 활용하기 쉽도록 모형화하고 우선 보류 (스펙트럼화)
    (1차 주제 논의 끝)

  3. (2차 주제 논의) 위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이론적 내용이 아닌가? 자각은 그렇다고 두고,
    무자각은 일상에서 어떻게 설명될 수 있겠는가?

  4. 무자각하고자 시도하면 느낌이랄 것만이 남으므로, "느낌"에 대한 내성법의 분석 시도

  5. 느낌이 없음을 느낌(종합감), 느낌이 있음을 느낌(분리감)의,
    기존의 느낌들보다도 더욱 근원적인 느낌인 "맥락감" 발굴됨

  6. 느낌을 통하여 내면적 작용은 세 가지로 분류됨
    ①느낌(필자의 발상 편의상 느낌이라고 부르게 된 "맥락감"),
    ②느낌 산물(기존의 느낌들),
    ③산물(느낌, 느낌 산물로부터 파생하는 표현적인 내면 작용)

느낌 : 구분 가능한 내면적 1차 상태
느낌 산물 : 구분 가능한 내면적 1차 상태로부터 파생하는, 그 자체로 외면화 불가한 내면적 생산품
산물 : 그 자체로 외면화 가능한 내면적 생산품 및 (이미) 외면화된 내면적 생산품

  1. 실상 맥락이란 건 설명을 위한 가상의 이론적 개념에 불과하고,
    우리의 사실(현실)에서는 "느낌의 변화"가 전부다. (맥락화, 바탕화)

  2. 느낌의 논의 전개

  3. 느낌의 논의 통하여 새로이 모형화 [1차 스펙트럼]

  4. 1차 스펙트럼 논의 및 분석

  5. 1차 스펙트럼으로부터 우선 보류해두었던,
    무자각성-자각성의 맥락 도출, 따라서 무자각성-자각성의 맥락이자,
    1차 스펙트럼과의 관계로써 2차 스펙트럼이라 명명 [2차 스펙트럼]

  6.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무자각성과 자각성의 구분법 정리
    자기 성찰법의 이론적 제고

  7. 모형 통한 세가지 응용 전개 시작 (2차 주제 논의 끝)

  8. 세계의 확장/ 갈등의 확장/ 감명의 확장 (모형을 활용한 세가지 응용법)

  9. 세계의 확장,

  • 세계진화설 홀론(holon),
    틀/보편자/원리, 틀B(개입), 틀C(인식론), 틀D(권위와 의지), 미래의 틀
    미래 예측 도식
    (철학 내 가장 급진적인 주장, 신이 있다-없다 선택할 수 있듯,
    생각만으로도 세계에 영향 끼침이 가능하다-불가하다 선택 가능,
    왜냐면 생각만으로도 세계에 영향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해보는 믿음은,
    세계의 확장 편의 "개입"에 미루어 불가하다고 두는 경우와 사실적으로 큰 차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
    따라서 미래 예측 도식에 따라, 관련한 무책임한 자기계발서류 비판) 일부 종교인 비판,
    (3차 주제 논의 끝)
  1. 갈등의 확장 (4차 주제 논의 끝)
  • 잘린 스펙트럼, 연장 등의 모형-언어적 활용 적극적 시도 후 분석 여지 찾아보기,
    맥락 개념을 맥락이라고 이름붙인 이유
  1. 감명의 확장 (5차 주제 논의 끝)
  • 원형 스펙트럼-원뿔형 스펙트럼으로 변환 후 (지금껏 내면성에 국한되었으나) 외면성의 이해 시도
    포인트, 돌출부, 비유사맥락, 기울기, 감정 분석, 무게, 예술
  1. 자투리, 철학 요약, 의의, 자기 변호 정리 끝.

핵심 : 자기 성찰, 무자각성-자각성의 맥락상 "맥락 이동" 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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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렇게 깊은 성찰을 하셔서 결실을 맺으신 것에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는 분명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일이셨으리라 생각하며, 어쩌면 보다 본격적인 철학적 사고의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철학적 전통은 다양하기에 단언은 할 수 없지만, 제 생각에 '아카데믹한 철학'의 요체란 그저 '명료하고 설득력있게 철학적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하는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학자로서의 훈련 과정에서 길러지는 것이구요.

그런 의미에서 "이론"은 모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입니다. 풀고 싶은 문제가 있고, 그 답을 내기 위해 이론이 필요한 것이죠. 이를테면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도 하나의 철학적 문제이고, 그에 대해서 여러 철학자들은 각기 다른 답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유의미한 이론이라면 '이 문제에 대한 내 답을 제외한 다른 답들은 ~~한 이유로 틀렸다'라고 설명해낼 수도 있어야 할겁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만약에 글쓴이께서 쓰신 장대한 글을 제가 '아카데믹'한 관점에서 평가하자고 한다면, 먼저

1) 이 이론으로 풀려고 하는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2) 그 문제들에 대해 이론이 제시하는 구체적 답은 무엇인가?
3) 이 이론이 문제에 대한 '오답'으로 보는 사례로는 어떤게 있는가?

