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자연과학의 명제가 왜 선험적 종합 명제(판단, 인식)인가요?

이것에 대해서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B17-B18에서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해당 부분에서 "운동의 전달에서 작용과 반작용은 같이야 한다." 를 칸트가 예시로 들고 있는데, 저것은 왜 선험적인가요? 운동의 전달을 경험하고 측정해본 결과 그것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 반작용은 작용의 2배였을 수도 있는데, 즉 우연적인데, 또한 "운동", "전달", "작용"이라는 개념이 "반작용"을 포함하고 있지를 않은데 저 명제는 왜 그럼에도 선험적 종합판단인가요?

여려 문헌/자료를 찾아봐도 수학적 명제에 대해서만 명료하게 설명되어 있고 저 순수 물리학 부분은 설명된 글이 안 보여서 질문 남깁니다..

1개의 좋아요

칸트 철학에서 '경험해서 알게 되는'과 '선험적'은 반대말이 아닙니다. 칸트 철학에 따르면, 가능한 모든 경험은 선험적인 것인 순수직관과 지성의 범주들에 의해 물자체로부터 온 것들이 주형된 결과물인 대상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반작용이 작용의 2배인 것으로 경험될 가능성이라면, 칸트는 그런 가능성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즉 뉴턴의 역학이 선험적 종합판단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칸트의 그 믿음은 칸트의 경험 개념을 전제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인과성 등등의 경험의 틀이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만으로는 뉴턴의 역학같은 특정한 인과 메커니즘 주장들의 필연적 참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2개의 좋아요

자연과학의 원리들은 단순히 "운동의 전달에서 작용과 반작용은 같아야 한다"고 하지 않고 "모든 운동의 전달에서" "항상" 그렇다고 말하지요. 경험 몇 번 한다고 그걸로 '모든 경우'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나요? 아주 많은 경험을 한다면 달라질까요? 아무리 그래도 경험으로는 이 원리가 담고 있는 필연성을 (칸트에 따르면) 결코 찾을 수가 없지요. 이게 흄이 기여한 바겠죠. 그것이 필연적이므로 선험적이라고 하는 것이구요. 두 번째로는 잘 지적하셨듯, "운동의 전달" 개념은 "반작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분석 판단이 아니라 종합 판단입니다. 따라서 이것들은 (칸트에 따르면) 선험적 종합 판단입니다. 필연적이면서도, 주어 개념보다 많은 것을 알려주는 명제이니까요.

2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