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쇄의 시대: 베너타의 논증에 대한 단상

원문: 르네상스 플레이스 : 네이버 블로그

개인적인 단상을 적어내려간 글을, 용기를 내어 여기에도 올려봅니다.

언젠가부터 '팩트폭력'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ㅇㄱㄹㅇㅂㅂㅂㄱ(이거 리얼 반박 불가)
빼박캔트(빼도박도 못하게 반박 불가)
가불기(반박불가 기술)
몰?루
반박시 니 말이 맞음
억까(억지로 까임-억지로 비판함)라는 말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2.
이러한 밈-유행어들의 공통점은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그것에 대해 질문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버린다는 것이다. 논리학의 용어로는 이를 '원천봉쇄의 오류'라고 한다. 여기에서 이름을 따 이러한 발언이 밈과 유행으로 번지는 오늘날을 '봉쇄의 시대'라고 하자.

2.1.
반박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는 원천봉쇄가 왜 '논리적 오류'인가? 상대가 반박할 수 없을 만한 것을 근거로 내세워 자신이 제시하는 진리가 우세함을 보이는 것은 토론의 기본적인 규칙이 아닌가? 그러나 원천봉쇄는 토론에서 상대방의 주장 또는 근거에 대해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토론이 성립하는 이유 자체를 차단해버린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어떤 말을 하든 아무런 쓸모도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기서 내가 이러한 글을 쓰더라도 어차피 아무도 이 글을 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이나 쓰지 않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다. 따라서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할 때,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므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모두 헛짓거리 내지 하나마나한 이야기가 된다. 오히려 어떤 이야기를 했다면 그것은 헛수고를 한 것이 되므로, 한 것이 더 나쁘다. 그러나 내가 이 글을 쓰지 않으면 이 글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도 성립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어떤 이야기가 나온 이후의 사후판단이 아니라 나오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려 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진리값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야기한다-토론한다-대화한다는 토대를 부정해버림으로써, 우리네 삶을 그냥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사람들은 어찌하여 이렇듯 원천봉쇄를 밈으로 활용하는가. 이를 가늠하기 위해 하나의 우회로를 선택해보도록 하자. 그것은 원천봉쇄의 가장 극단에 서 있는 사상인 반출생주의이다. 반출생주의를 체계적으로 주장한 것으로는 최초의 학자인 데이비드 베너타의 저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 따르면, 태어나는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 항상 심각한 해악이다. 더 나쁜 삶과 덜 나쁜 삶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심각하게 나쁘다. 그러므로 모든 삶은 태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미 태어난 사람들은 후세를 만들지 않아야 하며, 인류의 자발적 멸종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윤리적'으로 '선'하다. 다른 사람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을 해악에 빠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너타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핵심적인 근거는 다음이다.

본고는 이러한 주장이 거대한 억까인즉 원천봉쇄의 오류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3.1.
(1) 여기서 어떠한 개별 존재자를 x로, 그러한 개별 존재자들의 (적어도 종species적으로서의)군집을 X로, 둘을 합쳐서는 Xx로 표기하도록 하자. x가 존재함으로서 그 존재가 나쁜지 좋은지는 x에게 물어봄으로써 알 수 있다. 그리고 x들의 의견을 통해 통계적으로 X의 견해를 마련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x의 존재를 따지든지 X의 존재를 따지든지간에 그 당사자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는 점이다. 존재하는 자 입장에서 존재한 적이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 자의 입장을 생각해보아야 그것은 사고실험에 불과하다. 어떠한 주장이 도발적이면 도발적일수록 그에 대한 근거는 단지 사고실험이 아니라 엄연히 사실에 기반한 것이어야한다. 태어나는 것이 '항상' 심각한 해악이고 그에 대한 근거로 위와 같은 주장이 성립하려면 그것에 버금가는 사실에 대한 판단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한 사실은 오직 당사자들, 혹은 당사자들이 임명한 대변자들만이 마련할 수 있다.