같은 질문들부터 여쭤볼 것 같습니다. 먼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실마리가 어쩌면 보다 진전된 논의의 기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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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철학갤러리에서 활동할 때 얼핏 본 기억이 있네요. 일단 제 첫인상은 이 글이 철학보다는 심리학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학 쪽으로 틀고 싶으시다면,

  1. wildbunny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풀려고 하는 철학 문제가 뭔지,
  2. 영향받은 철학자, 혹은 반대하는 철학자가 누가 있는지

를 답해주시면 좀 더 "철학"에 가까운 이론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3개의 좋아요

일단 너무 늦게 올리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생각이 많이 느린 편이기도 하고
불안감 같은 걸로 집중력이 낮아지게 되면 다른 데에 신경이 팔려서 글이 자꾸 흩어져서요...
글이 안 써지고 안 읽히다보니 이 짧은 글 쓰는 데에도 생각보다도 훨씬 오래 걸리게 돼버렸습니다.

그리고 깊은 성찰과 결실, 축하라고 표현해주시는 데에서 저는 많은 고마움을 느껴서,
성급하게 적었다간 방어기제 섞인 혼탁한 글을 드리게 될까봐
그냥 시간 신경 안 쓰고 그날 그날마다 편한 마음가짐에서 조금씩 적어보기로 했던 점입니다.

답글은 다 적긴 하였는데,
이게 평가에 큰 도움이 되진 못할 유형의 답변이라고 생각은 들지만,
그냥 질문 따라 가장 진솔하게 적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늦게 드리게 된 거랑 표현에 필요한 어휘력이 약해서 우선 죄송하고,
그래도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려고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1) 이 이론으로 풀려고 하는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거룩한 데를 향해 나침반 두고 십년을 움직였다고 하였다면,
너무 멋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답변드리게 되어 부끄럽지만,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저만의 문제들이 전부였을 뿐이었습니다.
자유의지라던지, 심신 문제라던지, 신론이라느니,
아무것도 모르고 어릴 적부터 무작정 나만의 퍼즐 풀이에 몰두하였을 뿐이니까요.

나의 문제, 내가 모르는 것 없도록, 하나하나 내 힘으로 해설해보고 싶었는데요...
이 이론으로 풀려고 하는 문제"들"을 물으신다면,
저의 일상에 별안간 드러난 매일을 사색으로 풀어보려고 해왔을 뿐이다,
저녁밥 고민처럼 해와서
당시에 풀어보려고 했던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지금 와서 떠올려보기에는
기억이 불확실해요,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기에 송구스러운 점입니다.

억지로 추리하여 일일이 뽑아내었다간, 분량이 분량인만큼 무수하고요.
그래서 효율 있게,
가장 집중하였던 문제 하나만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가장 긴 세월을 쏟게 된 "나"의 문제는 내면성의 해명입니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겪으면서 오년 간은 자기 성찰만 진행해왔는데요.
모든 생각과 느낌을 비교하고 관조하고 감정이 오르면 바라보고 분석하고
말을 할 때마다 외부로 내뱉으면서 안으로는 꼭 모색하고,
중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작용, 한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정신병자라고 낙인 찍힐까봐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조용히 의식을 의식해왔습니다.
물론 본의 아니게 습관화되어버려서
내 내면에만 눈이 쏠리니 웃을 땐 어떻게 웃었어야 했더라?
걸을 땐 어떻게 걸었어야 했더라? 정신적인 과부화가 와서 소중할 학창 시절이 망가져버렸지만요...

2) 그 문제에 대해 이론이 제시하는 구체적 답은 무엇인가?

일상에 큰 지장이 있었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나의 만족에 맞게 나의 내면성을, 제대로 옮겨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답은 이것입니다.

구구절절 적어놨었는데 너무 길어져서 모든 걸 생략하고 핵심만을 요약해서 말씀드릴 때,
압축해서 위와 같은 모형이 나왔으며, 해설은 이렇습니다.

이론적인 내면성의 한계의 100%의 무자각, 100% 자각을 '극단'으로 각각 가정하고,
이 두 극단 사이의 연속성 전반이 나의 의식의 전반적 가능성의 집합이라고 취급할 때,
연속성 위의 네 가지 영역을
임의상 A, "무자각적 무자각성", B, "자각적 무자각성", C, "무자각적 자각성", D, "자각적 자각성"으로
이름 붙임으로써
나의 내면적 상태를 효율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게 됨이며,
이 네가지의 구별은 무자각적 성질과 자각적 성질 혼합의 임의적인 단계 구분으로 해석된다.
ex) 하나의 내면성에 대한 무자각 성질 97%, 자각 성질 3%
→ A, 임의적 첫 단계인 "무자각적 무자각성"으로 취급

또, "혼재 구역"이라는 이름의, 인접한 영역 간의 겹친 부위 존재로써
이곳에 나의 판단이 위치할 때, 영역 판단에 혼란을 겪을 수 있음,
즉, B, 자각적 무자각성의 판단인지, C, 무자각적 자각성의 판단인지 등의
자기 성찰상 헷갈림 또한 해명 가능케 된다.

3) 이 이론이 문제에 대한 '오답'으로 보는 사례로는 어떤게 있는가?

저는 저 내면성을 정립한 이후에, 정립된 내면성으로써
"연속성을 가지고 의식 대상의 이면에 숨은 관계"를 "맥락"이라는 표현으로 일컬어서 추출해냈는데요.
어쨌든 사람이라면 의식해야만 (의식) 대상을 파악해낼 수 있다고 내심 가정하였었기 때문에
정립된 내면성을 바탕으로 세계의 이것저것에 대입해보기 시작한 점입니다.

그래서 이후의 오년 동안 분량이 암세포마냥 증식해버렸는데요.
각설하고 누군가가 제공하는 판단 대상에 나의 맥락 혹은 각자의 맥락 잠재를 염두에 둘 때,
세상에 오답으로 볼 만한 건 많지 않다고 생각해서요.

