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단상을 적어내려간 글을, 용기를 내어 여기에도 올려봅니다.
언젠가부터 '팩트폭력'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ㅇㄱㄹㅇㅂㅂㅂㄱ(이거 리얼 반박 불가)
빼박캔트(빼도박도 못하게 반박 불가)
가불기(반박불가 기술)
몰?루
반박시 니 말이 맞음
억까(억지로 까임-억지로 비판함)라는 말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2.
이러한 밈-유행어들의 공통점은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 그것에 대해 질문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버린다는 것이다. 논리학의 용어로는 이를 '원천봉쇄의 오류'라고 한다. 여기에서 이름을 따 이러한 발언이 밈과 유행으로 번지는 오늘날을 '봉쇄의 시대'라고 하자.
2.1.
반박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는 원천봉쇄가 왜 '논리적 오류'인가? 상대가 반박할 수 없을 만한 것을 근거로 내세워 자신이 제시하는 진리가 우세함을 보이는 것은 토론의 기본적인 규칙이 아닌가? 그러나 원천봉쇄는 토론에서 상대방의 주장 또는 근거에 대해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토론이 성립하는 이유 자체를 차단해버린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어떤 말을 하든 아무런 쓸모도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기서 내가 이러한 글을 쓰더라도 어차피 아무도 이 글을 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이나 쓰지 않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다. 따라서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할 때,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동일한 가치를 가지므로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모두 헛짓거리 내지 하나마나한 이야기가 된다. 오히려 어떤 이야기를 했다면 그것은 헛수고를 한 것이 되므로, 한 것이 더 나쁘다. 그러나 내가 이 글을 쓰지 않으면 이 글에 대한 아무런 이야기도 성립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어떤 이야기가 나온 이후의 사후판단이 아니라 나오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려 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진리값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야기한다-토론한다-대화한다는 토대를 부정해버림으로써, 우리네 삶을 그냥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사람들은 어찌하여 이렇듯 원천봉쇄를 밈으로 활용하는가. 이를 가늠하기 위해 하나의 우회로를 선택해보도록 하자. 그것은 원천봉쇄의 가장 극단에 서 있는 사상인 반출생주의이다. 반출생주의를 체계적으로 주장한 것으로는 최초의 학자인 데이비드 베너타의 저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 따르면, 태어나는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 항상 심각한 해악이다. 더 나쁜 삶과 덜 나쁜 삶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심각하게 나쁘다. 그러므로 모든 삶은 태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미 태어난 사람들은 후세를 만들지 않아야 하며, 인류의 자발적 멸종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윤리적'으로 '선'하다. 다른 사람을 태어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을 해악에 빠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너타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핵심적인 근거는 다음이다.
본고는 이러한 주장이 거대한 억까인즉 원천봉쇄의 오류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3.1.
(1) 여기서 어떠한 개별 존재자를 x로, 그러한 개별 존재자들의 (적어도 종species적으로서의)군집을 X로, 둘을 합쳐서는 Xx로 표기하도록 하자. x가 존재함으로서 그 존재가 나쁜지 좋은지는 x에게 물어봄으로써 알 수 있다. 그리고 x들의 의견을 통해 통계적으로 X의 견해를 마련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x의 존재를 따지든지 X의 존재를 따지든지간에 그 당사자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는 점이다. 존재하는 자 입장에서 존재한 적이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 자의 입장을 생각해보아야 그것은 사고실험에 불과하다. 어떠한 주장이 도발적이면 도발적일수록 그에 대한 근거는 단지 사고실험이 아니라 엄연히 사실에 기반한 것이어야한다. 태어나는 것이 '항상' 심각한 해악이고 그에 대한 근거로 위와 같은 주장이 성립하려면 그것에 버금가는 사실에 대한 판단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한 사실은 오직 당사자들, 혹은 당사자들이 임명한 대변자들만이 마련할 수 있다.
3.2.
어떻게 우리는 비존재하는 존재자의 의견을 물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논의하려면, 우리는 일단 '존재한 적이 없는 자'와 '존재하지 않는 자'를 구분해야 한다. 이를테면 존재하지 않는 자는 과거에는 존재했거나 미래에 존재할 것이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자일 수 있다. 존재한 적이 없는 자는 적어도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존재하지 않아야 존재한 적이 없다고 지칭할 수 있다. 좀 더 보편적인 서술이 되고자 한다면, 미래에도 존재한 적이 없어야 한다. 즉 어떠한 시간대에서도 존재하지 않아야 존재한 적이 없는 자이다. 전자의 존재는 시간성을 함유하고 있다면 후자의 존재는 탈시간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존재는 존재 중심으로 생각하고 비존재는 비존재 중심으로 생각할 것을 우리가 유추할 수 있으므로, 존재와 비존재라는 두 가지 상태 중에 무엇이 더 나은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존재와 비존재라는 두 가지 상태를 모두 경험한(또는 경험할) 존재자에게 묻는 것이 가장 좋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존재했거나 미래에 존재하게 될 존재자, 즉 존재하지 않는 자가 이에 해당하는데, 이 존재자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존재하는 우리는 그의 의견을 물을 수가 없다.
