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사랑의 본질은 성욕

언젠가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에 쇼펜하우어가 사랑의 본질은 성욕이라고 말했다는 썸네일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귀찮아서 보진 않았는데 흥미는 생겨서 나중에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니 흥미롭더라고요.
스피노자가 말했던 '사랑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에서 시작해서 하이데거는 그 외적 원인을 후손을 남겼을 때의 생존성으로 보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사랑이란 것은 성공적인 번식을 위한 성욕을 포장한 단어에 불과하다는 결론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만 요즘 이런 생각에 빠져있어서 자주 멋대로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의 본질은 결국 유전자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하고 아무리 이성적이라고 해도 동물적 욕구가 앞서기 때문에 윤리도, 진리도 필요없다는 극단적인 생각말이죠.
여러분들은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시는지, 동의하시지 않는다면 이런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좋은 글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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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에 대한 쇼펜하우어식의 해석은 (폴 리쾨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드러난 '현상' 뒤편에 드러나지 않은 '실재'가 있다고 상정하고서, 그 실재를 기술하는 이론으로부터 현상을 해석하려는 작업이 바로 의심의 해석학입니다. 리쾨르는 이러한 방식의 해석학을 수행한 대표적인 인물로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제시하죠. 단순화해서 설명하자면, 니체는 드러난 '도덕' 뒤편에 드러나지 않은 '원한 감정'을 상정하고, 마르크스는 드러난 '문화' 뒤편에 드러나지 않은 '생산 양식'을 상정하고, 프로이트는 드러난 '꿈' 뒤편에 드러나지 않은 '무의식'을 상정하니까요.

(2) 그렇지만 의심의 해석학은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을 상실하고 있다고 자주 비판받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거죠. 즉, "사랑 뒤편에는 성욕이 감추어져 있어!"라고 주장하면서 겉으로 주어진 '사랑'이라는 현상을 의심하는 해석학자를 상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사랑 뒤편에는 성욕이 감추어져 있어!"라는 그의 주장은 과연 어떻게 정당화됩니까? 현상을 의심하기 위해 도입된 해석학적 기준은 과연 의심에서 면제될 수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적절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해석학은 자신의 해석학적 기준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 채 성립한 독단일 뿐인 것으로 폭로되고 맙니다.

(3) 이 문제는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에 대한 논의와도 연결됩니다. 일단 우리가 특정한 해석학적 기준을 받아들이고 나면, 세계를 그 기준에 끼워맞춰서 해석하는 것 자체는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사랑 뒤편에는 성욕이 감추어져 있어!"라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종류의 사랑은 예외 없이 성욕으로 해석되는 거죠. 그렇지만 현상이 특정한 기준에 따라 해석된다고 해서 그 기준이 정당하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예외 없이 해석할 수 있는 기준이란 애초에 반증 가능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중세 종교 재판관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이교도'로 보이고, 공산주의자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미제의 앞잡이'로 보이고, 극우파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빨갱이'로 보인다고 해서 그들의 해석학적 기준이 옳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해석학적 기준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한, 특정한 해석(가령, "사랑 뒤편에는 성욕이 있다.") 자체는 아무런 의의도 지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의심의 해석학은 이렇듯 반증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자주 비판받죠.

(4) 실제로, 바로 이 점 때문에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오늘날에 그 힘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습니다. 물론, 여전히 마르크스나 프로이트로부터 영감을 받는 사상은 많지만, 두 인물이 제시한 의심의 해석학 자체를 실재에 대한 올바른 기술로 생각하는 학자들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듭니다. 의심의 해석학이 그동안 '자기 지시성'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 지시성을 상실한 채 이루어지는 해석은 '반증 가능성'이 없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을 통해 지적된 결과인 거죠.