그 무엇하나 저의 정립된 내면성에서 정답처럼 치부해볼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떤 의견일지라도 나름 일리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함부로 오답으로 취급해버리는 것에 굉장히 조심하는 편입니다.

아래의 올빼미 분께 답변드리려고 후설 선생님을 뒤적이다가, 그림을 발견했는데,
딱 이 모양새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립된 내면성을 모형으로써 편리하게 사용해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모형 및, 모형의 근간 자체가 비가시적인 "내면성", 마음이라는 것에 가시성을 부여하는
이론 그 자체이고 그로써 이론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가지기 때문에,
또, 그 탓에 모형 전반을 사실처럼 두어서 보려고 하더라도 '극단'이라는 요소 자체가 이론적 규정임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모형의 이론성'과 '극단' 개념과 관련하여
비판 대상을 끄집어낼 수 있기는 한데요.

즉, "극단적 단정에 대한 비판"이 가능해짐으로써
제 철학상의 경각심으로 과감하게 오답이랄 것을 이야기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당장의 설득력이 있고 당장의 합리성이 있을지라도
"편리"나 "전략"이라는 자각 없이,
무자각하게 변화의 잠재성을 부정하고 고집하는 모든 사례를 오답으로 취급하며,

(2) 타인 따위를 맥락 없는 존재로 단정하는,
동시에 무분별하게 한계짓는 모든 사례를 오답으로 취급한다.

이 조건에 속하지 않는 다른 사례들은
아무리 양 극단에서 상충처럼 보이더라도
포용할 수 있을 각자의 정답으로 수긍하는 편입니다.

(3) 저는 언어와 같은 '산물'이라는 것 아래에 의식 과정상 모종의 '느낌'은 필연적으로 잠재하여
우선되는 느낌부터 발굴해야 한다는 입장이므로,
기타 분석철학 쪽에서의 '언어만을 파다보면 세계를 설명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여러 철학적 견해를 들어본 중 가장 오답에 가깝게 취급하긴 하는데,
지금 분석철학이 어떤지도 잘 모르는 입장이고, 애초에 분석철학 자체를 잘 몰라서
간략히만 언급하고 생략하겠습니다.

혹여나 그, 읽어보시고 앞으로도 논의가 지지부진할 것 같다 생각 드시면
언제라도 표현해주시면, 혹은 표현해주시지 않아주시더라도 감사드리겠습니다.
제가 항상 수준이 낮은 쪽에 있었고,
서로 얘기 나누다 보면 대화끼리 어긋나니 시간만 질질 끌려서
상대방이 불편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어서요...

누군가 읽어주고 내용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는 게 목표긴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에게라도 부담을 얹어드리고 싶지는 않아서
이 답글의 답글 굳이 안 달아주셔도 좋으니 편하신대로 여겨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친절한 덧글 남겨주신 것만으로도 솔직하게 감사드립니다.

1개의 좋아요

너무 늦게 올려서 죄송해요...
좀 글 쓰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굉장히 느린 편이지만 시도가 두려우니
현실에 합리화하면서 다 써놓고도 올리기를 회피하게 되네요.
어쨌든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리고, 봐주셨다고 기억해주시는 데에서 감사드리고,
너무 이해해주시거나 반응해주시려 하지 않으셔도 되니까 답글의 답글을 남겨야 한다는
부담 없이 편하게 읽어주세요.

1. 풀려고 하는 철학 문제가 뭔지,

발상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커다란 목표는 의도하진 않았으나,
'내면성의 정립을 바탕으로 나의 세계를 설명해보기'가 주이겠습니다.

2. 영향받은 철학자, 혹은 반대하는 철학자가 누가 있는지

제가 저의 철학관이 강하게 박혀있는 걸 알기 때문에,
어떤 텍스트를 읽게 되면 제 식대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없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학부를 졸업하긴 했지만 나로부터 스스로 조작된 편견이 들어찰까봐
지금까지도 함부로 타 철학자와의 연관짓기를 강하게 자제하는 편이기도 하고
그래서 제 것이나 집중하고자 학습된 것들의 기억을 소홀히 하여 왔는데요.

스스로 저의 것, 그리고 외부의 것 간의 융화를 회피하긴 하지만,
그 경계심과 꺼리는 경향을 뚫고 들어온 동질감의 철학으로는 당시에 탐독한 바,
노자, 대승불교, 화이트헤드, 메를로퐁티, 들뢰즈 다섯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만들어온지라 철학적 유사성이 아닌,
발상 중의 영향을 제공한 철학자가 누구인가를 물음이시라면,
메를로퐁티 후기철학, 살의 존재론이 오로지 유일합니다.

위의 올빼미 분께 말씀 드렸듯이 왠만하면 포용하려는 편인데, 그럼에도 반대하는 철학자는,
켄 윌버가 유일합니다.
통찰을 제공하는 대가로 눈을 파버리고 사람을 한계짓는, 순수하게 영악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오르는데요...
거친 막말이긴 하지만, 읽으면서 유일하게 반감이 올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저의 철학에 화이트헤드와 더불어 이론적으로는 가장 유사하다는 인상이 있는데,
길을 편협한 방향으로 잘못 틀어버렸다는 희미한 기억이 있어서요.
그 외에는 딱히 반대하는 철학자는 없겠습니다.
(사실 저는 철학자라기보다는 '사상가'라는 호칭이 더 걸맞긴 하겠지만요...)

