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의 이 부분이 오역인 것 같습니다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 이 부분이 오역인 것 같습니다.

니체를 어느정도 읽고 난 후 짜라두짜를 읽었는데,
좀 부분 부분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이상하다고 보여지는 부분 하나를 골라 깊게 분석해봤습니다.

차라투스트라 제2부 12장 "자기 극복에 대하여"에서 박성현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자네에겐 진실에 대한 의지 하나만 있어야 돼.
진실에 대한 의지가 힘에 대한 의지 자체가 돼야 돼.
특히 선과 악에 대해서 혹은 가치 평가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오직 진실에 대한 의지 하나를 믿고 나가야 해!"

이 부분을 계속 분석했고, 저는 이 번역이 니체의 근본 사상을 오독할 수도 있는 좀 심한 오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이 내용에 대한 사진들을 찍어왔습니다. 봐 줬으면 좋겠습니다.

A1.
일단, 두행숙, 정동호, 황문수를 포함한 한국 번역에 어디서도 이렇게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진리에의 의지라는 것이 힘에의 의지의 일부일 뿐이라고 해 두었죠. (드랍박스 링크에서 A - 다른 번역가 에 다른 번역가의 번역이 있습니다)

A2.
짜라두짜를 둘러봤고, 거기에서 이렇게 각주를 달아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20210705_203741247.jpg)
"힘에 대한 의지는 자연 상태에서 이미 모든 생명에게 존재함. 힘에 대한 의지를 승화시킨 것이 진실에 대한 의지임."
확실한 충돌이 생겼습니다.

B.
그저 번역본을 비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비판이 되지 않을 거 같아 니체의 다른 책을 둘러보게 되었고, 이것이 결과입니다.

B1.
유명한 "신은 죽었다"라는 문구는 즐거운 학문 125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이 5부의 시작인 즐거운 학문 343에서 나오는데요, 그 바로 다음인 즐거운 학문 344에서 "진리에의 의지"의 비판이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B - 즐거운 학문 344)
『』
『'진리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 진리와 비교하면 그밖에 다른 모든 것은 이차적인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다' - 이러한 진리에의 무조건적인 의지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더 고약한 것일 수도 있다. 즉 삶의 적대적인 파괴의 원칙으로서의 "진리에의 의지", 그것은 숨겨진 죽음에의 의지일 수 있는 것이다. - 이렇게 해서 왜 학문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도덕의 문제로 환원된다. 삶, 자연, 역사가 "비도덕적"이라면 도대체 왜 도덕이 존재하는가?』

B2.
이 즐거운 학문 344는 바로 도덕의 계보에서도 인용되고 있습니다. 3부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서 나오는데, 특히 과학자를 다루는 23과 24 부분이 주목해볼 만 합니다. (B - 도덕의 계보 3부 23-24)

『과학이 아직 열정, 사랑, 열망, 고뇌인 경우에도, 그것은 금욕주의적 이상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가장 새롭고 가장 고귀한 형식 자체이다.』
『만일 내가 이러한 수수께끼를 푼다면, 이러한 명제로 풀고자 한다! '그들은 결코 자유 정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진리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프랑스 학문은 독일의 학문에 대해서 일종의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금욕주의를 강요하는 것, 즉 진리를 향한 저 무조건적 의지야말로 금욕주의적 이상 자체에 대한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은 하나의 형이상학적 가치, 즉 진리의 가치 자체에 대한 신앙이고...』
『여기서 우리의 과제를 규정해보자. 우리의 과제는 진리의 가치를 시험 삼아 한번은 문제 삼아 보는 것이다.』

여기서 "프랑스 학문"이라는 서술이 나오는데, 박찬국은 이것을 콩트식의 실증주의자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콩트와 그 외의 프랑스 학자를 찾다가, 우상의 황혼에서 콩트를 다룬 부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B3.
다음은 우상의 황혼입니다. (B - 우상의 황혼 르낭 콩트)