3.2.
어떻게 우리는 비존재하는 존재자의 의견을 물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논의하려면, 우리는 일단 '존재한 적이 없는 자'와 '존재하지 않는 자'를 구분해야 한다. 이를테면 존재하지 않는 자는 과거에는 존재했거나 미래에 존재할 것이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자일 수 있다. 존재한 적이 없는 자는 적어도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존재하지 않아야 존재한 적이 없다고 지칭할 수 있다. 좀 더 보편적인 서술이 되고자 한다면, 미래에도 존재한 적이 없어야 한다. 즉 어떠한 시간대에서도 존재하지 않아야 존재한 적이 없는 자이다. 전자의 존재는 시간성을 함유하고 있다면 후자의 존재는 탈시간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존재는 존재 중심으로 생각하고 비존재는 비존재 중심으로 생각할 것을 우리가 유추할 수 있으므로, 존재와 비존재라는 두 가지 상태 중에 무엇이 더 나은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존재와 비존재라는 두 가지 상태를 모두 경험한(또는 경험할) 존재자에게 묻는 것이 가장 좋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존재했거나 미래에 존재하게 될 존재자, 즉 존재하지 않는 자가 이에 해당하는데, 이 존재자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존재하는 우리는 그의 의견을 물을 수가 없다.

대응책으로 존재한 적이 없는 자의 의견을 물어보려 한다면, 마찬가지로 존재한 적이 없는 자에게 있어서 Xx가 존재한 적이 없어서 겪는 쾌락의 부재가 '좋음'인지 '나쁨'인지 '나쁘지 않음(그렇다고 좋지도 않음)'인지는 Xx가 존재한 적이 없는 당사자일 때 물을 수 있다. 그런데 Xx는 존재한 적이 없으므로 Xx가 존재함으로 인해 겪게 될 고통과 쾌락의 존재와 부재가 Xx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해 겪는 그것과 비교하여 더 좋은지 나쁜지는 알 수 없다.

3.3.
따라서 존재하는 자인 데이비드 베너타가 설정한 위와 같은 논증은 베너타 자신의 추측에 불과하며, 존재한 적이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 자인 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베너타의 위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3.4.
(2) 베너타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항상' 낫다는 주장의 근거로 존재한 적이 없는 자와 존재하지 않는 자의 '비존재'라는 상태를 끌어오고 있다. 베너타는 여기서 태어남이라는 '사건'과 존재함이라는 '상태'를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그에게 "태어나지 않는 것이 '항상' 낫다"는 말은 "태어나 존재하게 되지 않는 것이 '항상' 낫다"는 의미이다. 존재자의 범위를 유정적 존재로 한정하고 유정적 존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태어남이라는 사건을 과정으로 거쳐야 한다는 점을 당위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태어남과 존재함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므로 다른 층위에서 사유해야 한다. 여기서 태어남이란 곧 '출생'이라고 한다면, 출생이라는 사건을 과정으로 갖지 않더라도 존재함이라는 상태를 갖게 될 수 있는 경우(ex: 유정적으로 존재하는 AI)를 베너타는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태어남이라는 사건을 겪더라도 존재함이라는 상태를 가지지 않는 경우(ex: 비존재함으로 태어나는 경우) 역시 간과되고 있다. 물론 유정적 A.I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비존재함으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도 우리는 아직 관측할 수 없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자와 존재한 적이 없는 자의 존재하저 항상 나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존재와 비존재에 대하여 비존재가 더 낫다는 사유를 총체적으로 진행하려면 이러한 경우까지 고려해야만이 그나마 사고실험으로서는 유효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통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쾌락으로 승화시킬 수 없을 때 나쁜 것이므로 고통 그 자체가 '나쁨'으로 환원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3.5.
(3) 비존재함은 인류의 욕망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태어남과 존재함이라는 사건에 사건-상태에 휘말려 있는 것은 개별적 인간x나 종으로서의 인류X뿐만이 아니다. 존재의 대상을 비인간동물 중에서도 유정적 존재에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끊임없이 번식하려고 한다. 세포와 유전자마저도 스스로를 계속해서 복제하려고 한다. 이들이 가질 고요한 비존재의 축복을 위해 우리가 이들의 개체수를 조절하고 중성화 수술을 시키고 마침내 안락사로 유도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우리 인간의 생각이지, 비인간 유정적 동물 당사자의 의사가 아니다. 동물이 가진 지적 능력이 인간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인간이 동물이 가진 생과 사의 총체를 이렇게 저렇게 조율하려는 것은 과연 합당한가? 더불어 인류가 자발적 멸종에 성공하여 지구 상에서 사라졌다고 한다면, 다른 비인간존재Xx들의 존재와 비존재 문제는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 최소한의 인류는 살아서 그 존재의 고통을 계속해야 하는가 아니면 인류 이외의 새로운 고지능 존재자Xx가 출몰하여 인류 이후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마냥 바라마기만 해야 하는가?