3. 여담으로 심리학으로 언급해주셔서 '아, 이거 철학으로 볼 수 없는 건가?'

철학에 가깝다고 생각해왔던 저로서 출생의 비밀 깨닫듯이 놀랐는데요.
그렇다고 심리학으로써 대학에서 배워봤을 때처럼
과학적인 성격은 없기 때문에 예전에 대학생 때 자료 봤던 기억으로
'현상학적 심리학'이 언급되던 후설이 떠올른 지라 다시 뒤적여봤습니다.

이게 두들겨 맞을 금기랄 건 알지만, 오독이면 오독인대로, 독단이면 독단인대로,
대신에 일종의 편리를 위함이 아닌
어쩌면 철학으로의 이해에 누군가에게는 도움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전략으로써 자각 한 번 하고 단편적으로만 줄줄 짜맞춰 볼게요...
(솔직히 완전 멋있게 이해해서 제 것으로 소화하고 싶긴 한데, 역량이 모자라서...
불가피한 비약과 짜맞추기에 양해를 구하겠으며, 스스로는 여론의 구타를 각오하겠습니다.)

우리는 '심리적 체험에 내재된 본질형식'을 기술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내재된 본질형식'을 기술할 수 있습니다. 라는 인용을
오징어라는 유튜브에서 보았는데요.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YouTube : 오징어의 철학노트

내면성을 모형으로 끄집어내고, (: 심리적 체험에 내재된 본질형식의 기술)
그것으로부터 위의 답글서 언급하였던 맥락이라는 관계를 추출하여,
혹은 내면성 그 자체로 세계를 설명해보려는 방법이 (: 세계에 내재된 본질형식의 기술)
위의 인용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제시해 봅니다.
(본질형식이 비슷하긴 한 건가조차도 정확하게 감 잡기는 어렵겠지만
탈출구를 찾아 일단 들이박아보는 성급한 사람처럼 앞으로도 비약해보겠습니다.)

또, 후설 선생님처럼 저의 것이
'현상학적 심리학'에서 '초월론적 현상학'의 철학으로 옮겨가는 모양새라면
심리학보다는 철학으로 이야기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또, 조심스럽게 제시해보겠습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잘못 영향 받을까 외부에 폐쇄적이되
저의 어떠한 내부의 맹신도 병적으로 배제하려는 경향으로
메타적 사고를 일구어왔어서 에포케로의 무편견성도 보장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동시에 물론 후설의 유고 정리로 입장이 종결되어봐야 알겠지만
드러나있는 후설의 현상학만큼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께 숱한 비판을 받았다고 접했는데요.
누구에게나 보편적일 이성의 모습을 이야기함에 기인하여서 비판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차이와 다원성을 수용하기 어려운 지점에서...?

후설과 포스트모더니즘 1 / 유럽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 - YouTube : 예도 TV
후설과 포스트모더니즘 2 / 생활세계와 초월론적 주관성 - YouTube :예도 TV

근데 저는 의식을 저만의 정립된 내면성인, "맥락"이라는 개념으로 전환해서
맥락 내 하나의 상태,
전반의 가능성 중 하나의 가능성으써 보편적이지 않은, 무수하고 다양한 상태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기 때문에,
(또, 들뢰즈를 철학적 유사성이 있다고 판단하던 데에서)
사실상 개인들에게
어떠한 보편적 이성이 적용되는 한 가지의 경우만을 전제할 수 없다고 당연스럽게 주장하고요.

아무리 너가 변호하더라도 위에 모형 그린대로 사람들이 모두,
저 윗답글의 모형을 보편적 기계마냥 내재한다는 것으로써 일종의 보편성을 전제하는 게 아니냐?
(너도 이 모형, 너도 이 모형, 쟤도 이 모형, 나도 이 모형이 내재된 칩 박힌 기계마냥)

이렇게 반문하실 수도 있으시겠는데요.

다시 변호하자면
저 모형은 이론적 가정이 들어가야만 이해될 수 있는 모형이기 때문에
모형, 정립된 내면성 이것 자체가 보편적 사실이 아닌
보편성을 상정하는 '이론' 그 자체일 뿐이며,

저는 이론적 논의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느낌의 논의'라는 파트에서,
정립된 내면성의 모형을 일상적인 "느낌"으로 축소하여 바라보는 것으로써
"내면성 모형"을 이론의 사실적 가능성 및
사실 해석에 대한 편리성만으로만 선 긋고 검토해보는 과정을 거칩니다.
나아가 결국에 우리에겐 "무수하게 변화하는 느낌"만이 있다고 결론내고요.
(즉, 내면성 모형은 이론적인 상태집합에 불과하며, 내가 겪는 현재의 느낌만이 사실적인 상태이다.)

아무튼 이로써 후설류의 현상학이 가지는 난점을 극복하고
포스트모더니즘과도 성공적으로 결합시켜 하나로 볼 수 있게 어울려 놓는다면,
다시 구조조의로 돌아가버리는 거 아니냐? 이건 개인적으로 든 문제인데,
예컨대 탈구조화 하여, 보편적 이성(?)의 주입으로부터 비로소 멀어지게 되었는데,
어쨌든 어떠한 구조, 저의 표현으로 숨은 관계인 맥락의 잠재를 "이론적으로라도" 긍정하고
그것으로 세계의 이것저것을 설명해보려하는 시도는
개인, 개인들을 모종의 구조에 재종속시키는 나쁜 회귀 아니냐?
포스트모더니즘에, 너 같은 그런 방식으로 결합해봐야 역행 아니냐?

