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이 지닌 모순을 지적하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이 어째서 모순에 빠지는지를 폭로하여 그 언어 게임이 고민하는 문제를 해소해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크게 세 가지 주제가 이와 관련하여 대표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
(1) 언어와 세계 사이에 근본적 균열을 전제한 채 둘 사이를 '지시'를 통해 다시 넘어가고자 하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애초에 언어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지시도 언어의 의미를 확정하는 작업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지시로 언어와 세계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입장은 언어와 세계 사이의 근원적 단절을 상정하는 동시에, 언어와 세계 사이의 성공적 연결 역시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결국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지시적 정의'라는 이름 아래에 온갖 의미를 무분별하게 허용하기만 할 뿐이다.
(2) 적용과 규칙을 단절시킨 채 둘 사이를 '해석'을 통해 매개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적용과 규칙이 별개의 사안이라고 받아들인 상태에서는 '회의적 역설'이 생겨날 뿐이다. 이러한 문제는 규칙 따르기가 결코 해석의 작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방식으로만 해소될 수 있다. 즉, 적용과 규칙을 서로 무관하다고 상정한 채 적용과 규칙 사이의 관계를 다시 해석으로 연결하려는 모순적 시도 자체가 혼란에 빠져 있다고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다.
(3) 마찬가지로, 낱말과 감각을 서로 전혀 다른 영역에 귀속시킨 채 둘 사이를 '사적 언어'를 통해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사적 언어에 대한 상상은 모순에 함의하고 있다. 즉, 우리의 주관에 절대적 확실성을 부여한 채 감각에 대한 진술을 사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입장은 사실상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입장은 자신이 애초에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작업을 다시 가능하다고 우기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감각에 대한 사적 정당화는 아무런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 마디로, 모순을 내재하고 있는 언어 게임은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인다. 이러한 언어 게임에서는 마치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 '지시', '해석', '사적 언어'라는 개념이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은 채 남발되고 있을 뿐이다.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언어 게임이 모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3. 『탐구』에서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으로
'새로운 비트겐슈타인(New Wittgenstein)' 진영의 입장은 바로 위와 같은 방식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독해하거나 사용하고 있다. 가령, 다이아몬드(C. Diamond)는 '말할 수 없는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가 자기 부정에 빠져 "순전한 무의미(plain nonsense)"로 폭로된다고 강조한다. 카벨(S. Cavell)은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자기 자신이 지닌 의심의 근거를 의심해야 한다는 점에서 결국 도대체 자신이 무슨 의심을 하는지 모르는 상황에 직면한다고 지적한다. 맥도웰(J. McDowell)은 데카르트주의가 세계를 환각이라고 미리 전제한 상태에서 세계가 실재라는 사실을 증명해내려는 잘못된 문제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특히, 맥도웰은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비트겐슈타인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치밀한 해석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학자이다. 그는 철학적 문제에 접근하는 상황에서 언제나 딜레마 해소의 방법을 취한다. 즉,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모순적 입장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은 상황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언제나 두 가지 모순적 입장의 아래에 혼동된 철학적 사고가 놓인 결과로 발생한다고 폭로된다. 가령, 전통적 경험주의가 상정한 '소여의 신화(Myth of the Given)'는 다음 두 가지 충돌하는 논제를 동시에 받아들이고 있다.
(EI) 소여는 인식적으로 독립적이다. (소여는 비개념적이어야 한다.)
(EE) 소여는 인식적으로 효과적이다. (소여는 개념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딜레마는 마음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떨어뜨려 놓은 채 둘 사이를 다시 '소여'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모순적 입장에서 발생할 뿐이라고 지적된다. 마음과 세계를 서로 분리시키고자 하지 않을 경우 소여를 통해 둘을 다시 이어붙어야 하는 문제는 발생할 필요조차 없다. 애초에 딜레마는 우리가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마음과 세계를 나누어 놓았다는 사실에서 생겨난 사이비 문제일 뿐이다.
크립키의 '회의적 역설'에 대한 맥도웰의 비판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딜레마의 한쪽에는 규칙 따르기를 '해석'으로 생각하는 입장이 존재하고, 다른쪽에는 규칙 따르기를 '인과적 반응성향'으로 생각하는 입장이 존재한다. '해석'으로 생각하는 입장에는 다시 규칙이 끝없는 해석을 요구한다는 무한한 해석의 '역설'과 해석이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는 최종적 해석의 '신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적용과 규칙을 분리시킨 채 '해석'으로 둘 사이를 이어붙이려는 모순이 포기되는 순간 해소되어버린다. 즉, 애초에 규칙 따르기가 아무런 해석 없이도 잘 수행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회의적 역설'은 무의미한 문제로 폭로되고 만다.
따라서 철학적 문제가 내재하고 있는 모순을 지적하는 작업은 오늘날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에서 폭넓게 수행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이 지닌 모순에 대한 비판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주장은 대단히 과장되었다. 오히려 형이상학의 언어 게임이 사이비 문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비판하기 위해 그 언어 게임 내부의 모순을 폭로하는 작업이야 말로 비트겐슈타인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준 중요한 철학적 유산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