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인 인식"이 무엇이며 가능한 개념인가요?

칸트 순수이성비판을 읽고 있는데 "모든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인 인식[...]"이라는 말이 나와서 이것이 가능한 개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질문 남깁니다.

해당 대목은 KrV A79=B104 입니다.

"여러 표상들은 분석적으로 한 개념 '아래로' 보내진다. (이것은 일반 논리학이 다루는 일이다.) 그러나 표상들이 아니라, 표상들의 '순수 종합'을 개념들'에게로' 가져가는 일은 초월 논리학이 가르쳐 준다. 모든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인 인식을 위해 주어져야 할 첫째의 것은 순수한 직관의 '잡다'이다. 상상력에 의한 이 잡다의 '종합'이 둘째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인식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 순수한 종합에 '통일성'을 주며 오로지 이 필연적 종합적 통일의 표상에서 성립하는 개념들이 나타나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위한 셋째의 일을 하며, 그것들은 지성에 의거하고 있다."
(순수이성비판 1, 백종현 역, 아카넷, 2006, 297p)

(여기서 작은따옴표는 칸트의 강조입니다.)

(1) <모든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인 인식>이 무엇인지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상에 대한 인식"은 본질적으로 "경험적"인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일부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인 인식"도 아니고 "모든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인 인식"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요? 저 말은 곧"대상을 선험적으로 인식"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가능한가요?

(2) 칸트에서 종합과 통일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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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제가 저 "모든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인 인식"을 잘못 읽은 것이라면, 저것을 "모든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인, 인식을 위해 주어져야 [...]"(풀어서 말하면, <대상들을 인식하기 위해 선험적으로 주어져야 하는[...]>) 로 읽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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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이렇습니다.

Das erste, was uns zum Behuf der Erkenntnis aller Gegenstände a priori gegeben sein muß, ist das Mannigfaltige der reinen Anschauung

전공자가 아니기에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댓글에서 말씀해주신 해석이 더 그럴듯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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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rst thing that must be given to us a priori for the cognition of all objects is the manifold of pure intuition; the synthesis of this manifold by means of the imagination is the second thing, but it still does not yield cognition. The concepts that give this pure sythesis unity, and that consist solely in the representation of this necessary synthetic unity, are the third thing necessary for cognition of an object that comes before us, and they depend on the understanding.

위 번역으로도 보아 말씀하신 대로 "선험적 인식"이 아니라 "인식을 위해 선험적으로"가 적절한 이해일 듯 합니다. 그리고 해당 인용문에도 일부 설명되었듯이, 통일(Einheit)은 지성에 의한 개념의 기능이고, 종합(Synthesis)은 그 전단계로서 상상력(Einbildungskraft)에 의해 직관의 잡다를 하나의 대상으로 연결하는 작업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초월적 통각에 의해 '종합 ⇒ 대상의 통일 ⇒ 통각 ⇒ 자아의 통일,' 즉 "표상들이 내게 속함"(자기의식)이 이루어집니다. 아래 설명을 참조하세요.

칸트에 따르면 “표상들이 하나의 의식 안에 결합될 수 있어야” 나는 그 종합을 의식함으로써 비로소 나의 동일성을 의식할 수 있다. 바꿔 말해 “책 앞에 모니터가 있다”라는 종합이 가능해야만, 표상들이 한 의식에서 통일되어 하나의 세계가 내 주위에 펼쳐져 있어야만, 그 종합/통일을 의식함(나는 책 앞에 모니터가 있다고 생각한다.)으로써 각 표상들에서 나의 동일성에 대한 의식(나는 <책의 표상에서 나 = 모니터의 표상에서 나>라고 생각한다.)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강지영 교수, '칸트의 초월적 통각 이론에서 자아의 동일성에 대한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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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어떤 판을 사용하고 계시나요? 제가 갖고 있는 백종현 번역판에서는 원문의 'a priori'가 '선험적인'이 아니라 '선험적으로'로 번역되어 있네요.

모든 대상들에 대한 인식을 위해 선험적으로 주어져야 할 첫째의 것은 순수한 직관의 잡다이다. (A78-79=B104)

추측컨대 백종현 선생님도 원문의 'a priori'를 부사적인 표현으로 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서 번역을 고치신 것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원 텍스트에서의 맥락과는 별개로, "모든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인 인식"을 그냥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특히 저 "모든 대상"이라는 말이 "경험의 대상 일반"을 뜻한다면 말이죠. 왜냐하면 지성과 감성의 형식들은 모든 경험적 대상에 적용되는 형식들이고, 따라서 경험에 주어지는 대상은 어떤 대상이 되었건 시공간상에 나타나야 하고 범주를 통해 사고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물체는 공간을 점유한다", "대상은 시간 속에서 실체로 존속한다" 같은 명제는 모든 대상에 대한 인식이지만 선험적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의 구절들을 참조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가능한 경험의 대상에 대한 것 이외에는 어떠한 선험적 인식도 가능하지 않다. (B166, 인용자 강조)

물체적인 것이든 물체적인 것이 아니든, 여러분이 어떤 한 객관에 대한 여러분의 경험적인 개념으로부터 경험이 여러분에게 알려준 모든 성질들을 제거한다면, 그래도 여러분은 그것으로부터 여러분이 그것을 실체라고 또는 실체에 속하는 것[속성]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성질을 빼앗지는 못할 것이다. (B6)

물론 당연히도 "모든 대상에 대한 선험적 인식"이라는 말을 자동차를 보지도 않고 자동차에 대해 안다는 식의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건 명백히 불가능합니다.


종합과 통일의 개념에 대한 칸트의 설명은 순수이성비판 여러 곳에서 다발적으로 제시되는데, 그 개념 정의와 상호 관계가 너무 복잡하고 제가 그 문제를 명쾌하게 해설할 수 있을 만큼 칸트를 깊게 공부하지 못해서 2번 질문은 다른 분께 넘기겠습니다. 저 개념들의 의미는 A판과 B판 초월적 연역의 차이라는 난해한 문제와도 얽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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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해보니까 오히려 1판 1쇄(2006)에서 "선험적으로" 라고 되어 있고 1판 26쇄(2020)에서 "선험적인" 이라고 되어 있네요.

그렇군요. 제가 갖고 있는 게 2016년에 나온 18쇄인데 그 사이에 '선험적으로'가 '선험적인'으로 고쳐진 것 같네요. 여하간 해당 구절에 대한 제 생각은 위에 서술한 대로입니다.

26쇄 넘게 찍은게 싱기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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