누군가 이렇게 물어보실 수도 있으실 텐데(라고 혼자 생각해볼 때),
족쇄마냥 종속시키는 무의식 개념을 배제해버리고
남아 있는 의식만을 무자각과 자각이라는 영역으로 쪼개버려서,
아주아주 약한 '의식'에서부터 아주아주 강한 '의식'의 연속성만을
다루기 때문에,

내가 무자각하다면, 자각하면 되는 것이고, 내가 자각한 것으로는 무자각에 영향 미치고자 할 수 있는,
자주적인 능동성을 개인에게 적극적으로 부여함으로
오히려 구조를 두지만서도 큰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생각해서요...
내가 강해지니까요.

그래서 나의 밑, 암울하게 "무의식적 구조"라고 여기던 걸 "무자각적 구조"로 취급해서,
내가 구조에 박혀있다면
그저 박혀있는대로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박혀있다는 걸 내가 자각해서 무자각적 박힘을 개량해내는 그런 과정을
긍정해보고 싶었어요. 탈주체의 흐름에서 주체를 건져낸다?
각자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복원하여서요.
(사실 주체 개념을 다양한 레퍼런스에 기인해서 스스로 정의내려볼 수 있지 못할 정도로
필자는 철학적 역량이 모자람.)

애초에 이론이라고는 두지만,
이론적인 논의에서조차도 저게 고정된 형태가 아니고
조건만 갖춘다면 기본 모형이 스펙트럼의 막대기 형태인데,
잘랐다가 늘려봤다가 접었다가,
삼각형으로 이어봤다가, 원이었다가 원뿔이었다가, 사분면으로도 바꿀 수 있고,
개인마다, 혹은 설명의 필요에 따라
입맛 맞게 변형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고 있는 형태로 뒀고 관련하여서도
논의를 파트 쪼개서 심화하여 다뤄놨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라도
유연하지 못한 보편성의 정적주의를 상정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첨언합니다.

(상태집합을 이야기한대도, 상태집합 또한 각자에게 다양하다.
모두에게 얼굴이 있다고는 하지만 각자의 외모가 있듯이)
(사실 보편성도, 정적주의도 철학적으로 뭔지 제대로 모름.)

4. 요약

  1. 후설의 현상학적 심리학 → 초월론적 현상학으로써
    '현상학적 심리학'을 바탕한 철학의 일종이라고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요?
  2. (얕게) 살펴봤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이 후설론에 가하는 비판이
    저의 것에게는 치명적이지 않아 보이므로, 후설의 현상학적 논의를 계승하면서도
    후설 현상학에 비판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을 조화시켜볼 수 있을 지도...
  3. 조화 가능하여 조화시켰을 때 새로운 구조 고려로의 시대 역행 우려는,
    개인을 구조로부터 능동적인 대상으로 긍정하는 저의 이론의 특징상
    크게 문제는 안 될 것 같기도 하고요..
  4. 저의 철학을 탈주체 흐름의 강에서 주체를 다시 견져낼 수 있는
    실마리 쯤으로 여겨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사견입니다. 비유하면, 마냥 주체를 익사시키지 말고 그 강에서 물놀이 할 수 있도록?
    물론 삐끗하면 다같이 떠내려갈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던지는 구조주의의 위험성을 마냥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5. 그런 바 최종적으로 돌이켜보자면,
    인간(개인)의 수동성과 자기 상태의 고착을 정당화하는
    무의식 개념의 '범용'을 비판하고 구식화시키는 게, 철학적인 목표가 될 수 있겠습니다.
    대안은 무자각성-자각성의 맥락이라는 저만의 개념에 의하는... 네...

물어보지도 않은 걸 구구절절 멋대로 적고 비전문가가 전문성을 빌려서 자기만의 의의를 끌어내는 게
제 가치관에 반하기에 수치감이 강하긴 한데요... 그래도 목표라고 한다면
어떤 철학적 목표라기 보다는, 단 한 명에게라도 내용을 이해받겠다는 목표로 임해왔었기 때문에
부실한 가판대라도 세워보려는 어리숙한 시도로써 참작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이게... 오랜 시간 겪어온 입장에서 수준 높은 분과 수준 낮은 저같은 사람이 대화하다보면
맞물리지 못하는 톱니바퀴가 끝을 모르고 돌아가는마냥 진전 없이 끌린다는 걸 많이 겪어봤기 때문에
또다른 분들께는 또다른 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아서,
나쁜 말일지라도 정신 빨랑 차리게, 흉터 남게 지져주시고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손대기도 어려울 정도로 단어의 오남용이 들어차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가령 학술적으로 이렇게 쓰이는 용어가 아닌데, 멋대로 남발하여 불쾌를 겪게 하는 등.)

이 글도 일주일 전에 정돈해놓고, 취준 시작하다보니 의욕이 많이 죽어버린데다가
이런 커뮤에 올리는게 좀 무서워서 회피성도 어느 정도 있었고
올릴까말까 하다가? 그래도 나중에 아쉽게 될까봐 올려놓는거라...
그냥 편하신대로 관심 안 주시면 관심 안주시는대로 현생에 집중하는 계기 삼을게요... :pleading_face:...

다시 한 번 관심 주셨던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을 읽어주신 다른 분들께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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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감사합니다.

@yhk9297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해주신 문제 및 생각은 심리학의 영역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물론 철학과 심리학이 반드시 상호배제적인 것은 아닙니다만 ...

