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플래쉬'와, 니체 '위버멘쉬'

영화 '위플래쉬'는 찬사와 논란을 동시에 받으며 크게 화제가 되었던 영화이다.
이 영화가 이토록 논란이 되었던 이유는 아마도 가학적인 장면들과 함께 결말에 대한 해석이 여러모로 갈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말이 해피엔딩인가 배드엔딩인가에 대해 여러 해석이 갈리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선 해피엔딩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한번 생각해보자 주인공 앤드류는 어머니없이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 어머니의 사랑도 적절히 받지 못했고 본인의 유일한 꿈인 드러머에 대해 아버지와 친척들은 탐탁치않게 여기면서도 일류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지루하고 스스로에게 긴장감을 주지않는 교수 밑에선 배울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대머리) 플래처 교수를 만나게 되고 지독하게 가학적이며 폭력적인 교육방법에도 그는 다시 딛고 일어선다.
그리고 자신의 위대한 꿈인 드러머를 실현시키기 위해 과감히 여자친구에게도 이별을 통보하며 스스로의 저열한 욕구를 지배시키는 모습까지
교통사고로 온몸에 피철갑을 두른채로 공연을 하러가는 정신력까지 지녔다.(물론 잘 안되긴 했지만)

영화 마지막 부분엔 플래처교수의 비열한 복수에 굴복되어 무너지는것이 아닌 스스로 드럼을 치며 리드하는 마지막 격정의 10분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을 끝으로 영화는 마치게 된다.

어찌보면 앤드류는 미친 광인처럼 보이나 일반인들에게 초인은 마치 광인처럼 보일것이다.
플래처의 교육방침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 그 엄청난 고통을 딛고 일어나 극복하여 위대한 예술가로서 재탄생되는 이 영화는 그야말로 자기극복 초인의 모습이 아닌가!

나역시 이 영화를 처음봤던 학생때 엄청난 충격과 함께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아! 무언가에 미치도록 노력하고 고난을 이겨내면 결국 위대한 인물로 재탄생 하는 교훈이군!"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앤드류는 자기극복을 해낸것이 아닐 뿐더러 스스로의 힘이 증대되는 느낌에서 즐거움을 얻는것이 아닌 플래처 교수에 대한 광적인 인정욕구 충족에 가깝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주인공 앤드류의 가정사를 다시 봐야 하는데, 앤드류의 아버지는 드러머라는 직업에 대해 탐탁치않아 하며 친척들에게 드러내보이고 싶지 않아한다.
그로인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꿈을 인정해주고 칭찬해준
플래처 교수를 정신적 아버지로 여겼고 생물학적인 아버지에게는 받지못한 인정과 관심을 받기위해 더욱 동경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앤드류는 플래처 교수의 가학적 교육방침을 딛고 일어나 자신이 성장하는 발판으로 사용한 것이라기 보단,
애정결핍의 아이가 가정학대범인 아버지에게 집착하며 관심을 요하는것에 더 가까운 행위 인것이다.

앤드류는 실제로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했고 드럼이 아니면 달리 할일도 관심도 없었다 그에겐 플래처 교수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갈곳이 없는것이다.

즉 스스로의 본능을 통제해 자신의 목표에 에너지를 쏟는것이 아닌 인정받을 대상에게 집착해 잃을까 두려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홀로 서는것에 대한 '두려움' → '나약함' 에 기인한 행동이고
이는 니체가 가장 극도로 혐오한 형태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나라에선 해피엔딩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유독 많았을까?
아마도 주인공 앤드류는 자기극복의 긍정적인 모습이 아니지만 결국 마지막엔 스스로의 한계를 돌파해 위대한 예술가로써 성장할수 있었는데 그러면 된거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결과 중심적 사고)이 많아서 그런듯한데
주인공의 연주실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것은 사실이나 결국 그는 스스로 홀로서지 못하며 더욱 강력한 인정중독에 집착할것이고, 무엇보다 자신이 그렇게 혐오하던 가학적 교육방식에 굴복해 버린 것이다.

결론적으로 니체의 자기극복은 겉으로 드러나는 형태가 아닌 행위자의 '의지'가 어디서 기인한건지,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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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라면 1972님이 말씀하신 대로 앤드류를 비판했을 것 같긴 하지만, 과연 타인에 대한 인정과 완전히 무관한 (니체적 의미의) 자아 실현이라는 게 가능할 수 있을지 저는 의문스러워요. 헤겔이나 라캉이나 호네트 같은 철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회적 존재인 이상 우리의 욕구 실현이란 언제나 타인(혹은 타자적 규범)의 인정을 통해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모든 인정 관계와 무관한 자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모든 연장성과 무관한 데카르트적인 '생각하는 사물(res cogitans)'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저에게는 허구적이라고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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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철학과 관련된 몇몇 논쟁 가운데 하나가 2000년대 즈음부터 발생한 ‘니체철학을 정치철학으로 볼 수 있는가?’입니다. 전통적으로 말씀하신바와 같이 니체철학은 개인과 관련된 개인주의(individualism/egoism)철학으로 읽혀왔으며, (일반적으로) 반대 급부로 여겨지는 공동체와는 대립관계에 있다고 읽혀왔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정치철학으로 여길 수 있다는 입장이 우세한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방법에도 다양한 라인이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가 가치의 인정과 불인정의 끊임없는 경쟁 구도를 가진 사회를 니체가 이상사회로 그렸다고 보는 독법입니다. 보통 agonistic communitarian 등 으로 불립니다. 이에 따르면 호네트가 말하는 인정 개념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타인과 고립된 상태로는 위버멘쉬/귀족적개인 등으로 거듭나지 못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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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것과 관련된 글이나 논문을 추천해주실수 있나요? 관련 전공자가 아닌지라 정치철학으로 읽는 새로운 시각이라 꼭 알아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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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인정없이 사회적으로 완전히 독립한 (니체적) 자아 실현이 가능한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의 욕구 실현이 타인의 인정을 통해 일어나는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고 니체가 그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자체를 아예 부정하지는 않았을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단순히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있는것과 달리, 타인에게 집착하며 인정받지 못해 불안해 하는 모습은 그 의지가 '나약함'에서 기인되었기 때문에 부정한 것이지 타인과 연관된 사회성을 띄기 때문에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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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곤적 정치철학자 니체 독해에 관한 글은 Nietzsche's "Great Politics" and Zarathustra's New Peoples(Loschenkohl, B 2020), Agonal Communities of Taste: Law and Community in Nietzsche's Philosophy of Transvaluation(H. W. Siemens, 2002)을 추천드립니다.
정치철학자로 니체를 독해하는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서는 Nietzsche as Political Philosopher(Manuel Knoll and Barry Stocker, 2014)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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