대응책으로 존재한 적이 없는 자의 의견을 물어보려 한다면, 마찬가지로 존재한 적이 없는 자에게 있어서 Xx가 존재한 적이 없어서 겪는 쾌락의 부재가 '좋음'인지 '나쁨'인지 '나쁘지 않음(그렇다고 좋지도 않음)'인지는 Xx가 존재한 적이 없는 당사자일 때 물을 수 있다. 그런데 Xx는 존재한 적이 없으므로 Xx가 존재함으로 인해 겪게 될 고통과 쾌락의 존재와 부재가 Xx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해 겪는 그것과 비교하여 더 좋은지 나쁜지는 알 수 없다.
3.3.
따라서 존재하는 자인 데이비드 베너타가 설정한 위와 같은 논증은 베너타 자신의 추측에 불과하며, 존재한 적이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 자인 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베너타의 위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3.4.
(2) 베너타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항상' 낫다는 주장의 근거로 존재한 적이 없는 자와 존재하지 않는 자의 '비존재'라는 상태를 끌어오고 있다. 베너타는 여기서 태어남이라는 '사건'과 존재함이라는 '상태'를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즉 그에게 "태어나지 않는 것이 '항상' 낫다"는 말은 "태어나 존재하게 되지 않는 것이 '항상' 낫다"는 의미이다. 존재자의 범위를 유정적 존재로 한정하고 유정적 존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태어남이라는 사건을 과정으로 거쳐야 한다는 점을 당위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태어남과 존재함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므로 다른 층위에서 사유해야 한다. 여기서 태어남이란 곧 '출생'이라고 한다면, 출생이라는 사건을 과정으로 갖지 않더라도 존재함이라는 상태를 갖게 될 수 있는 경우(ex: 유정적으로 존재하는 AI)를 베너타는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태어남이라는 사건을 겪더라도 존재함이라는 상태를 가지지 않는 경우(ex: 비존재함으로 태어나는 경우) 역시 간과되고 있다. 물론 유정적 A.I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비존재함으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도 우리는 아직 관측할 수 없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자와 존재한 적이 없는 자의 존재하저 항상 나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존재와 비존재에 대하여 비존재가 더 낫다는 사유를 총체적으로 진행하려면 이러한 경우까지 고려해야만이 그나마 사고실험으로서는 유효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통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쾌락으로 승화시킬 수 없을 때 나쁜 것이므로 고통 그 자체가 '나쁨'으로 환원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3.5.
(3) 비존재함은 인류의 욕망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태어남과 존재함이라는 사건에 사건-상태에 휘말려 있는 것은 개별적 인간x나 종으로서의 인류X뿐만이 아니다. 존재의 대상을 비인간동물 중에서도 유정적 존재에 한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끊임없이 번식하려고 한다. 세포와 유전자마저도 스스로를 계속해서 복제하려고 한다. 이들이 가질 고요한 비존재의 축복을 위해 우리가 이들의 개체수를 조절하고 중성화 수술을 시키고 마침내 안락사로 유도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우리 인간의 생각이지, 비인간 유정적 동물 당사자의 의사가 아니다. 동물이 가진 지적 능력이 인간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인간이 동물이 가진 생과 사의 총체를 이렇게 저렇게 조율하려는 것은 과연 합당한가? 더불어 인류가 자발적 멸종에 성공하여 지구 상에서 사라졌다고 한다면, 다른 비인간존재Xx들의 존재와 비존재 문제는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이를 위해서 최소한의 인류는 살아서 그 존재의 고통을 계속해야 하는가 아니면 인류 이외의 새로운 고지능 존재자Xx가 출몰하여 인류 이후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마냥 바라마기만 해야 하는가?
