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의 <논리연구 2>에서 '표상작용'이라는 개념은 표상이론의 표상개념과 다른가요?

"하나의 표상작용이 특정한 대상과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는 것은, 표상작용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에 표상작용이 작용하기 때문이 아니다. 즉 말 그대로 그 대상에 대해서 무엇을 하거나, 마치 손이 펜을 가지고 쓰듯이 그 대상을 가지고 무엇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표상작용은 그 외부에 머무르는 것 덕분이 아니라, 오로지 표상작용에 고유한 특성 덕분에 일어난다(Hua 19/451[전집 제 19권, <논리연구 II.1> 451페이지])." (단 자하비, <후설의 현상학> 국역본 42p)

단 자하비는 이 구절을 인용하기 바로 전에, "지향성은 의식이 어떤 대상에 의해 영향을 받을 때 야기되는 외적 관계가 아니라, 의식의 고유한 본질적 특성이다.(국역본 41p)"라고 설명하는데, 그렇다면 저 인용문에서 "표상작용"은 "지향성"과 같은 의미인가요?

"표상작용은 그 외부에 머무르는 것 덕분이 아니라, 오로지 표상작용에 고유한 특성 덕분에 일어난다." (인용문) 에서 "표상작용"을 "지향성"으로 바꿔 읽으면, "지향성은 그 외부에 머무르는 것 덕분이 아니라, 오로지 지향성에 고유한 특성 덕분에 일어난다"로, 앞서 자하비가 서술한 것과 거의 같은 의미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 "표상작용"은 후설이 비판하는 "표상이론"에서의 "(인식되는 대상의 형식인)표상"과 다른가요? 만약 "표상작용"과 "표상이론에서의 표상"이 다르다면, 저 "표상작용"은 어떤 의미인가요?

한 가지 추가합니다. 제가 언급한 인용문이 인용된 (국역본 기준)42p의 바로 다음 페이지(43p)에서는
"표상작용의 지향적 대상은 그것의 실제 대상, 아마도 그것 외부의 대상과 동일하며, 따라서 양자를 구분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초월적 대상이 표상작용의 지향적 대상이 아니라면, 초월적 대상은 이러한 표상작용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 표상작용의 대상, 지향의 대상은 표상된 대상, 지향된 대상이고 그것을 의미한다(Hua 19/439p)."
라는 문장도 인용됩니다.

(1)

네, 저 인용문에서 '표상작용'은 후설의 '지향성' 개념에 대응합니다. 아마 더 정확하게는 '지향적 의식' 혹은 '지향적 의식의 활동'이라고 하는 것이 표현상 더 정확할 것입니다.

(2)

'표상'이라는 용어는 철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쓰입니다. (a) 표상주의에서의 '표상'이란 '실재'와 형이상학적으로 구별되는 내적 이미지를 의미하지만, (b) 굳이 그런 형이상학적 함의 없이 우리의 의식에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넓은 의미에서 '표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사유'라는 용어처럼 말입니다.) 후설은 후자의 의미로 '표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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