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동양철학, 그 중에서도 맹자 윤리학에 대한 글이다. 맹자 윤리학 전반을 바라보는 나의 입장을 밝힌다. (글자수 제한 때문에 나눠 올립니다.)
맹자의 도덕철학에서 핵심적인 사항 중 하나는, 그가 도덕적 '옳음'에 대해 별로 설명을 안 한다는 것이다.(물론 구성가능한 설명이 있긴 하지만, 그의 철학 체계에서 그리 비중있는 부분은 아니다.) 물론 맹자 텍스트에서 '옳음'에 해당할 수 있는 개념인 義는 많이 언급된다. 그러나 맹자는 義라고 불리우는 x가 왜 義인지 설명하기보단('사람이 따라야 할 길'이라는 식의 설명은 나오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왜 x가 사람이 따라야 할 길인지]에 대한 정당화이다. ), 그러한 x가 義라고 단지 선언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의 관심은 도덕이 갖는 규범성의 원천을 해명하는 작업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도덕적 행위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감정을 갖도록 할 수 있을까?]에 더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철학에서 감정과 규범성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여기서 맹자가 말한 확충 개념이 도입될 수 있다.
맹자 윤리학에서 중심적인 문제는, 주어진 상황에서 그 상황에 맞는 (도덕적으로) 적절한 감정을 느끼는 문제이다. 이는 맹자 텍스트에 등장하는 類 개념으로 설명된다. 먼저 2A6(맹자 공손추 상 6)에 등장하는 '유자입정(孺子入井)'의 사례(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그 아이를 측은 여기는 마음이 들게 된다.)를 보자.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상황에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렇게 반응하게 될 것이다. 물론 반례도 찾을 수 있겠지만, 비교적 확실한 건 이 맹자의 지적은 우리에게 호소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즉 실제로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맹자는 결코 '모든 상황에서'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그 상황에 마주하기만 하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갖게 될 공통적인 반응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이러한 반응을 갖게 되는 상황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이 제한된 상황을 제외한 다른 상황에선, 그 상황에서 사람이 느껴야 할 적절한 감정은 있겠지만, 그 상황을 마주했을 때 모든 사람이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같은 제한성을 벗어나 윤리를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맹자의 개념이 바로 類이다. 즉 측은지심을 가져야 할 상황, 그러한 상황의 집합으로서의 類가 있다. 유자입정의 상황은, 이 類에 속하기에 우리가 (그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서) 측은지심을 가져야 하지만, (이러한 당위가 무색하게) 실제로 모두가 측은지심을 갖게 되는 상황이다.(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굳이 당위를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類에는 우리가 측은지심을 가져야 하지만, 아직 실제로 가지지는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아프리카 난민들의 상황을 다루는 TV 프로그램을 보게 된 상황을 살피자. 이 상황에선 모두가 그 난민에 대한 측은지심을 갖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혹자는 그저 무심할 수도 있다.
즉 내가 강조하려는 포인트는 이것이다: 유자입정의 상황만큼 사람들이 일률적으로, 그 상황을 접하자마자 즉각적으로 발현될 공통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경우가 '아닌' 상황은 충분히 많을 것이다. 이런 상황 중에서 우리가 실제로는 측은지심을 갖지 못하더라도, 측은지심을 가져야 할 상황이 있을 것이다. 즉 측은지심을 가져야 할 상황 중에서도, 측은지심을 가지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경우와 쉬운 경우가 있다. 가장 쉬운 경우는, 유자입정의 상황과 같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상황을 접하자마자 아이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갖게 될 상황일 것이다.(이를 '기초 사례'라 하자.) 이 상황에선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나 실제로 측은지심을 가지게 될 것이므로, 가장 측은지심을 가지기 쉬운 경우다. 반면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 상황에서 측은지심을 실제로 느끼기에는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의미에서) 너무 어려운 경우도 있을 것이다.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이 바람직할 상황의 집합, 즉 그러한 類 내에서, 유자입정의 경우와 같이 내가 실제로 측은지심을 갖게 되는 경우를 기반으로, 내가 측은지심을 가져야 했으나, 기존에는 그러지 못했던 상황에서도 측은지심을 점차 실제로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 확충이다. 나는 내가 측은지심을 갖게 되는 상황 수(數)를 점차 늘려나가게 될 것이며, 확충의 궁극은 측은지심을 가져야 할 類에 속하는 모든 상황에서, 내가 실제로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확충의 궁극에 도달한 사람은, 윤리적 행위가 요구되는 상황에 그저 그 행위를 하기에 적합한 감정을 갖고 그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는 충분히 '민감'해져 있어, 그러한 감정으로, 마치 유자입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꼭 그 행위를 해야 한다는 의식 없이도) 윤리적 행위를 하게 될 것이다. 즉 그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윤리적 행위를 야기할 정도가 되는 수준의 감정이다.(맹자의 수양론을, '동정심 자체의 민감도를 높이는 문제'로 파악한 연구로, 김도일 선생님의 「맹자의 감정 모형 - 측은지심은 왜 겸애와 다른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