위에서 본고가 제시한 반박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이러한 반박이야말로 억지라고 주장할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의사표현을 가질 수 있으냐, 존재했지만 죽어서 떠나가 지금은 비존재하는 이들과 우리는 소통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역시 본고는 받아들인다. 원천봉쇄에는 원천봉쇄로 대응해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사유를 전개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인 공리를 설정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태어나 존재하는 자들인데, 태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해서 우리 모두의 상태를 '나쁨'으로 위치시키는 것보다는 어쨌든 태어나버렸기 때문에 태어나 존재하는 것이 더 낫다고, 적어도 그래야 한다고, 거기에 우리의 모든 사유의 기반을 두자고 말하는 편이 우리의 무정적 삶까지도 '좋음'으로 승화시키는 일이라고 본고는 말하겠다. 태어나 살아감은 분명 많은 고통을 함유하고 있다. 그래서 살아감이 아니라 그저 존재함의 상태로 돌입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를테면 A.I가 되고 싶다거나 돌멩이가 되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의견은 본고를 쓰는 나 역시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어떠한 장소가, 우리의 삶이라는 곳이 지금 고통스럽다면 그것이 고통스럽다고 우리 모두의 삶을 끝내버리자는 주장보다는 적어도 덜 고통스럽게 바꾸어보자고, 이러한 사고방식을 우리네 사유의 가장 밑바닥의 공리로 채택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5.
그래서 우리가 어째서 잠깐의 우회로를 돌아왔는지 여기서 밝혀야만 하겠다. 봉쇄의 시대를 떠다니는 정서는 '억울함'이다. 그것도 가장 근본적인 억울함, "나는 내가 태어나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는데, 나를 태어나게 했다."라는 소위 '낳음당함'이라는 정서가 자리하고 있다. 적어도 현대과학이 가능한 한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당신이 태어날 것인지 말 것인지 의사를 확인받을 수는 없으므로(나는 여기에 관한 SF영화를 언젠가 하나 만들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를 일단은 태어나게 할 수 밖에 없으며 이에 대해 낳음당한 존재가 불만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우리 모두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매우 비약적인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어남 자체에 그것이 나쁨인지 좋음인지 확정하기에는 너무 이를뿐더러 태어나 살아감으로 존재하는 이 곳을 어떻게 하면 '덜 고통스러운' 곳으로 개편해나갈 것인가가 사유하는 자에게 주어진 천명이라면 그렇다고 하겠다.

상대를 원천봉쇄하려는 비판은 많은 경우에 공적 발화로서의 비판이 아니다. 원천봉쇄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그 주장이 가지는 위치나 층위 등의 진리값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자신의 주장이 헛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화를 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역시 원천봉쇄는 발화자의 자아를 넓혀가는 활동이지만 자기복제에만 관심이 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적이다. 영화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vol.2>에서 메인 빌런으로 등장하는 '에고ego'는 이러한 제국주의적 자아를 가진 전형적인 인물이다.

팩트폭력이라는 말은 어떤 것을 '팩트'라고 지칭한 뒤에 다른 것들을 '팩트'가 아닌 것으로 깔아내린다. 다시 말해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권을 독점하고, 그 해석된 것을 필두로 자신이 대상에게 가하는 폭력적 발화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팩트'일까? 그것은 현상된 사실에 대한 수많은 해석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현상된 사실들에 대해 알아보는 작업은 '팩트'가 아니라 '사실관계'를 확인한다고 이른다. 사실관계 확인은 말그대로 사실들의 관계를 확인함으로써, 하나의 해석을 마냥 '팩트'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런 해석과 다른 해석 간의 인식망을 검토하여 말해지는 대상이 정말로 '사실'이라는 가치를 '부여받을' 만한 것인지를 재차 확인하는 작업이다.


7.
여하튼 여러가지 봉쇄의 밈들이 동시대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팩트폭력'이라는 용어와 '억까'라는 용어는 서로 그 용례가 대치된다는 점이다. '팩트폭력'은 어떤 주장을 '팩트'로 밀어붙임으로써 그것을 관철하려는 의도에서 주로 쓰였다면, '억까'는 그렇게 무언가를 관철하려는 의도를 '억지'라고 거부하는 것으로 쓰인다. 둘은 서로 공방(攻防)관계이다. 그러므로 봉쇄의 시대는 운 좋게도 그나마 점점 원천봉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는 방향으로 일구어져 온 것이다. 그 기반에 자리잡은 억울함의 정서가 만들어내는 것은 나 혹은 타인의 죽음이기에, 그 민감성을 사회가 알게모르게 감지한 것일지도 모른다.