저의 관점에서 얘기하자면 말씀해주신 내용 같은 경우에는 내면에 대한 관조도 좋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보다 실증적인 심리학적 실험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심리학사를 살펴볼 때, 스스로의 마음을 성찰하는 내성법(introspection)은 그 신빙성이 종종 의심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오답'을 여쭤본 것은 사실 말씀해주신 입장의 테두리를 헤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내 이론은 ~~가 아니다'라는 단서는 그 이론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해주신 오답들은 조금 층위가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유를 해보자면,

A: 어떤 맛을 좋아하시나요?
B: 저는 심오한 맛을 좋아합니다.
A: (음 ... 그게 무슨 뜻일까) 그럼 싫어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B: 저는 라면이나 전골을 싫어합니다.
A: (아, 아마도 짜고 맵고 기름진 맛은 '심오한' 맛에 속하지 않나보다.)

같은 과정을 통해 한 사람의 입장을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층위가 다른' 대답을 들을 경우엔

A: 어떤 맛을 좋아하시나요?
B: 저는 심오한 맛을 좋아합니다.
A: (음 ... 그게 무슨 뜻일까) 그럼 싫어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B: 저는 어느 한 맛이 옳다고 단정하는 독단적인 태도를 싫어합니다.
A: (음...)

입장을 헤아리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저는 정확히 어떤 입장을 제시하시려는건지 파악하는데 여전히 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관점이고, 철학사적 전통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대답도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이런 일련의 과정이 삶에 의미있는 순간이 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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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dbunny 님이 언급해주셔서 다시 오게 됐네요. 저도 많이 부족하지만, 철학을 계속 하시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1. 글은 간결하게 쓰는 게 좋습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굉장히 긴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후설 같은 사람들의 글을 보면 긴 문장들이 많겠지만, 21세기 철학은 간결한 문체를 선호합니다. 또한 읽는 사람들도 긴 문장 하나보다는 짧은 문장 두 세개를 읽는 것을 더 선호할 겁니다.

  2. 불필요한 내용은 담지 않는 게 좋습니다. 한 문장 안에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불필요한 내용들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철학에서는 독자가 굉장히 게으르다고 생각하고 쓰라고 합니다. 철학 독자들은 불필요한 내용들을 다 읽을만한 끈기가 없습니다.

  3. charitability 입니다. 한국어로는 번역이 이상하게 되는 것 같아 따로 설명을 하자면, 한 사람의 주장에 반박을 하더라도, 그 주장을 먼저 굉장히 파워풀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 반박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 글들이 심리학처럼 느껴진다는 반박이 있다면, 자신의 글이 심리학 같다라는 주장을 먼저 신빙성 있게 만든 후 반박을 해야합니다. 하지만 답글에서 제가 느낀 바로는 "내 글이 어떻게 심리학일까?" 가 아닌 "내 글이 어떻게 심리학이 아닐까? 심리학이 아닌 부분이 있을까?" 라는 생각의 흐름이 주를 이뤘던 것 같습니다.

  4. 풀려고 하는 철학적 문제를 명료하고 쉽게 설명하실 수 있는 게 좋습니다. 전 좋은 철학 이론이 나오기 위해서는 똑똑한 이공계생 앉혀두고 어느 정도는 이해를 시킬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 입에서 "오... 이런 질문들을 답하는 거네?" 까진 나올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철학적 목표를 "인간 (개인)의 수동성과 자기 상태의 고착을 정당화하는 무의식 개념의 '범용'을 비판하고 구식화시키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일단 "인간의 수동성," "자기 상태의 고착," "무의식 개념" "범용," "구식화" 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캡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동성이란 뭔가요? 흔히 말하는 결정장애면 수동적인건가요? 아니면 뉴튼 역학처럼 자신의 움직임이 외적 요소에 의해 다 결정되는 것인가요? 또, 무의식 개념이 수동성을 정당화한다고 하셨는데, 수동성이 정당화된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본질이 수동적이다라는 문장이 참이라고 정당화 시키는 것인지, 인간은 수동적인 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등등, "수동성의 정당화" 라는 프레이즈 안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 철학 글쓰기 가이드 어딘가에서 봤던 설명인데, 자신의 글이 초등학교 3학년에게 가르치는 것 같이 읽힌다면 잘하고 있는 거라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Lewis - Elusive Knowledge 가 굉장히 그걸 잘 따르는 것 같습니다.

전 후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최대한 전반적인 철학에 도움이 되는 말들을 적어봤습니다.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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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퐁티에 영향 받은 단단한 세계관이 아니고 단단한 정신병이라면은 심히 우려 받을 내용이겠으므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검증 안 된 저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합니다. 무엇이 철학인지도 모르고, 누구라도 이해시킬 수 없다면, 당장에 드러난 내용물로 사상가라고 불릴 수 있을지언정 그 앞의 수식은, 철학자로의 사상가가 아닌, 정신병자로의 사상가의 네이밍이 차라리 적합할 테니 말이지요. 당장이고 앞으로이고, 이러한 반성은 꼭 손에 쥔 채로 살아갈 저이겠지만, 그럼에도 편견 없는 존중을 보여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학계로의 진입은, 부족한 가정형편이니, 학계비판이니, 해보려는 의지 없이 온갖 이유의 조작을 덧붙여가며 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 드릴 수도 있겠지만요. 진솔하게는, 저는 저만의 발상을 '재미'만을 동력으로 오래간 매진해온 사람이라 재미가 중요한데요. 학술활동에 그만한 흥미를 못 찾았습니다. '배우기'나 '읽기'는 어찌저찌 재밌는데, '쓰기'가 고역이더라고요... '못 참겠다' 수준의 재미 없음이라서, 아무리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활동일지라도 그냥 딱 이 정도의 남들 몰래 하는 취미 수준에서 머무르고자 합니다.

