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철 저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질문

박병철 교수 저의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내용과 관련하여 질문이 있습니다.

전환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에서 '색채 배제 문제'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전환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이 나오는데요.

그 예시로, "이것은 빨갛고 초록이다."라는 명제가 나옵니다. 이 명제가 "이것은 빨간색이다." "이것은 초록색이다." 라는 두 명제를 연언으로 결합한 복합명제인데, 두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수 없는 이유가 색채의 물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색채의 논리적 구조때문이라고 합니다. (제 상식과 어긋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라니 일단 수용했습니다.) 두 명제 중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므로 두 명제가 논리적으로 독립적이지 않다는 의미가 나오니까 각각은 요소명제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는데요. 여기까진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의문은 비트겐슈타인이 왜 굳이 색채를 꼬집어 이런 결론을 내렸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제 이해를 바탕으로 하자면 "내 이름은 루피이고 쵸파다."라는 명제나 "뽀삐는 수컷이고 암컷이다." 같은 사례도 동일한 문제에 봉착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이 일상속에서 너무나 쉽게 떠오르는 사례에 붕괴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천재의 철학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부족한 능력으로 이해해보자면, 두 명제가 동시에 참일 순 없어도 동시에 거짓일 수 있는 관계이면 '색채 배제 문제'와 동일한 문제를 일으키는 사례에 해당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비트겐슈타인식 설명으로 하자면 "내 이름은 루피이고 쵸파다."는 이름의 논리적 구조때문에 "내 이름은 루피다.", "내 이름은 쵸파다."는 논리적으로 독립적이지 않고 "뽀삐는 수컷이고 암컷이다."는 성별의 논리적 구조때문에 "뽀삐는 수컷이다.", "뽀삐는 암컷이다."는 논리적으로 독립적이지 않다고 생각되거든요.

제 이해에서 어디가 잘못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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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잘 모르지만 제가 이해하고 있는게 맞다면(아니라면 다른 분이 짚어주시길!)
내 이름이 루피라고 해서 쵸파 역시 내 이름일 가능성을 배제한다고 할 수 없고, '수컷', '암컷' 은 복합적인 개념(더 분석가능한)이라는 점에서 색깔배제문제와는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음 논문을 참고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정일, <요소 명제와 색깔 배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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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 의미에서 위에서 든 예시들은 비트겐슈타인 입장에선 요소명제가 아닐 수 있겠군요. 링크 달아주신 논문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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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대답 먼저 드리자면, "내 이름은 루피이고 쵸파이다."는 논리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뽀삐는 수컷이고 암컷이다."는 단순히 형식 논리학적으로 모순입니다. 말씀하신 두 예시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요점과 관련이 없습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색깔 예시를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건, 물리적 법칙도 아니고 형식 논리학적 법칙도 아닌, (그 사이의 어디쯤에 있는) '나의 언어의 한계들'(5.6), '세계의 형식적 속성'(6.12), '세계의 골격'(6.124)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세계에 대한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초월적'(6.13) 조건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자연법칙도 아니고 단순한 형식 논리학적 법칙도 아닌, 일종의 '제3의 법칙'을 통해 규정되는 가능성과 필연성이 있다는 사실을 색깔 배제 문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1) '논리적 필연성/불가능성'이란 '형식 논리학적 필연성/불가능성'이 아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상정하고 있는 '논리적 필연성'과 '논리적 불가능성'은 다소 독특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실, "A는 빨갛다."와 "A는 초록이다."는 일반적인 연역 규칙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는 서로 모순이 아닙니다. "A는 빨갛다."와 모순 관계에 있는 문장은 " "A는 빨갛지 않다."입니다. 따라서 순전히 형식 논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A는 빨갛다."와 "A는 초록이다."라는 두 문장이 서로 모순된다는 『논고』 6.3751의 명제는 틀렸습니다.

그렇지만 『논고』가 애초에 논리적 필연성과 불가능성을 이런 형식 논리학의 연역 규칙으로 제한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논고』가 말하고자 하는 건, 형식 논리학적으로는 모순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가 사유할 수 없는 세계의 가능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색깔들 사이의 관계가 보여주는 것처럼, "A는 빨갛다."와 "A는 초록이다."가 형식 논리학적으로는 모순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A가 빨갛고 초록이다."라는 문장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은 A의 한쪽 면은 빨간색이고 다른쪽 면은 초록색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A가 빨간색과 초록색을 섞은 갈색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 말은 시야 속의 한 점이 동시에 빨간색이면서 초록색이라는 주장인데, 우리는 이런 상황을 생각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무의미합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처럼 형식 논리학의 연역규칙보다는 더 포괄적인 '사유의 한계' 혹은 '언어의 한계'라는 것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말씀하신 "뽀삐는 수컷이고 암컷이다."라는 예시는 이 점에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요점과 무관합니다. 이 명제는 단지 Mp&-Mp라는 형식을 지니고 있는, 형식 논리학적으로 모순인 명제일 뿐입니다.

(2) '논리적 필연성/불가능성'이란 '물리적 필연성/불가능성'이 아니다.

그렇지만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고자 했던 필연성/불가능성이 물리법칙상의 필연성/불가능성인 것도 아닙니다. 가령, "인간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라든가 "무한동력은 가능하다."라는 주장은 우리가 밝혀낸 물리법칙에 비추어볼 때 거짓입니다. 이런 일들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A가 빨갛고 초록이다."라는 주장은 물리학적 발견에 의해 불가능하다고 판별될 수 있는 종류의 명제가 아닙니다. 비트겐슈타인 본인이 6.3751에서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저 진술은 "하나의 미립자가 동시에 두 속도를 가질 수는 없다."와 같은 문장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물리학적 연구 없이도 "A가 빨갛고 초록이다."라는 진술을 우리가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하나의 미립자가 동시에 두 속도를 가질 수는 없다."라는 진술을 판별하기 위해서는 실제 물리학적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A가 빨갛고 초록이다."라는 진술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개념적으로 파악됩니다. '빨강'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고 '초록'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물리학적 연구 없이) 단지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보는 것만으로 저 문장에 대응하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저 문장은 우리 '사유의 한계', '언어의 한계', '세계의 한계'를 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거죠.