전세계를 강타한 팬데믹은 수많은 도시와 국경이 봉쇄되도록 만들었다. 이는 애초에 환자가 유입되거나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는 극단의 조치이다. 그러나 팬데믹을 포함하여 우리 앞에 다가올 수많은 자연재해 앞에서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봉쇄라는 극단을 통하지 않고서도 어떻게 이 날들을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바이러스는 당신을 억울하게 만들것이다. 아니 내가 마스크도 잘 쓰고 다녔고 손도 자주 씻었는데도 감염병에 걸려버렸다고? 그래서 언제까지고 억울하기만 하면 바이러스가 당신의 신체 구석구석을 더욱더 억울하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억울함을 멈추고, 이제는 할 일을 해야 한다.

3개의 좋아요

아주 다양한 문제의식이 엿보이는 글이네요. 다만 굳이 먹물스러운 답변 하나를 드려보자면, 아마도 베너타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다음 전제를 거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존재와 비존재라는 두 가지 상태 중에 무엇이 더 나은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존재와 비존재라는 두 가지 상태를 모두 경험한(또는 경험할) 존재자에게 묻는 것이 가장 좋다.
[...]
존재하는 자인 데이비드 베너타가 설정한 위와 같은 논증은 베너타 자신의 추측에 불과하며, 존재한 적이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 자인 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베너타의 위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도덕 인식론은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어느 상태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데 반드시 그 도덕적 고려 대상자의 "의견"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지 않는 도덕 이론들도 많습니다.

베너타의 배경 이론이 어떤것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이를테면 고전적 공리주의자는 의견 표명 (가능) 여부가 도덕적 고려 여부의 충분조건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많은 비인간 동물들은 의견을 표명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공리를 향유할 수 있다는 지점에서 도덕적 고려대상으로 판단되죠. 따라서 이런 입장에 따르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의견을 표명할 수 없다는 사실은 좋고 나쁨을 따지는데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그래서 베나타의 입장이 성공적인가?'는 다른 문제입니다. 이를테면 상기한 인식론적 문제가 아닌,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도덕적 지위를 갖는게 가능한가?'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 또한 활발한 논의 주제죠. 다만 제가 나누고자 했던 의견은 위와 같은 전략이 성공적일지 여부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가 필요해보인다는 것입니다.

3개의 좋아요

저도 먹물입장에서 몇 마디 붙여봅니다.

  1. 원천봉쇄의 오류?

분류법은 다소 상이하긴 하지만 원천봉쇄의 오류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호소하는 오류의 하나일 겁니다. 가령 "P라고 주장하는 자는 악당이다 (혹은, P에 동조하는 것은 악당에게 동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P라고 주장하는 저 자의 말은 틀렸다"와 같은 예시를 들 수 있겠군요.
반면 토론 자체의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는 이런 원천봉쇄의 오류를 범하지 않고 따질 수 있는 물음입니다. 모든 토론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문제사안에 대해 "이건 언어적 문제(verbal issue)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면 이건 원천봉쇄의 오류에 해당할까요? 그렇진 않을 것입니다.

  1. 베네이타의 논증은, 글쓴이가 의도한 '원천봉쇄'의 의미에 따른다면, 원천봉쇄 오류인가?

적어도 제가 보기엔 베네이타의 논증 어디에도 토론 자체의 가능성을 없애거나 반대하는 의견을 아무 쓸모 없게 만드는 부분은 없어 보입니다. 제가 베네이타의 대표작을 자세히 읽어보진 않았지만, 저는 베네이타의 반출생주의 논증의 결론이 다소 충격적이긴 했지만 반대 의견의 가능성 자체를 막아버리는 종류의 논증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토론하기에 아주 좋을만큼 태클 걸어볼 부분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는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베네이타의 반출생주의 논증의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가 논증에서 제시한 전제를 문제 삼거나 논증이 올바르지 않다고 지적하면 됩니다. 만일 베네이타가 "내 논증의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건 당신이 사악한 출생주의자이기 때문이야!"라고 한다면 표준적인 의미의 원천봉쇄의 오류가 맞을 것이겠지만, 베네이타의 논증 어디에서도 그런 주장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나아가 글쓴이 본인이 이미 이런 방식으로 건전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즉 글쓴이는 "어떤 것이 X에게 좋은지 아닌지는 오직 X 혹은 X를 적절히 대변할 수 있는 자만이 판단할 수 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베네이타의 논증의 전제인 쾌락과 고통을 각각 객관적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간주하는 전제를 거부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는 따져볼 문제이나, 베네이타가 논증을 제시하는 방식과 글쓴이가 비판하는 방식은 지극히 정상적인 토론의 과정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베네이타도, 글쓴이도 적어도 본문에서 제기된 방식의 비형식적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1. 글쓴이의 주장과 관련하여