그리고 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재생산 될 수 있을 지도 스스로 회의적입니다. 다 해놓고 살펴보니, 제 입장에서는 대단해보였던 통찰들, 배우고 배울 때마다 기존의 철학자들이 땅따먹기 하듯이 자비없게 쓸어가더라고요...

모래성처럼 보이지도 않고 이제는 내가 했다는 깃발만 꽂혀있는 안타까운 모양새인데, 이걸 내놓아봐야 "오, 재밌는 이야기네요."가 아니라, "음, 이건 이미 논의되었던 이야기군요."로써 상호적 놀이가 아닌 학술적으로 무의미하게 일방적 발골이나 당할 가능성이 높아 보여서, 애초에 발골 당하러 온 입장이니, 재미 없음을 감수하고 높아 보이는 저곳까지 나아가야할까에도 회의적인 입장이겠습니다.

뭐... 그래도 새로 올라온 아래의 답글들까지도 찬찬히 읽어보니, 저는 누군가에게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피드백을 요청하고 받아볼 수준도 안 되네요... 자기 계발의 밑거름 삼겠습니다. 책 많이 읽는다던지, 다양한 글을 써본다던지 향후에 많이많이 해볼 수 있을 테니까요. 발상의 정리도 끝냈겠다, 나의 생각을 명료하게 말할 수 있도록 연구하고 연습하겠습니다. 다들 이상한 사람한테 시간 써주셔서 진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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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n9870980 님께 드린 답글을 주로 삼되, 다른 분들께는 여담처럼 답변 드려보겠습니다.

이제 다시 과감함을 버리고 겸손으로 돌아와서 얘기드리면, 네... 내성법이란 점이 가장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나만의 ~'로써 객관적인 그 어디에 등을 기댈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사실 '믿거나 말거나'인 점이라서요. 따라서 나중에라도 저의 것에 흥미가 일으시는 분들께서는 흥미로만 여겨주셨으면, 하고 권장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wildbunny 님의 의도를 짐작은 하였었는데요... 의도를 눈치 채더라도, 의도를 해소 시켜드릴 답변을 드릴 수 없다는 점에 전전긍긍 했으나, 그냥 솔직하게 적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wildbunny 님의 재밌고 직관적인 비유로 예시 들어보자면, 제 식대로 이런 대화이겠습니다.

A: 어떤 요리를 만드셨나요?
B: 저는 이런 요리를 만들었어요.
A: (음 ... 그게 무슨 맛일까) 그럼 '오답' 같이 싫어하시는 요리 있으신가요?
[이 요리는 아니다 싶은, 그런 요리?]

B: (큰일 났네. 무슨 요리인지 궁금해하시는 것 같은데,
그대로 말씀드리기에는 삼천포로 빠질 텐데... 그렇지만 솔직하게 답변 드려봐야겠다.)

B: 딱히 가려 먹지는 않아요. 나에게 못 만든 요리라고 생각드는 것조차
'싫어하면서' 그렇게 만들어선 안 된다, 말할 자격은 저에게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오답'인 것마냥 안 좋은 맛이 나더라도,
'특별하게 맛있음', '새로움'으로써 나름, '약하게 좋은 음식'으로 여기고 먹을 수는 있어요.
저는 요리에 정답/오답은 없다고 생각해요. 제 요리에도 이 신념을 담았고요.

그렇지만 저의 요리가 무슨 요리인지, 그 자체를 궁금해하시는 것 같으니
그 질문의 의도만을 헤아려서
비교하시기 편하도록(?)
과감하게, 정답/오답의 구별이 있다고 생각하고 말씀 드려보자면,

제가 그 요리의 맛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무관계하게,
자기 요리를 깊게 음미해보지도 않고, 요리의 맛을 규정하여 내어놓았다면,
그 요리는 제가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예컨대 이 음식은 무조건 맛있어요. 슬로건 내걸고, '맛 없을 수 있음'을 고려 않은 채,
불충분한 자기 반성으로 내어놓는 식당.
무작정 다른 음식점과 비교하여 나의 음식을 치켜 세우는 식당.

또, 이런 의미에서 그 요리를 먹을 타인의 다양한 선호를 생각 않는 거니,
상대방에 대한 고려가 없는 요리로써도, 저는 싫다고 말해볼 수 있겠네요.
요리를 먹게 되는 저를 고려 안 하고, 무책임하게 내어놓는 거니까요.

아, 그리고그리고.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래도 가장 먹기 버거웠던 요리를 오답처럼 꼽아보자면,
예전에 분석철학자의 요리를 먹은 적이 있는데,
그건 좀 많이 저랑 안 맞더라고요.

근데 요리를 만든 그 사람이 진짜 분석철학자인지도 가물가물하고,
애초에 분석철학 요리, 저는 잘 모르니까 잘못 말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이 정도만 언급하고 끝낼게용.

A : 음...
(역시나 삼천포로 빠지게 되었다.)

