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철학 교재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

(0) 요근래 읽어본 분석철학 관련 교재에 대한 이것저것 평가입니다.

(1) 언어철학

우선 학부 때는 박병철의 "쉽게 읽는 언어철학"으로 공부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맨날 수업 시간에 졸았던 기억 말고는 없습니다. (...)

이번에 번역된 윌리엄 라이칸의 "현대 언어철학"(루트리지 시리즈)은 굉장히 훌륭한 책이라 생각됩니다. 비록 몇몇 부분은 지나치게 간결해서 보조적 자료(SEP)가 있어야 이해되지만, 초심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꽤 요근래 연구(4부가 표현과 비유입니다. 여기서 요근래 핫한 비하표현(slur)이 조금 다루어집니다)까지 포괄한다는 점에서 유용합니다.

콜린 맥긴의 "언어철학"은 언어철학에서 중요한 10가지 논문을 맥긴이 해석하고 비평한 책입니다. 처음부터 읽기에는 조금 난이도가 있다 생각됩니다. 라이칸 책을 읽고 관심이 있으면 이 책으로 넘어가는 게 나아 보입니다.

(2) 심리철학

학부 때는 김재권의 "심리철학"으로 공부했습니다. 여전히 훌륭한 교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서술이 좀 딱딱하고 논문 같은 느낌이 있어서 초심자에게는 거부감이 들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수학을 싫어하는데 수학의 정석을 가져다 놓고 공부하라는 느낌이랄까요..?)

반대로 이안 라벤스크로프트의 "심리철학" 역시 구성은 김재권과 거의 흡사한데, 그에 비해서 좀 쉬워진 텍스트입니다. 진짜 학부 1학년한테 읽힐만한 교재랄까요? 완전 초심자라면 추천합니다. 그리고 김재권에서는 느슨하게 다루어지는 '의식'과 감각질 문제가 살짝 상세하게 다루어지는 점도 꽤 괜찮은 부분입니다.

(3) 인식론

마타이스 슈토이프의 "현대 인식론 입문"이라는 교재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학부 4학년 때 독학했었던 기억이 있는데, 딱딱하고 그닥 재미는 없었습니다. 또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올드한 교재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원판은 95년 교재입니다.)

이것 말고 좀 더 얇고 재미있는 학부 1학년용 책이 하나 번역된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목이 기억이 안 나네요. 지식 어쩌고 였는데.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책은 영어로 된 Robert Audi의 "Epistemology - A Contemporary Introduction"입니다. 이 책은 라이칸 책처럼 루트리지 인트로덕션인데,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 책을 참 좋아합니다. (국내 번역서로는 마이클 루의 "형이상학 강의"와 노엘 캐럴의 "예술 철학"이 이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이 책의 장점은 00년대 이후 인식론의 중요한 흐름이랄까, 그것들을 모두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50년대 이후 인식론이 게티어 문제에 대항해서 지식의 조건 + A를 어떻게든 정의하려던 시대로 보입니다. (예를 들어 콰인을 이어받아, 자연화된 인식론으로 이끌린 사람들도 있고, 양상 논리를 활용해서 보다 엄격한 조건을 만들려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제 그런 시도들이 모두 불만족스럽게 끝나고, 덕 인식론과 회의주의/상대주의/맥락주의 같은 국소적 맥락에서 인식론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00년대 이후에 꽤 많이 주류로 부상했다 보입니다.

또한 그동안 인식론에서 핵심적으로 다루어지던 '감각지각' 혹은 '아프리오리[경험독립적] 지식'이라는 지식의 원천에서 벗어나, 감각 지각 - self knowledge - 증언 - 아프리오리한 지식 등 여러 지식을 다루는 것도 하나의 경향이 되었습니다.

나아가, 인식론의 핵심인 "앎"이라는 (명제) 태도 (혹은 심적 상태)가 믿음, 감정, 희망 등의 다른 상태와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 연구하는 것도 하나의 경향으로 보입니다.

Audi의 장점은 이러한 문제들을 다 골고루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4) 과학철학

번역서 중에서는 피터 고드프리스미스의 "이론과 실재"가 있습니다. 이 책의 장점은 과학 철학에서 중요한 학파들의 역사와 토픽들을 모두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단점은 고드프리스미스 본인의 관점이 강하게 투영되어서, 과학실재론 - 자연주의 - 경험주의 어딘가의 혼합된 입장을 강하게 옹호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요즘 과학철학의 반대편 진영인 '과학 구조주의' 입장을 잘 다루지 않는다는 문제가 좀 있어보입니다.

이 외에도, 과학 철학이 사실상 물리학/화학의 철학과 생물학의 철학으로 분화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논의 주제를 가진 생물학의 철학에 대한 논의가 조금 부족한 점은 아쉽게 느껴집니다. (근데 아마 이는 책의 논점에서 벗아난다 여기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긴 합니다. 고드프리스미스는 대표적인 생물학 철학의 전문가이기도 하니깐요.)

8개의 좋아요

이런 글 좋숩니다~마침 조만간 아우디 책을 장만하려 했는데 도움이 되네요! 얼마 전에 제니퍼 네이글이란 분의 "knowledge(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를 읽었는데 이것도 인식론 입문용으로 아주 좋은 것 같았어요. 김재권의 "심리철학"은 3판이 새로 번역 중인데 올해 말 나온대요.

2개의 좋아요

개인적으로 옥스퍼드 very short 시리즈는 좀 아쉽습니다. 타겟 계층이 좀 애매하다고 항상 느낍니다. 어떤 책은 비전공 학부생 1학년 개론 수업용 같이 처참하고, 어떤 책은 대학원생이 읽어도 괜찮을만한 개론서고. 이것과는 번외로, 제니퍼 네이글 책은 한 번 확인해보겠습니다.

1개의 좋아요

학부 2학년 시절 인식론 수업에서 아우디의 책을 교재로 썼던 기억이 있네요. 그때는 제가 '인식론'이 뭔지도 정확히 몰랐고, 영어 독해에도 그다지 자신이 없어서, 아우디의 책을 그다지 인상 깊게 읽지는 않았지만, 여기 적어주신 내용을 보니 책을 다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개인적으로, 인식론 책에서 감정 같은 주제들이 다뤄져서 '이게 왜 인식론과 연관되는 거지?'하고 의아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오히려 이런 점이 그 책의 특색이 될 수도 있겠네요.

학부 저학년도 볼 수 있는 분석형이상학 교재로 Jonathan Tallant의 Metaphysics-An Introduction 추천드립니다. 마이클 루 책보다 훨씬 쉬운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