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헤겔 철학은 영미권 철학에서 오랫동안 거부되었거나 겨우 주변부에서만 다루어져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매우 놀랍지만 분명하게 감지되는 헤겔로의 귀환이라는 경향이 관찰되고 있다. 영미 철학에서 헤겔은 이제 헤겔 연구자들조차 놀랄 정도로 다시 활발한 논의의 중심에 서 있다.
분석철학의 헤겔로의 귀환을 계기로 현대 영미 철학과 대륙 철학 사이의, 그리고 자연주의적 철학과 관념론적 전통 사이의 오랜 냉전 기간이 지나고, 진기하고 놀랄 만한 담론이 생겨나서 활기를 띠고 있다. 이제 막 시작된 활발한 담론들은 헤겔 연구자들과 분석철학자들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고 그들 사이의 교류를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대륙 철학과 분석철학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반적 논쟁에 중요하고도 미래 지향적인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철학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국면을 형성할 것이다.
한국헤겔학회의 학술지인 『헤겔연구』의 별책으로 『현대 영미 철학에서 헤겔로의 귀환』이 이번에 출판되었다고 하네요. 2018년에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중심으로 책이 편집된 것 같습니다.
국내에서도 한국헤겔학회를 중심으로 분석적 헤겔 연구가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저에게는 참 고무적이네요. 2005년에 비토리오 회슬레라는 국제적인 헤겔 학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왜 일본에서는 셀라스, 브랜덤, 맥도웰을 활발하게 연구하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느냐고 회슬레가 의아해했을 정도로 이 분야가 국내에서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거든요. 이제는 분석적 헤겔을 주제로 국내에서 논문집까지 나올 정도가 된 걸 보면, 지난 15년 사이에 국내 헤겔 연구에 꽤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제서야 분석적 헤겔 연구가 국내에서도 주목받는다는 건, 우리의 학술적 환경이 여전히 국제적인 ‘트렌드’를 따라가기에는 많이 느리다는 방증인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해요. 물론, 트렌드를 따라가는 게 반드시 좋거나 필수적인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1980년대 말부터 영어권에서는 일찍이 주목받았던 논의가, 무려 40년이 지나서야 겨우 이런 논문집이 나올 정도가 되었으니, 좀 지나치게 느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네요.
게다가, 2018년에 한국헤겔학회의 국제학술대회가 있고나서, 그 바로 다음 해인 2019년에 분석적 헤겔 연구에 한 획을 그은 브랜덤의 대작 A Spirit of Trust가 출판되었다 보니, 저 논문집에는 브랜덤의 최근 성과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지는 못했네요.
또, 논문집에 기고하신 분들이 (이병덕 교수님을 제외하면) 전부 헤겔 연구자들이고 분석철학 연구자가 아니셔서, 분석적 헤겔 연구가 실제 분석철학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하는지를 자세히 다루고 있지 못하다는 점도 개인적으로는 좀 아쉽네요.
국내의 분석적 헤겔 연구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먼 것 같지만, 그래도 이번 논문집 출판을 계기로 이 분야에 대한 담론이 더 활발해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