(5) 사소한 지적이지만,

이 부분은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하이데거가 결코 할 법하지 않은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고정된 본성이나 본질이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철학자입니다. 그런 하이데거가 '후손을 남겼을 때의 생존성' 같은 동물적 본능에 근거해서 사랑을 설명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하이데거는 '사랑' 같은 주제를 그다지 중요하게 언급하지조차 않습니다. 저로서는 하이데거의 텍스트에서 사랑에 대한 그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도출해내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하이데거의 사랑 이론을 억지로 끄집어낸다고 하더라도, 그 이론이 동물적 본능에 근거하여 사랑을 설명하는 내용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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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제가 너무 의심의 해석학에 매몰된 나머지 세상을 편협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됐습니다. 좀 더 공부해서 시선을 넓혀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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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나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아니라 흔히 얘기되는 바로 그 사랑의 본질이 성욕이라고 하면 거부감이 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그 거부감은 반론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상대로 흔히 얘기되는 그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로부터 특정한 종류의 감성적 충족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같이 살고 싶기까지한 사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감성적 충족과 원나잇 이상은 바라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감성적 충족은 급이 많이 다릅니다. 전자가 훨씬 더 전면적이고 풍부합니다. 우리는 흔히 전자와 관련해서 '사랑'을 운운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이뤄지기 힘들고 이뤄져도 지속되기 힘듭니다. 비공식적으로든 공식적으로든 반려자가 있는데, 그 반려자를 여전히 사랑하는데, 다른 사람도 사랑하게 되거나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그 사랑도 이뤄지기/지속되기 힘들어서도 힘듭니다. 곁눈질 안하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한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새로운 사랑을, 그 힘든 사랑을 계속 갈구합니다. 그 사랑은 또한 사람을 좁게, 맹목적이게, 폭력적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랑은 그렇게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환희나 행복감만큼이나 고통과 트러블과 타락/퇴행 또한 안겨 줍니다. 부처님이 괜히 애욕은 번뇌의 제왕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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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얘기되는 사랑의 본질이 성욕이라고 해도 그 사실로부터 인간의 본질은 결국 유전자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쇼펜하우어와 프로이트는 물론이고 도킨스도 그런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면/결정되어 있는 면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정교한 기계일 뿐이다라는 것은 의미가 같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 사랑만을 갈구하며 살지도 않고 인간의 그 사랑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번식수단으로서의 지위도 약합니다(사랑은 갈망하지만 아이는 갈망하지 않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애욕이 번뇌의 제왕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고 애욕이 개인적 수준의 번뇌에서 더 나아가 다른 개인들을 향한 폭력으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는 도덕과 법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조두순같은 인간이 있는가 하면 예수나 부처님같은 인간도 있습니다. 인간에게게 자유의지가 없다, 자유는 환상일 뿐이다는 결정적인 논증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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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동물이기 때문에 동물적 욕구가 있습니다. 다만 그 욕구는 인간동물적 욕구입니다. 인간 특유의 동물성 때문에 인간 동물의 동물적 욕구는 다른 동물들의 동물적 욕구보다 더 풍부합니다. 잡식을 하도록 진화했지만 인간의 잡식은 동시에 다른 동물들에게는 제한되어 있는 여러가지 맛에 대한 욕구를 함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인간의 식생활은 보편적입니다. 인간은 다양한 요리를 욕구합니다. 인간의 거주가 (기술의 힘에 의해 지구 어디에서나 살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이고 미적 충족을 요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섹스는 다른 동물들의 섹스보다 훨씬 더 풍부합니다. 기타등등. 이 동물적 욕구들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 충족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두고 얘기할 때는 동물적 욕구와 이성을 너무 따로 놓고 얘기하면 안 됩니다. 이성을 (이성적이고자 하는 욕구를) 어느 정도는 인간동물적 욕구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이성과 이성이 가리키는 도덕 등도 인류가 인류로 진화되면서 갖추게 된 일종의 인간본성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인간의 이성은 인간의 동물적 욕구가 더 안정적이고 더 평화롭고 더 장기적으로 충족되는데 필요한 충동의 억제와 협동 (사회적 생활)과 자연/환경에 대한 지식 획득의 수단으로 발생한 것이고 문화적으로 강화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이성적이라고 해도 동물적 욕구가 앞서기 때문에 윤리도, 진리도 필요없다'는 생각은 이상한 생각입니다. 한편의 이성/윤리/진리와 다른 한편의 (인간) 동물적 욕구 사이에는 심연이 가로 놓여 있지 않습니다. 후자는 (후자의 인간적 충족은) 전자를 필요로 하고 전자는 후자를 전제합니다. 양자는 서로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인류는 문명의, 즉 그 둘의 (조화로운) 결합의 최종적 실패를 목전에 두고 있고 사실 알고보면 문명의 역사는 내내 그 실패를 향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맞다고 해도 그 둘이 어느 한쪽을 우선시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내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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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합니다. 특히 마지막 문단에서

이 부분은 처음 알았고 또 흥미롭습니다. 이성이란 것이 욕구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욕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되었다는 것, 공대생이다보니 정규 교육과정에서 이성이라고 하면 욕구와 대척점에 있는 인간 고유의 것이라는 얕은 지식밖에 배울 수 없었는데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인간동물적 욕구와 관련하여 찾아볼 수 있는 자료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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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얘기는 어쩌다가 갖게된 생각을 푼 것이고 '인간동물적 욕구'에 대해 신경써 공부해 본 적이 없어서 추천까지 할 수는 없고

  1. 사회생물학자들 및 진화심리학자들의 논점들과 그 논점들을 둘러싼 논란들
  2. 마르크스의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론

을 확인해 보시는 것으로 출발은 할 수 있으실 것 같다는 얘기만 드릴 수 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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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올린 글에서 드린 얘기를 조금 보충합니다:

인간적 식생활에 대한 욕구, 인간적 성생활에 대한 욕구, 인간적 거주에 대한 욕구, (가장 기본적 단위가 친구관계, 연인관계, 가족관계인) 인간적 협동과 연대에 대한 욕구, 인간적 놀이에 대한 욕구, 인간적 권력과 명예에 대한 욕구 등 인간이 모든 다른 동물들이나 일부 다른 동물들과 공유하는 욕구들의 인간적 형태들이 있고 종교, 예술 따위로 충족되는 인간만의 욕구, 즉 '삶 전체, 더 나아가서는 존재 전체'의 의미를 보증해주는 것에 대한 욕구와 위안/희망을 주는 가상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그 외 환경을 통제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는 지식을 획득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인간 외에는 극히 일부 동물들만이 지식을 획득해 환경을 통제하는 데 활용합니다). 다만 인류의 존속 시기 대부분 동안 이 욕구는 과학의 형태를 취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인간화된 것이든 인간 고유의 것이든 인간의 모든 욕구는 인간이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보존 본능을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았고 인간이 어쩌다가 다른 동물들보다 뇌신경세포수가 엄청 더 많고 점점 더 규모가 커지는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종으로 진화해서 (사회는 개인의 실체이므로 보존되어야 할 인간 개개인들의) '자기'가 (내분도 생길 정도로) 복잡해지고 증대하고 풍부해졌다는 사실의 귀결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얘기는 인간적 욕구의 그 '인간적' 내용 때문에 인간이 다른 동물종들보다 더 잘 났다는 함축은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존 그레이의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를 읽어 보실 것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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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합니다. 덕분에 시험이 끝난 후의 독서목록을 고민 중이였는데 시간들여 읽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