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말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후기철학을 관통하는 문장이다. 흔히 위 말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존재를 말해준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위 문장을 다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상기한 바와 같이, 위 문장은 하이데거의 후기철학을 관통한다. 그의 철학은 보통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철학을 대표하는 저서를 <존재와 시간>으로, 후기철학을 대표하는 저서를 <철학에의 기여>, <숲길> 등으로 정리한다. 전기에서 그의 관심이 존재 개념의 근원을 밝히고 이것의 변화하는 시간성을 탐구하는 것이었다면 후기에는 그 시간성이 온전히 자리잡을 수 있는 존재의 사태를 파악한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의 주된 문제는 '고향상실'이다.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래적 성질을 온전히 내맡길 수 있는 고향이나 집과도 같은 장소를 상실하고 자기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한 체로 유령처럼 떠도는 존재다. 이러한 인간에게 어떻게 장소를 되찾아 줄 것이며 고향-집을 되찾아 줄 것인가?
바로 이 문제에서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다. 바로 '언어'가 존재의 고향-집-그 존재를 초연히 내맡길 수 있는 곳을 마련해준다는 것이다. 한데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시적언어'로, '과학적 언어'와는 구별된다. 과학적 언어는 '공간', 즉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몇미터, 몇평, 몇세제곱미터와 같이 측량과 측정이 가능하여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언어다. 반면에 시적언어는 '장소', 즉 어쩐지 기분이 울적할 때마다 찾게되는 그 곳, 오랫동안 사용해서 추억이 깃든 직장 내 나의 책상 등으로 객관적으로는 측량할 수 없는 인간의 각자 경험이 생성되는 곳이다.
과학적 언어는 물질문명을 강화한다. 자본주의의 도구로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물화시키고 수단화함으로써 특정한 역할에 그 존재를 복속시킨다. 반면에 시적언어는 시-예술-문화의 언어로서, 경직된 사물의 양태를 '움직이게'하고 그 고정된 의미를 해방하여 자유롭게 한다. 바로 이 시적언어가, 고향을 상실한 현대의 인간에게 '장소-있을 곳'을 마련해준다. 그것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초연히 내맡김으로서 자기 자신이 되며, 동시에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을 되찾음으로 인해 '치유된다.'
참고: 박찬국,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21세기북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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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운영자입니다.
아마 넘버링을 매기면 자동으로 ol 태그를 적용시켜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에디터 소스를 직접 수정하는 식으로 고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럴 경우 신버전 업데이트할 때마다 소스를 다시 수정해줘야 할 수도 있어서요. 괜찮은 에디터 플러그인을 좀 알아보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는 하이데거의 『언어로의 도상에서』라는 후기 논문집의 중요한 주제죠. (물론, 저 구절 자체는 「휴머니즘 서간」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요.) 저는 하이데거가 사용한 "고향"이라는 은유가 '일상', '삶의 세계', '생활세계', '원초적 삶' 정도로 이해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과학적 언어에 의해 망각된, 우리의 가장 일상적 삶의 방식을 되찾아야 한다는 게 하이데거의 주된 철학적 목표죠. 가령, "여기서 그곳까지는 2.64km 떨어져 있다."라는 정밀하게 산술화된 언어보다 "여기서 그곳까지는 걸어서 대략 30분 정도 되는 거리다."라는 일상적 언어가 훨씬 우리 삶의 방식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다는 거요. 이런 의미에서 "고향 상실"이란 우리의 일상적 삶을 무조건 과학의 시선으로 재단하려는 태도라고, "고향"을 되찾고자 하는 시도는 우리의 일상적 삶의 방식에 다시 주목하고자 하는 태도라고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내용적인 질문보다는 함께 생각해봤으면 하는 주제를 몇 가지 제시해봅니다.
#1 독해상 기술적 문제:
하이데거 철학의 가장 큰 문제는 제멋대로 쓴 글을 평어로 풀어서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이해를 완성해야한다는 독해상의 기술적인 문제이겠지요. 하이데거 뿐만 아니라 유럽철학 전반에 대해 해당되는 문제이겠지요. 어느 문장을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이냐? 단지 은유적인 문장으로 넘겨버릴 것이냐? 대륙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숙명과 같이 맞닥뜨리는 문제일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Michel Gelvin은 A Commentary on Heidegger's Being and Time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지요:
"Nothing is easier than to seek refuge from a troubling passage by an appeal to vagueness and the maddening reiteration of ponderous terms that are intoned like sacred rituals without explanation. obfuscation is ultimately a confession of ignorance or deceit" (Gelvin, 1989: p. xii).
오래전에 읽었던 문장이지만, 아직까지도 유럽철학 텍스트를 읽을 때 중요한 지침이 되는 문구로 남아있어 공유해봅니다. 저 역시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글을 조금 더 layman's terms으로 풀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연구동향
하이데거 연구는 Black note가 공개적으로 발간 된 이후로 연구의 중심부에서 바깥을 향해 점진적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요컨대 최근의 하이데거 연구 동향은 Blacknote를 둘러싼 한 철학자의 사상과 행적의 복잡한 관계 그리고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여부에 관한 쪽에 집중되어 있는듯 합니다. "하이데거적인 철학함의 유산과 하이데거 개인의 윤리적 논란"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실존주의내지 현상학적 존재론으로 분류되는 철학에도 이러한 변호가 유효할지 여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인 편입니다.
철학을 함에 있어서 말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위 글은 (짧은 글이기는 하지만)사실 '하이데거적인' 문체를 어느정도 의식하고 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러 난해하게 옮기려 하지는 않았지만, 하이데거의 문체 특성상 그 문체를 번역하여 한국어로 풀어내는 이상, 어느정도의 '하이데거적인' 문체는 들어갈 수 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이는 '번역'의 문제로 확장될 수 있어 보입니다.)