말씀하신 "내 이름은 루피이고 쵸파다."라는 예시는 바로 이런 점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애초에 이 예시는 형식 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예시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물리법칙상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 있지도 않습니다. (가령, 제 이름은 '유석'이지만, 저는 베트남어로는 'Ahn'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따라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보여주려고 한 '세계의 한계'와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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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님의 상세한 답변에 감사합니다. 제 의문의 근본적인 면을 짚어주신 거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적 가능성/필연성 의미를 단순히 형식 논리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문제였군요. 그리고 이름 예시도 생각해보니 단견이었습니다.

답변을 쭉 읽고 든 생각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적 가능성의 아이디어가 "가능세계"에서 말하는 가능성과 동일하단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이 맞을까요?

또 미립자 예시가 약간 의문이 있는데요. 하나의 미립자가 동시에 두 개의 속도를 가질 수 없다는 건 경험적인 검증으로 판단할 명제이기 때문에 색깔 명제와 구분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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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보셨다고 생각합니다. 가능세계 의미론의 역사를 보통 얘기할 때 현대적인 아이디어는 명시적으로는 카르납의 것이라고 언급되지만 핵심적인 측면은 논리철학논고에서도 발견된다고 보통 서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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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세히는 모르지만,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가능세계에 대한 논의를 연결시키는 분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가능세계’라는 개념은 ‘가능하다/우연적이다/필연적이다’라는 용어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되는 것이라, 저런 용어가 등장하는 모든 종류의 논의와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가능세계’ 자체는 특별한 형이상학적 함의를 담고 있지 않은, (크립키의 설명대로라면) 일종의 ‘경우의 수’와 같은 개념이라, 단순히 가능세계와 연관이 있는가/없는가보다는,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가가 좀 더 생산적인 접근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2) 네, 경험적 검증으로 판단해야 하는 명제이기 때문에 구분된다고 생각해요

*참고로, 제가 여기에 쓴 내용은 서강대학교 김영건 선생님의 칸트주의적 비트겐슈타인 해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논고』를 해석하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지만, 적어도 저는 이론철학의 관점에서는 칸트적 『논고』 해석이 옳다고 생각해요. 관련 내용은 김영건 선생님의 『이성의 논리적 공간』이라는 책에서 찾아보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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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시원하게 색깔 배제 문제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예전부터 어렴풋이 생각해온 것이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이 램지나 스라파 앞에서 자기의 오류를 바로잡으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서 그의 사유에 후기로 발전이 있었던 것이지, 그가 논고를 계속 고수하려는 독단적인 입장에 있었다면 어느 정도의 수정 (어쩌면 "소품집"에서의 수정보다 더 독단적일수도 있는)으로 계속 초기의 입장을 지켜낼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옳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지금 논고의 6.3751을 보고 있는데, 한국어로는 "예컨대"라고, 영어로는 "e.g."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돌려서 "말하자면" 같이 표현한다면 좀 더 잘 드러날 것 같은데, 비트겐슈타인은 "A는 빨강색이다"도 아직 요소명제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듯 합니다.
따라서, 물론 표면적 읽기로는 이 문장이 형식논리학적으로 틀렸다지만, 역시 독단적으로 생각한다면 계속 논리를 분석하면 이것이 형식논리학적으로 옳다는 것이 드러난다고도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제가 어디서 본 글에 의하면 "요소 명제의 명시적 예를 대라"라고 말하는 다른 철학자들에게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은 철학자가 하는 일이 아니라 논리학자가 하는 일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책을 읽은 저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요소 명제가 정확히 뭔지 모른다는 것을 큰 문제라고 봤는데, 정작 비트겐슈타인은 그렇게 크다고 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만에 하나, 어떤 다른 세계에선 한 "독단적 비트겐슈타인"이 있어서 논고(아님 논고의 방향)가 완전히 다 서술했다고 믿고, 램지와 스라파를 거부하며, 요소 명제를 명시적으로 모르는 것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거나, 어쩌면 그것 또한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이라고 퉁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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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논고』를 아주 꼼꼼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순전히 논리적으로만 보면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자기 주장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길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러기에는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아래 두 주장이 꽤나 중요한 지위를 지니는 것 같아요.

(1) "A는 빨갛다."라는 명제와 "A는 푸르다."라는 명제는 상호 독립적이다.
(2) "A는 빨갛고 A는 푸르다."라는 명제는 모순이다.

(1)을 포기하려면 (요소 명제를 직접 명시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색체를 분석할 수 있는 더 세분화된 방법을 제시해야 하지만,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방법을 제시하는 작업에 결국 실패하고 말죠.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논고』 이후에 색체에 대한 명제가 요소 명제가 아니라는 관점을 받아들이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모든 시도가 실패하게 되면서 결국 자기 기획에 모순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죠.

(2)를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비트겐슈타인으로서는 "A는 빨갛고 A는 푸르다."라는 명제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거에요. 하지만 저 명제의 무의미성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의존할 수 있는 근거가 전기 철학에서는 ‘논리적 통사론(logical syntax)’밖에 없었기 때문에, 저 명제가 모순이라고(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이외에는 저 명제의 무의미성을 설명할 길이 없었던 거죠. (반면, 후기에는 논리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의 ‘문법grammar’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면서 굳이 저 명제를 모순이라 할 필요가 없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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