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대답 먼저 드리자면, "내 이름은 루피이고 쵸파이다."는 논리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뽀삐는 수컷이고 암컷이다."는 단순히 형식 논리학적으로 모순입니다. 말씀하신 두 예시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요점과 관련이 없습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색깔 예시를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건, 물리적 법칙도 아니고 형식 논리학적 법칙도 아닌, (그 사이의 어디쯤에 있는) '나의 언어의 한계들'(5.6), '세계의 형식적 속성'(6.12), '세계의 골격'(6.124)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세계에 대한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초월적'(6.13) 조건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자연법칙도 아니고 단순한 형식 논리학적 법칙도 아닌, 일종의 '제3의 법칙'을 통해 규정되는 가능성과 필연성이 있다는 사실을 색깔 배제 문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1) '논리적 필연성/불가능성'이란 '형식 논리학적 필연성/불가능성'이 아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상정하고 있는 '논리적 필연성'과 '논리적 불가능성'은 다소 독특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실, "A는 빨갛다."와 "A는 초록이다."는 일반적인 연역 규칙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는 서로 모순이 아닙니다. "A는 빨갛다."와 모순 관계에 있는 문장은 " "A는 빨갛지 않다."입니다. 따라서 순전히 형식 논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A는 빨갛다."와 "A는 초록이다."라는 두 문장이 서로 모순된다는 『논고』 6.3751의 명제는 틀렸습니다.
그렇지만 『논고』가 애초에 논리적 필연성과 불가능성을 이런 형식 논리학의 연역 규칙으로 제한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논고』가 말하고자 하는 건, 형식 논리학적으로는 모순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가 사유할 수 없는 세계의 가능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색깔들 사이의 관계가 보여주는 것처럼, "A는 빨갛다."와 "A는 초록이다."가 형식 논리학적으로는 모순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A가 빨갛고 초록이다."라는 문장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은 A의 한쪽 면은 빨간색이고 다른쪽 면은 초록색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A가 빨간색과 초록색을 섞은 갈색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 말은 시야 속의 한 점이 동시에 빨간색이면서 초록색이라는 주장인데, 우리는 이런 상황을 생각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무의미합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처럼 형식 논리학의 연역규칙보다는 더 포괄적인 '사유의 한계' 혹은 '언어의 한계'라는 것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말씀하신 "뽀삐는 수컷이고 암컷이다."라는 예시는 이 점에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요점과 무관합니다. 이 명제는 단지 Mp&-Mp라는 형식을 지니고 있는, 형식 논리학적으로 모순인 명제일 뿐입니다.
(2) '논리적 필연성/불가능성'이란 '물리적 필연성/불가능성'이 아니다.
그렇지만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고자 했던 필연성/불가능성이 물리법칙상의 필연성/불가능성인 것도 아닙니다. 가령, "인간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라든가 "무한동력은 가능하다."라는 주장은 우리가 밝혀낸 물리법칙에 비추어볼 때 거짓입니다. 이런 일들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A가 빨갛고 초록이다."라는 주장은 물리학적 발견에 의해 불가능하다고 판별될 수 있는 종류의 명제가 아닙니다. 비트겐슈타인 본인이 6.3751에서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저 진술은 "하나의 미립자가 동시에 두 속도를 가질 수는 없다."와 같은 문장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물리학적 연구 없이도 "A가 빨갛고 초록이다."라는 진술을 우리가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하나의 미립자가 동시에 두 속도를 가질 수는 없다."라는 진술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실제 물리학적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A가 빨갛고 초록이다."라는 진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개념적으로 파악됩니다. '빨강'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고 '초록'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물리학적 연구 없이) 단지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보는 것만으로 저 문장에 대응하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저 문장은 우리 '사유의 한계', '언어의 한계', '세계의 한계'를 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거죠.
말씀하신 "내 이름은 루피이고 쵸파다."라는 예시는 바로 이런 점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애초에 이 예시는 형식 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예시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물리법칙상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 있지도 않습니다. (가령, 제 이름은 '유석'이지만, 저는 베트남어로는 'Ahn'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따라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보여주려고 한 '세계의 한계'와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