제 3장 "종교적인 것"에 있습니다. 콩트를 언급하는 부분에 르낭이라는 사람이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에서, 2는 르낭을 지시하며, 4는 생각하건대 콩트를 지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과학과 고귀함을 하나로 묶고 싶어한다. (주석에서) "르낭은 과학이 귀족주의적인 기원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는 귀족주의를 표방하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것과 반대되는 가르침인 그리스도교 앞에 무릎을 꿇는다.』
『4. "그리스도의 모방"은 손에 들고 있으면 생리적인 거부감이 느껴지는 책들 가운데 하나다. ...이 냄새를 견뎌내려면 우리는 프랑스인이 되어야 한다. ...콩트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주석에서) "본래 종교와 형이상학을 배격하고 과학을 인간 정신 최후의 단계라고 보았던 실증주의자 콩트는 나중에는 신비주의에 빠져 인간성을 숭배하는 인류교를 제창했다. 이 종교는 가톨릭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하여 동시대인에게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인류교에 대해서는 저에게 굉장히 흥미롭지만, 일단 니체가 여기에서 말하는 게 더 많은 것 같습니다.

B4.
유고에도 확실히 있었던 거 같으나, 못 찾겠어서, kaufmann의 will to power에서 찾았습니다. 481입니다.

『Against positivism, which halts at phenomena-"There are only facts"-I would say: No, facts is precisely what there is not, only interpretations. We cannot establish any fact "in itself": perhaps it is folly to want to do such a thing.
"Everything is subjective," you say; but even this is interpretation. The "subject" is not something given, it is something added and invented and projected behind what there is.- Finally, is it necessary to posit an interpreter behind the interpretation? Even this is invention, hypothesis.
In so far as the word "knowledge" has any meaning, the world is knowable; but it is interpretable otherwise, it has no meaning behind it, but countless meanings.- "Perspectivism." It is our needs that interpret the world; our drives and their
For and Against. Every drive is a kind of lust to rule; each one has its perspective that it would like to compel all the other drives to accept as a norm. 』

그러므로, 니체는 실증주의를 거부하려고 했고, 그것을 위해 그가 쓴 방안이 관점주의였다는 것이 여기서 보여집니다.

따라서 제 결론은, 박성현의 번역 중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니체의 신심 비판을 오독하고,
실증주의의 비판을 오독하며,
니체가 새로운 학문을 위해 관점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하려고 한 시도를 전면에서 거두어버린 심각한 오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옳은 것인지 님들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또한, 오귀스트 콩트의 후기, 특히 인류교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관련 책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p.s. (그런데 관점주의가 뭔가요? 이것은 상대주의이거나, 상대주의의 문제점(예를 들어 자기 논박)을 그대로 안고 가는 것 아닌가요?)

박성현은 니체 전문가도 아니며 철학 전공도 아닙니다. 비전문가의 번역에서 오역이 속출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따라서 신빙성 없는 번역본보다는 믿을 만한 전공자에 의해 번역된 판본을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https://plato.stanford.edu/entries/nietzsche/#Pers

니체 관점주의 관련 항목입니다!

읽고는 있는데, 역시 좀 무서울 정도로 "상대주의적인 면"이 있는 거 같습니다. (상대주의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which would of course be contingent."라는 말처럼, 이 정도로 contingent, 즉 우연적이고 해체적이라면, 오히려 이것으로 형이상학적인 것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 오히려 형이상학을 수용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요.

"적어도 니체 자신의 주장 중 일부는 그의 진리 부정의 범위를 벗어나야 한다는 가정(Hales and Welshon 2000), Nietzsche는 "진리"가 서로 다른 sense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Schacht 1983; Anderson 1998, 2005), Nietzsche가 말년에 진리에 대한 부정을 결국 포기했다는 발전적 제안(Clark 1990, 1998)이 있다"는 건 처음 들어보는 말이네요. 다 90년대 논문인 걸 보니 지금으로는 저는 정말 하나도 알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듭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