네... 그, 이제 목표를 개인적인 자기 발전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더이상 이해를 바라고 쓰는 비유는 아니었고, 그냥 들어주신 비유가 재밌어보여서
그림 따라그리듯이 줄줄 적어본 거니까 심심풀이로만
읽어주세요. 각설하구, 삶의 의미있는 순간을 만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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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4 에 공감합니다. 독자가 굉장히 게으르다고 생각하고 쓰라고 말씀해주셨는데요. 필자가 굉장히 게으르기 때문에 1, 2, 4의 문제가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특히 1, 2의 문제는 인지를 어렴풋이 하고는 있었는데, 마구잡이로 적게 되었습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경계하겠습니다. 다른 분들께도 죄송합니다...

4는 패키징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이삿짐을 싸거나, 마트에서 장을 보고 박스에 물건을 담게 될 때, 예쁘게 압축해서 담으면 성취감이 있잖아요? 근데 나만 쓸 상자가 아니고, '전달할 상자'를 나의 성취감에만 맞게 언어로 칭칭 포장해놓으니, 전달받은 사람은 짐 꺼내는 방법을 궁리하느라 애를 먹게 되는 상황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상자에 많은 내용물을 얼기설기 제멋대로 압축해놔서요. 이게 정말 제가 인지를 못하고 있던 항목인데, 앞으로는 진짜 조심하겠습니다. 앞으로는 남에게 설명해주는 글에서조차 괜히 내용 압축 재밌다고, 혼자 해놓고 뿌듯해하지 않겠습니다.

풀어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개인)의 수동성과 자기 상태의 고착을 정당화하는
무의식 개념의 범용을 비판하고 구식화시키는 게 철학적 목표이다.

  1. 자꾸 무의식이란 말 남용하면서 자기합리화하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ex) '무의식적'으로 하게 된다. / '무의식'에 박힌, 그런 사람들은 바뀔 수 없다.

  2. 자기합리화 함부로 하지 마세요. [약한 의식은, 강한 의식으로 끌어올릴 여지가 있으므로.]

  3. 무의식이란 말 자체를 낡은 개념으로 밀어버리고 새롭게 규정하겠습니다.

구구절절 길어지고 철회될 주장일 수 있으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어쨌든 어렵게 포장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3 역시 자기 변호에만 급급한 게 드러났고, 상대방의 고려가 없었습니다. 반성하겠습니다.
별개로 스킬로 만드는 영역은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전수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꼭 염두에 둘게요.

특히 주신 말씀 중에 3, 4 가 생전 처음 보는 조언이어서, 진짜 새겨듣겠습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에 보답드릴 수 있도록 스스로 경계 잘 하고 있을게요.
부족한 사람 계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저지만 조언이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입니다.

성심성의껏 답변을 주셨기에 또 피드백을 드리자면,

  1. "자꾸 무의식이란 말 남용..." 이라고 하셨는데, 누군가가 "무의식"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였을 때, 그것이 잘못된 걸 알면서도 그저 무의식적이다 라며 정당화한다는 것 맞을까요? 예를 들어, 전 학창 시절에 무의식적으로 말하면서 사람을 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친구가 그만 치라고 지적했을 때 전 "무의식적인 것이다" 라며 정당화를 하였죠. 그런 의미에서 무의식을 남용하면서 정당화한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2. 주장의 순서가 다음과 같이 되야할 것 같습니다:
    전제 1: 사람들은 무의식이란 말을 남용하면서 합리화를 한다.
    전제 2: 무의식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겠다.
    결론: 사람들은 무의식이란 개념을 잘못 쓰고 있다. 결국 자기합리화를 하면 안 된다.

하지만 만일 이 순서대로 가져가게 된다면, 결국 글쓴이님이 풀려고 하는 문제는 "자기합리화를 하면 안 되는가?" 라는 질문으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제가 보기에는 이 사이트에서 추구하는 "철학"의 개념과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인생철학 등에 더 걸맞는 것 같습니다.

만일 주장을 원래 순서대로 가져가 무의식을 새롭게 규정하는 것을 목표로 둔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어떻게 철학적인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무의식을 새롭게 규정하려는 프로이드도 철학이라고 보긴 어렵죠. 물론 프로이드의 이론으로부터 철학적인 의미를 끄집어낼 순 있겠지만, 새로운 무의식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철학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일 글쓴이님의 이론이 철학이어야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어떤 철학 문제를 풀게 해주는지를 설명해주셔야할 것 같습니다.

  1. 무의식이란 말 자체를 왜 낡은 개념으로 밀어버려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프로이드 무의식을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닌 것 같으니 일반적인 무의식으로만 말하겠습니다). 첫번째로는, 무의식의 증거가 너무 많습니다. 전 앉아서 이걸 타이핑을 하고 있지만, 전 제 발에 느껴지는 양말을 의식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세가 불편해 고쳐앉았는데,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하였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다 부정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두번째로는, 현재 무의식의 개념에서 오류가 찾아지지 않습니다. 어떤 오류가 있고, 그 이론으로 설명이 안 되는 무언가가 있어야 새로운 규정을 찾아낼 이유가 있는데, 왜 기존 무의식을 폐기하려고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 철학에 재능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반박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자신이 있는 내용이더라도, 그것에 대한 반박이 들어왔을 때 그것을 진지하게 검토해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확신을 갖고 있던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일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죠. 대부분의 철학 학부 전공생, 심지어 꽤 많은 탑스쿨 석사생들도 그런 재능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뚜렷한 한계가 있고, 절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신기하게도, 그런 사람은 탑스쿨 박사 중에선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글쓴이님은 반박을 적극적으로 수용을 하시는 것으로 보아, 철학이 좋아할 부류의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제 부족한 견해에서 그렇다는 것이니, 가볍게만 받아들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