어떠한 주장이 도발적이면 도발적일수록 그에 대한 근거는 단지 사고실험이 아니라 엄연히 사실에 기반한 것이어야한다.

일단 이 주장에 대한 근거는 글에서는 찾아볼 수 없네요. 제 생각에 이건 적어도 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어떤 철학적 논증을 지지하기 위해서 경험적 자료가 요청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요.
예컨대 피터 싱어가 "기근, 풍요, 그리고 도덕"이라는 논문에서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기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싱어의 주장은 우리에게 상당히 많은 도덕적 요구를 하는 도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논증을 지지하기 위해 경험적 자료가 제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사고실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원리들 간에 충돌이 발생하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고 이는 꽤 중요한 발전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경험적 자료가 얼마나 유의미한 역할을 하는지는 그리 분명치 않아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3.2절은 상당히 불분명합니다. 언뜻 보기에 'x는 존재하지 않는다'(~∃x(x=a))와 '필연적으로 x는 존재하지 않는다'(□~∃x(x=a))를 구분하는 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비존재는 비존재 중심으로 생각한다

와 같은 문장은 적어도 저에게는 이해불가능한 문장입니다. 유추해보자면 앞에서 나왔던 주장, 즉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 좋은지 나쁜지를 물어볼 수 없다는 것을 달리 풀어 말한 것 같긴 합니다만,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 생각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네요.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이미 베네이타의 논증에 대한 적절한 방식의 지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굳이 들어갔어야 하는 부분일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3개의 좋아요

상기 두 분의 건강하고 소중한 비판 모두 감사합니다. 사유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slight_smile:

'좋음'과 '나쁨'을 알기 위해선 꼭 당사자에게 물어봐야 하는가?

제가 보기에도 베너타에게 의견 표명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wildbunny님이 지적하셨 듯이 공리를 향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리주의는 비인간 동물들 역시 도덕적 고려 대상으로 판단하는데, 베너타 역시 자신의 논증이 다른 유정적 존재들에게 적용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고,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중간 중간에 반출생주의가 동물들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점을 어필하고 있습니다.

나의 논증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유정적인(sen-tinent) 다른 모든 존재에게도 적용된다. 그러한 존재들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존재들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다른말로 하면 그저 객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주체이기도 하다. 비록 감각 지각(sentinence)이 진화의 발달에서 늦게 일어난 현상이며, 감각 무지각(insentience)보다 더 복잡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더 나은 존재 상태라는 것은 전혀 분명하지 않다. 이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큰 비용을 치르고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경험할 수 있기 위해서 유정적 존재는 불쾌(unpleasantness)를 느낄 수 있고 또 느낀다.(<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18-19)

공리주의적 입장을 베이스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나가는 베너타에게 '고통'은 그 자체로 나쁘고 '쾌락'은 그 자체로 좋은 게 맞고, 따라서 고통(나쁜 것)과 쾌락(좋은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지 의견 표명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나 의견 표명을 할 수 없는 유정적 존재들에게도 논의를 적용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고통과 쾌락이 그 자체로 존재하고, 그것을 알기 위해선 딱히 고통과 쾌락을 겪는 누군가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기 때문에 베너타의 논증은 성립합니다. 베너타의 도표로 돌아간다면, 시나리오 A에선 X가 존재하기 때문에 고통(나쁜 것)과 쾌락(좋은 것)이 존재합니다. 반면 시나리오 B에선 X가 존재하지 않아 고통과 쾌락이 모두 부재합니다. 이 경우 고통(나쁜 것)이 없어지니 좋지만, 쾌락(좋은 것)은 없어져도 좋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가 저 멀리 외딴 섬의 누군가가 존재하지 못해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한다 해도, 거기에 슬퍼하지 않는 것, 그 일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3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