하이데거의 나치 행적은 꾸준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그럼에도 하이데거의 행적이 곧 하이데거의 철학적 유산의 지향점과 동치되지는 않는다고 여깁니다. 오늘날에 하이데거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하려는 것은 하이데거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라기 보다도 그것을 동시대에 어떻게 재생산할 수 있는가에 관한 고민이라고 봅니다. 이를테면 일본의 근대초극론은 서구(근대)를 넘어섬으로써 아시아를 해방하겠다는 초기 의도를 갖고 있었지만, 이내 아시아를 침략하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발상으로 치닫고 맙니다. 허나 오늘날 아시아(동아시아)의 평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다시 근대초극론에 주목하며 이 사상의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사색하려 합니다.(이에 관해 저는 가라타니 고진의 이론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이론이나 사상을 동시대에 다시 불러오는 것은 다소 과거에 천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재생산을 위해서라면 마땅히 검토되어야하지 않는가 합니다.
#1
문체의 호오 문제, 그리고 2차서적내지 논문을 쓰는 입장 차에 달린 문제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하이데거적인 문체의 잔재 마저도 완전히 걷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철학함이 문제적으로 여기는 제문제를 두고 학적인 논구를 통해 해결하는 것에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고 할 때, 하이데거(한 명 더 꼽자면 레비나스)가 구사한 것과 같은 문체는 기술적인 모호함(ambiguity in description)과 이로 인한 오해의 여지를 늘 남기기 때문입니다.
학적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결국 효율적이고 명확한 의사소통이 첫 번째 와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주 기술적이고 어려운 현상학적 철학의 제문제를 두고 평범한 말로 핵심을 찌르는 이남인 교수님, Pf. Dermot Moran, Rudolf Bernet, Ullich Melle 등의 글이 그러한 이상의 모범적 예시로 들 수 있을 것 같구요. 아울러 Keyahn님께서 제기하신 번역의 문제는 동의합니다.
#2
2.1.
하이데거의 철학적 유산이 지향하는 바와 하이데거의 행적이 어느 정도까지 일치하는지 여부에 대한 학계의 의견은 분분합니다. 향후 비판적 검토를 수반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많은 자료들이 나오면 Keyahn님과 대척지에 있는 제 입장 사이에서 문헌학적 근거와 논증을 토대로 보다 생산적인 대화가 가능할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저 역시 하이데거가 Sein und Zeit 을 위시하여 전체주의적인 주장을 제기했다고 해서 그의 모든 철학적 유산들이 폐기되거나 방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하이데거가 1927-29년 사이 진행한 일련의 칸트 연구들은 대륙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다루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는 것들이겠지요. (E.g., Heidegger GesamtausgabeGA 3, GA 25). 철학사가로서의 하이데거의 업적 만큼은 설령 그가 나치로 확정되고 이외 모든 업적들이 부정되어야 할지라도 결코 부정하기 어려운 것들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진리론 그리고 이론과 실천의 문제에 대한 그의 전후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주장을 놓고 볼 때, "하이데거적 정신"이 전체주의적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피할 수 없어 보입니다.
2.2
근대초극론을 예시로 들면서 이를 전유한 학적 이론의 창출을 말씀하셨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말씀해주시지 않아 동의하기는 다소간 어렵습니다. 근대초극론의 결과물로 대동아공영론, 식민지 근대화론이 탄생했고, 게르만-독일민족주의는 나치즘과 우생학적 인종주의를 태동시켰습니다. 이러한 이론들이 철학 사상계에서 검토되는 것은 대체로 이들 이론이 결론적 주장을 수립해나가는데 있어서 세우는 중간논리의 결점을 낱낱이 밝히고 이를 통해 전체 논증의 결함과 수립불가능성을 보임으로써 이를 계승하는 비슷한 류의 사상의 발호와 유행을 막는 것에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말씀하시는 재생산이 오늘날에도 이러한 류의 사상이 암암리에 발호하는 것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이견은 없습니다. 이외의 것이라면 무엇을 말씀하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발화자와 주장내용, 저자와 저작을 구분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하이데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긴 합니다. 학술적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의 저작이 우리 시대에 어떻게 유의미하게 재구성 될 수 있는지, 어떤 종류의 통찰을 여전히 제공할 수 있는지겠지요. 이에 keyahn님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사실 저는 근대의 도구적 이성이라든가 하이데거 사상의 전체주의적 면모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든가 하는 얘기가 설득력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식의 기원론이나 원인론은 마치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정도의 설득력을 갖는다고 봅니다. 대강 다 끼워맞춰질 수 있지요. (물론, 크루아상님은 근대적 이성이 아니라 게르만 민족주의를 언급하셨고 이건 그냥 제가 떠올라서 쓰는 별개의 얘기입니다.)
인과의 사슬을 어디서 끊을지는 항상 문제가 되겠지만, 미대 낙제생 루저가 유태인을 학살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 판단에 서구 지성인들의 고매한 사상이 얼마나 녹아있었을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책임을 묻게 된다고 하면 데카르트부터 안 읽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 흉악한 철학자는 자기의식으로부터 세계와 타자까지 정초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냥 그런 "폭력성"에 관한 문구들을 책 판매량을 위한 카피라이팅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keyahn님의 강조점은 아마 "대동아공영론 같은 흉악한 사상도 현대에 새로운 사유를 제공할 수 있을 때 나름의 의미를 가지듯, 하이데거도 그렇게 써먹을 수 있다"겠지요. 실용주의자로서 이에 동의합니다. (비교가 미묘할 수는 있지만 아인슈타인이 핵무기를 직접 투하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더라도 과학자들은 여전히 상대성이론을 배우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