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눈팅을 하다가 글을 올려보네요. 최근 @YOUN 님이 메타존재론에 관한 스레드를 종종 작성해주셔서, 물살을 타고(?) 한 마디 덧붙여 봅니다. 이하에서 소개될 저의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개념 상대성 (또는 양화사 변이) 논제는 (비트겐슈타인적 의미에서) 그림의 다수성에 관한 주장이다.
1. 배경
이야기는 퍼트남의 논문, “Truth and Convention”에서 시작됩니다. 그는 ‘도식 하에서의 진리’ 개념이 부조리하다는 데이빗슨의 견해에 맞서 ‘개념 상대성’ 논제를 역설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서로 다른 규약이 (경험적으로) 동치이면서 (외견상) 불일치하는 존재 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부분론적 공허주의자가 단 세 개의 단순자만이 존재한다고 기술하는 상황은, 부분론적 보편주의자의 틀 하에서 총 일곱 개의 단순자가 존재한다고 기술하는 상황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이 견해는 이후 제니퍼 케이스를 통해 ‘자연어 표현 “존재하다”는 중의적일 수 있다’라는 논제로 명료화되었고, 조금 지나 엘리 허쉬를 통해 양화사 변이, 즉 추론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동일한 기능을 하면서도 서로 다른 양화 방식을 취하는 (단일한) 양화사를 갖는 서로 다른 두 언어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재정식화되었습니다.
이 견해는 통상 콰인주의 메타존재론에 반대되는 입장으로 여겨집니다. 클래식한 콰인주의에 있어 존재론적 개입이란 어떤 부류의 대상이 양화 도메인에 있는 것으로 선제될 때 일어나는데, 이 입장과 더불어 존재론이 모종의 (과학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면 존재론자들의 언어는 단일한 양화 방식을 갖는 것으로 상정될 만하기 때문에 그렇겠죠.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콰인주의자들은 양화사 변이 논제에 대한 형식 상의 모순 같은 것을 찾지는 않는 편입니다. 대신 유명한 반론은 신프레게주의자들에서 나왔습니다. Hale and Wright가 대표적인 저작이고, 이들은 추론적으로 동일한 기능을 하는 두 논리적 표현은 하나로 붕괴될 수 있다는 이른바 ‘붕괴 논증’을 통해 이 점을 논증합니다. (하지만 이후의 연구들을 통해 이 논증은 부당한 논증임이 발견되었습니다.)
붕괴 논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양화사 변이 논제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한동안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구문론적인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양화사 변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해석은 특정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더 큰 도메인을 갖는 경우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는 이른바 루이스의 ‘제약된 양화사’ 현상을 통해 설명될 수 있어 보이는데, 양화사 변이 이론가들에 따르면 그들이 주장하는 건 이런 경우와는 다른 경우라는 것이었거든요.
2. 도메인의 문제
그래서 도메인이 문제가 됩니다. 제약된 양화사 견해가 양화사 변이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조금 더 부연해 봅시다. 양화사 제약이란, 발화 맥락에 따라 양화사가 제약된 도메인만을 갖는 경우를 말합니다. ‘맥주가 하나도 없네’라고 냉장고를 보며 말할 때, 저는 말 그대로 세계에 어떠한 맥주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양화 범위를 저와 물리적을로 유관한 곳만으로 제한한 뒤, 그 영역 안에 맥주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죠.이는 양화사 변이를 올바르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결국에는 제약되지 않은 가장 큰 도메인이 선제되어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바로 그 가장 큰 범위를 도메인으로 갖는 단일한 양화사가 우리의 궁극적인 양화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죠. 제약된 양화사의 다수성을 이야기한다면 양화사 변이는 그다지 충격적인 주장도 아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점은, 결국 양화사 변이가 도메인 선택의 문제와 유관하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이는 최근의 연구들에서 지적되어 온 바이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의 도메인이 궁극적으로는 단일하다면, 어떻든 간에 바로 그 도메인을 대상으로 갖는 양화사가 우리의 궁극적 양화사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양화사로 모든 양화사 변이형(variants)을 붕괴시킬 수 있겠고, 따라서 양화사 변이 논제는 무마될 것이겠죠.
문제는 ‘도메인을 선택한다’라는 관념이 상당히 이상해보인다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 사물들을 대상으로 하는 우리의 양화 언어가 상정하는 도메인은 바로 그 사물들의 클래스인 것 같거든요. 세계가 고정되어 있다면 이 클래스 역시 고정되어 있겠고, 그렇다면 결국 모든 양화사는 이 클래스를 도메인으로 갖는 하나의 양화사로 붕괴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3. 무엇이 선택되는가?
그래서 제게는, ‘무엇이 선택되는가?’, 즉 양화사 변이 이론가들이 어떤 부류의 클래스를 도메인으로 간주하는지가 중요한 문제로 보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양화사 변이 이론가와 그 논적들 사이의 깊은 오해의 뿌리라고도 생각합니다.저는 ‘비구조적 사실’에 관한 허쉬의 다음 언급에서 힌트를 찾습니다:
3. The truth of any (contingent) statement in any language depends on what the facts are in the world.
… If claim 3 is understood in terms of unstructured facts it does not conflict at all with quantifier variance.
