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종의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 출간

연세대학교 이승종 교수님의 책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가 출판되었습니다. 아카넷 출판사의 책 소개 중에 이런 내용이 있네요.

해설서와 입문서, 교양서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의 인문학계와 독서계는 언제쯤 우리 학자가 저술한 세계 수준의 연구서를 접할 수 있을까? 알렉상드르 마트롱(Alexandre Matheron)의 스피노자 해석, 피터 스트로슨(Peter Strawson)의 칸트 해석, 마이클 더밋(Michael Dummett)의 프레게 해석과 같은 일급 작품은 우리에게는 요원한 그림의 떡일까? 학문의 사대주의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인가? 평생 비트겐슈타인을 연구해온 이승종 교수가 사반세기에 걸쳐 준비해 내놓은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 자연주의적 해석』은 이러한 갈증과 염원을 해소시켜줄 묵직한 역작이다. 엄밀한 텍스트 읽기와 입체적 서술로 완성한 이승종 교수의 독창적 해석은 이 책을 추천한 세 분의 한국철학자들이 인정하듯이 비트겐슈타인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고 있다.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이 책은 단순한 '입문서'나 '해설서'나 '교양서'가 아니라 '연구서'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이승종 교수님의 지도제자들은 지난 겨울에 이 책의 초고를 미리 받아서 확인해 보았는데, 책을 읽은 학생들이 하나같이 모두 감탄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비트겐슈타인을 다룬 여러 연구서들을 읽어보았지만, 이 정도로 치밀하면서도 독창적인 연구서는 접한 적이 없다면서요. (이승종 교수님 밑에서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이 매번 이승종 교수님의 책들에 대해서 홍보를 하고 있으니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대학원에서 공부를 해보신 분들이라면 지도제자가 지도교수의 팬이 되기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어렵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거기다, 저는 이미 『크로스오버 하이데거』를 처음 읽었던 서강대 학부 시절부터 이승종 교수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책의 제1장과 제3장을 읽고서 정말 지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1장은 자연주의와 해체주의 사이의 관계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해명합니다. 이 책은 (부제에서도 드러나듯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일종의 '자연주의(naturalism)'라고 규정합니다. 그런데 이때의 '자연주의'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자연주의는,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여 철학을 전개하고자 한 콰인의 자연주의와는 달리, '사람의 얼굴을 한 자연주의(naturalism with a hunam face)'라는 것이 이 책 전체에 흐르는 핵심 논지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해 제1장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자연주의에 내재된 해체적 성격이 강조됩니다. 즉, 이 책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전통철학에서 그동안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된 여러 가지 개념 구분들(가령, 현상/실재, 기표/기의, 분석/종합, 도식/내용)을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해체주의와 공동전선을 구축합니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우리의 삶을 규제하는 자연적 제약 조건을 '삶의 형식', '문법', '자연사적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해체주의와 구별되는 자연주의의 성향을 지닙니다. 이렇듯 이 책은 제1장에서부터 (비트겐슈타인 연구서로서는 대단히 개성적이게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해체주의와 비교하면서 논의를 전개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과정에서 이승종 교수님이 다양한 철학적 입장들을 자연주의와 해체주의의 관점에서 분류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1994년에 이승종 교수님이 뉴턴 가버와 함께 출판한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에서는 해체주의가 매서운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해체주의에 대한 훨씬 긍정적인 평가가 제시된다는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제3장은 '삶의 형식(Lebensform)'이라는 비트겐슈타인 후기철학의 주요 개념에 대한 해석이 등장합니다. 이 개념은 비트겐슈타인 연구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강조되는 개념인데도, 정작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즉,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한 '삶의 형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다섯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a) '삶의 형식'을 언어게임과 동일시하는 관점, (b) '삶의 형식'을 행위의 묶음으로 보는 관점, (c) '삶의 형식'을 사회 문화적 삶의 양식으로 이해하는 관점, (d) '삶의 형식'을 유기체에게 고유한 생물학적 사실로 보는 관점, (e) '삶의 형식'을 인간에게 고유한 자연사의 사실로 보는 관점 말입니다. 이 책은 다섯 가지 관점 중에서 (뉴턴 가버가 제시한) 마지막 (e)의 관점을 바탕으로 수정된 해석을 제시합니다. (가버가 강조한 것처럼) '삶의 형식'이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자연사적 사실이지만, (가버가 주장한 것과는 달리) '삶의 형식'이 칸트식의 '초월적 조건(transcendental condition)'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삶의 형식'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관점(사람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볼 때 발견하게 되는 '사람의 자연사'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꼼꼼한 주석으로서도 가치를 지니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자주 제기되는 상대주의의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서도 주목할 만합니다. 만일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는 대로) 언어게임에서의 불일치조차도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를 전제한다면, 우리와는 다른 문화의 의의를 말하기 위해서조차 먼저 '우리 사람의 관점'이 모든 문화에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내용을 읽고서 받은 지적 충격 때문에 지난 겨울방학부터 논문을 한 편 써서 학술지에 투고해 둔 상태입니다. 물론, 책이 아직 출판되지 않았을 시점에 쓴 글이라 책 내용을 직/간접적으로 인용하지는 못하였지만, 이후에 수정할 기회가 생기면 이 책의 어떤 부분에서 영향을 받았는지를 논문에서 표시하려고 합니다. 이 책에 제일 첫 번째로 반응한 연구자의 지위(?)를 차지하고 싶다는 게 제 개인적인 소망입니다. 다른 많은 분들도 저처럼 이 책을 통해 지적 충격을 받게 된다면 좋겠네요.

6개의 좋아요

여기서 신뢰 100%를 얻습니다.

이 책과는 별개로 비트겐슈타인 입문서나 개괄서를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비트겐슈타인도 니체처럼 모른다는 사람이 없는 철학자라, 누구말이 진짜 믿을만한 것인지조차 간파하기가 어려워서 다른의미로 접근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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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학부 시절에 비트겐슈타인을 공부할 때 박병철 교수님의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를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입문서로서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저로서는 다소 동의하기 어려운 해석들(가령,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원자적 사실'은 러셀적 의미의 '감각-자료'다.)이 있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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