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말에 읽기 시작한 셀라스의 『경험론과 심리철학』을 다 읽었다. 옛날에 브랜덤의 스터디 가이드를 읽고 몇몇 부분들을 공부해보기는 했지만,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험론과 심리철학』은 콰인의 「경험론의 두 가지 독단」,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등과 더불어 분석철학의 흐름을 선도한 논문이면서, 셀라스 자신의 철학에서도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논문이다.1 그리고 로티, 드브리스와 트리플렛, 브랜덤 등 여러 철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굉장히 난해한 글이다. 이 글이 단행본 기준으로 105쪽짜리 논문인데, 일단 분량도 많을뿐더러 글 전개도 다소 산만하다. 글의 초두에 논문 전체의 문제를 제시한 뒤 이 문제를 제쳐놓고 이 부수적인 여러 입장들을 다루고 비판하다가 한참 지나 맨 뒤에 가서야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문을 읽다 보면 정확히 이 부분이 논문 전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기 어려우며, 논문 전체의 논의 방향을 읽지 못하고 헤매기 십상이다. 나도 드브리스와 트리플렛의 탁월한 해설서 『지식, 마음, 소여』를 참조하지 않았더라면 읽다가 포기하거나 완독에 훨씬 오래 걸렸을 것이다.
게다가 셀라스가 자신의 것과 반하는 철학적 입장들을 공박한 후 배제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헤겔이 하듯이) 각각의 입장이 지니는 이론적 의의를 온당하게 평가하고 자기 이론의 일부로 수용하기 때문에 논점이 굉장히 미묘해진다. 셀라스가 수많은 철학적 입장들 가운데 줄타기를 하고 있는 까닭에, 그가 정확히 어떤 주장을 하고 있는지를 콕 집어내기가 매우 어렵다. 예컨대 셀라스는 물리주의자이지만 환원적 물리주의자는 아니고, 행동주의자이지만 라일식 행동주의자는 아니고, 경험론자라고 할 수 있지만 전통 경험론과 결별하고, 지각적 지식이 다른 지식들의 심급이 된다고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전통 토대론자는 아니며, 하나의 지식이 다른 지식과의 추론적 연결망 속에서 비로소 얻어진다고 보지만 전통 정합론자도 아니다. 심지어 그는 감각 자료 이론을 공박하면서도 감각 자료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그러나 감각 경험이라는 대주제를 둘러싸고 산만하리만치 검토되는 다양한 세부 주제들은 심리철학, 언어철학, 인식론, 과학철학, 형이상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셀라스의 철학적 위치를 정교하게 설정해준다. 누군가 말했듯이, 파편적으로만 철학하는 철학자들은 인식론에서 이런 입장을 취하고 언어철학에선 저런 입장을 취하고 심리철학에선 그런 입장을 취하다 보니 글을 다 모아놓고 보면 총체적으로 비정합적인 철학을 만들고는 하는데, 『경험론과 심리철학』의 얼개를 파악한다면 ‘보임’ 개념에 관한 테크니컬한 분석에서부터 인간의 현시적 상과 과학적 상이라는 거대한 물음에 이르기까지 셀라스가 일목요연한 철학적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셀라스의 입장이 까다롭다는 것은 그가 기존에 등장한 이론들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그 통찰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철학적 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가 전방위적으로 행한 소여의 신화 비판은 그가 초두에 언급한 대로 감각 경험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자, 선험성, 제일원리 등 다양한 것을 주어진 것으로 상정하는 입장에 적용될 수 있으며, 폭넓은 주제들에 대해 그가 여러 군데에서 스케치한 패러다임은 철학의 다양한 영역 곳곳에서 활용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철학적 관점들의 맹점들을 비판하면서도 그 문제의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해석을 통해 그 이론들의 통찰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내가 거부해야 할 철학적 입장들을 공박하고 논의 지형 속에서 내 견해를 세련되게 포지셔닝할 모범적인 본이 된다. 당시 풍조와는 다르게 유별나게 철학사의 고전 철학자들을 주의 깊게 공부했던 셀라스의 언급에서 그런 성향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철학사 없는 철학은, 공허하거나 맹목적이지 않더라도 최소한 우둔하다.”2 이러한 태도가 편향된 관점에 치우치거나 단순하고 거친 입장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세련되게 철학하는 법의 첫걸음일 것이다.
공들여 읽은 만큼 이곳저곳에 많이 활용할 생각이다.
1)Rorty, R., Introduction to Emp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 Wilfrid Sellars,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7, 1-2.
2)Sellars, W., Science and Metaphysics, London: Routledge, 196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