위에서 본고가 제시한 반박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이러한 반박이야말로 억지라고 주장할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의사표현을 가질 수 있으냐, 존재했지만 죽어서 떠나가 지금은 비존재하는 이들과 우리는 소통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역시 본고는 받아들인다. 원천봉쇄에는 원천봉쇄로 대응해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사유를 전개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전제인 공리를 설정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태어나 존재하는 자들인데, 태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해서 우리 모두의 상태를 '나쁨'으로 위치시키는 것보다는 어쨌든 태어나버렸기 때문에 태어나 존재하는 것이 더 낫다고, 적어도 그래야 한다고, 거기에 우리의 모든 사유의 기반을 두자고 말하는 편이 우리의 무정적 삶까지도 '좋음'으로 승화시키는 일이라고 본고는 말하겠다. 태어나 살아감은 분명 많은 고통을 함유하고 있다. 그래서 살아감이 아니라 그저 존재함의 상태로 돌입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를테면 A.I가 되고 싶다거나 돌멩이가 되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의견은 본고를 쓰는 나 역시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어떠한 장소가, 우리의 삶이라는 곳이 지금 고통스럽다면 그것이 고통스럽다고 우리 모두의 삶을 끝내버리자는 주장보다는 적어도 덜 고통스럽게 바꾸어보자고, 이러한 사고방식을 우리네 사유의 가장 밑바닥의 공리로 채택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5.
그래서 우리가 어째서 잠깐의 우회로를 돌아왔는지 여기서 밝혀야만 하겠다. 봉쇄의 시대를 떠다니는 정서는 '억울함'이다. 그것도 가장 근본적인 억울함, "나는 내가 태어나는 것에 동의한 적이 없는데, 나를 태어나게 했다."라는 소위 '낳음당함'이라는 정서가 자리하고 있다. 적어도 현대과학이 가능한 한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당신이 태어날 것인지 말 것인지 의사를 확인받을 수는 없으므로(나는 여기에 관한 SF영화를 언젠가 하나 만들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를 일단은 태어나게 할 수 밖에 없으며 이에 대해 낳음당한 존재가 불만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우리 모두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매우 비약적인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어남 자체에 그것이 나쁨인지 좋음인지 확정하기에는 너무 이를뿐더러 태어나 살아감으로 존재하는 이 곳을 어떻게 하면 '덜 고통스러운' 곳으로 개편해나갈 것인가가 사유하는 자에게 주어진 천명이라면 그렇다고 하겠다.
상대를 원천봉쇄하려는 비판은 많은 경우에 공적 발화로서의 비판이 아니다. 원천봉쇄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그 주장이 가지는 위치나 층위 등의 진리값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자신의 주장이 헛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화를 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데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역시 원천봉쇄는 발화자의 자아를 넓혀가는 활동이지만 자기복제에만 관심이 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적이다. 영화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 vol.2>에서 메인 빌런으로 등장하는 '에고ego'는 이러한 제국주의적 자아를 가진 전형적인 인물이다.
팩트폭력이라는 말은 어떤 것을 '팩트'라고 지칭한 뒤에 다른 것들을 '팩트'가 아닌 것으로 깔아내린다. 다시 말해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권을 독점하고, 그 해석된 것을 필두로 자신이 대상에게 가하는 폭력적 발화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팩트'일까? 그것은 현상된 사실에 대한 수많은 해석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현상된 사실들에 대해 알아보는 작업은 '팩트'가 아니라 '사실관계'를 확인한다고 이른다. 사실관계 확인은 말그대로 사실들의 관계를 확인함으로써, 하나의 해석을 마냥 '팩트'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런 해석과 다른 해석 간의 인식망을 검토하여 말해지는 대상이 정말로 '사실'이라는 가치를 '부여받을' 만한 것인지를 재차 확인하는 작업이다.
7.
여하튼 여러가지 봉쇄의 밈들이 동시대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팩트폭력'이라는 용어와 '억까'라는 용어는 서로 그 용례가 대치된다는 점이다. '팩트폭력'은 어떤 주장을 '팩트'로 밀어붙임으로써 그것을 관철하려는 의도에서 주로 쓰였다면, '억까'는 그렇게 무언가를 관철하려는 의도를 '억지'라고 거부하는 것으로 쓰인다. 둘은 서로 공방(攻防)관계이다. 그러므로 봉쇄의 시대는 운 좋게도 그나마 점점 원천봉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는 방향으로 일구어져 온 것이다. 그 기반에 자리잡은 억울함의 정서가 만들어내는 것은 나 혹은 타인의 죽음이기에, 그 민감성을 사회가 알게모르게 감지한 것일지도 모른다.
전세계를 강타한 팬데믹은 수많은 도시와 국경이 봉쇄되도록 만들었다. 이는 애초에 환자가 유입되거나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는 극단의 조치이다. 그러나 팬데믹을 포함하여 우리 앞에 다가올 수많은 자연재해 앞에서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봉쇄라는 극단을 통하지 않고서도 어떻게 이 날들을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바이러스는 당신을 억울하게 만들것이다. 아니 내가 마스크도 잘 쓰고 다녔고 손도 자주 씻었는데도 감염병에 걸려버렸다고? 그래서 언제까지고 억울하기만 하면 바이러스가 당신의 신체 구석구석을 더욱더 억울하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억울함을 멈추고, 이제는 할 일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