여기에서 허쉬의 해명은 다음을 의도합니다. 만약 우리가 상정하는 ‘세계’가 사물과 그들의 관계로 구조화되어 있다면, 양화사 변이는 반실재론적 관점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양화사 변이는 실재론적 관점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허쉬가 양화 도메인에 생생한 사물들이 포함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해명은 상당히 이상한 것이 될 것입니다. 세계에는 이미 사물들이 있고, 바로 그 사물들을 포함하는 클래스가 있는 것이라면, 세계란 사물들로 이루어져셔 그 세계에서의 모든 비구조적 사실들은 구조적 사실들로도 기술될 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아마도, 바로 이 점이 양화사 변이의 논적들이 상정하는 바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쉬가 염두에 두는 바란 무엇인가? 제 해석은, 허쉬는 암암리에 다음과 같은 삼중적 구조를 상정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언어가 있고, 그 언어에서의 문장들을 참이게 만드는 세계가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논적들과 동일합니다.) 그리고, 그 언어에 포함된 이름들의 지칭, 그리고 양화 표현들의 도메인을 제공하는 별도의 논리적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논리학 교과서에서 상정하는 그런 모델 말입니다.) 이 모델이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이른바 ‘그림’에 상응하는 그런 것이 되겠죠.
이렇게 생각을 하면 양화사 변이 논제는 다음과 같은 견해로 생각되어야 할 것입니다. (i) 우리는 우리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논리적 모형을 갖는다; (ii) 우리의 논리적 모형은, 우리 세계에 대해 모든 참인 문장들을 또한 참이게 하는 그러한 모형이다; (iii) 우리 언어의 양화 장치들은, 우리의 논리적 모형이 갖는 도메인을 대상으로 한다.
4. 사족 (1): 퍼트남의 경우
위와 같은 이해가 양화사 변이에 대한 최종적인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언뜻 이상해 보일 수가 있습니다. 양화사 변이 논제는 기본적으로 퍼트남의 개념 상대성 논제에 대한 정교화인데, 반표상주의자 퍼트남의 견해가 일견 표상주의적으로 보이는 위와 같은 견해로 정리되어서는 안 될 것 같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는 (허쉬가 자신을 ‘퍼트남 주석가’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차치해도) 이 점이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퍼트남의 반표상주의는 기본적으로 언어와 세계 사이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왜 문제가 되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이른바 ‘모델론적 논변’은, 우리 언어의 문장들을 모두 참이게 하는 모델이 다수 있을 수 있다는 점으로부터 표상주의가 회의론에 빠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언어의 문장들이 세계와 언어 사용자의 관계로부터 참이거나 거짓이게 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반표상주의적 결론이었지요.
그런데 이 결론은 위에서 제안한 삼중적 구조와 충돌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구조를 선제한다고 볼 법합니다. 세계가 그 모델이 포함하는 것들과 분리되지 않는다면 (이게 사실 ‘모델’의 당초 의미이기도 하죠) 모델의 복수 존재 가능성이 가하는 위협은 그의 직접적 실재론을 통해 무마되지 않을 것이거든요. 실제로 퍼트남은 직접적 실재론 이후에도 모델론적 논변을 불건전하거나 부당한 논변으로 치부하지 않은 것 같고요. 단지 그는, 문장들의 참이 모델을 통해 보증된다는 바로 그 견해에만 지속적으로 공격을 가하고 있거든요.
한편 직접적 실재론으로의 전회에도 불구하고 퍼트남은 개념 상대성을 지속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이 점은 퍼트남이 (허쉬가 선제한다고 제가 해설한) 삼중적 구조를 여전히 갖고 있다는 이해를 가능하게 합니다. 만일 퍼트남이 ‘언어적 표현 일반은 세계에 직접적으로 의미를 갖고, 그 외의 모델같은 것은 없다!’라고 생각했다면 개념 상대성 논제는 진즉 미친 견해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퍼트남이 아주 비합리적이었던 것이 아니고서야, 그의 후기 견해에는 여전히 삼중적 구조가 상정되어 있었어야 했을 겁니다.
5. 사족 (2): 콰인-카르납 분기 재고
그리고 어쩌면 이 지점이 콰인적 직관과 카르납적 직관을 가르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기도 합니다. 콰인의 의미 미결정성 논변과 퍼트남의 모델론적 논변이 모두 뢰벤하임 정리로부터 영감을 받았음에도 두 논변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콰인의 논변은 언어적 표현과 세계(의 부분) 사이의 관계가 미결정적이라는 데에로 곧장 향하고 퍼트남의 논변은 (제 이해가 맞다면) 언어와 모델 사이의 관계가 미결정적이라는 데에서 멈추거든요.왜 이런 차이가 났는가? 다시 한번, 제 이해가 맞다면, 이건 콰인적 직관의 소유자들이 ‘모델’, ‘논리적 그림’, ‘논리적 공간’ 따위로 불릴 수 있을 만한 개념적 장치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는, 많은 모델들 중 꼭 세계와 같은 모델이 바로 이 세계와 동일하다는 그런 직관을 갖기 때문인가 싶기도 합니다. 만일 모델들이 고려되어 있어서 그것이 세계와 분리된 무엇으로 이해된다면 의미론적 미결정성 논변이 성립할 여지가 있는지 제게는 분명하지 못합니다.
반면 제게 분명한 것은, 삼중적 구조에 대한 직관이 맞다는 겁니다. 주장을 참이게 하거나 거짓이게 하는 것은 세계이더라도 그 세계를 자르고 조직화하는 것은 그 세계와 분리된, 논리적, 개념적 장치여야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생각할 때 비로소 풀릴 수 있는 여러 고질적인 철학적 문제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또한 갖고 있는데, 이미 뻘소리를 많이 했으니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아직 정리 중인 생각을 휘리릭 적은 것이어서 좀 난삽하게 되었네요. 흥미롭게 느껴지시는 부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철학 여정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