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립키의 퍼즐을 추론주의로 풀어보기

이름과 지칭체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있다.

밀-주의 : 이름(고유명)은 고유하게 지칭체를 지시한다. 즉, 한정기술구와 별개로 고유명은 그 지칭체를 가진다.

프레게-러셀주의 (기술주의) : 고유명은 한정기술구들에 의해 대치된다. 즉, 한정기술구를 통해 지칭체를 확정할 수 있다.

-밀-주의와 기술주의가 풀어야할 퍼즐

피에르는 프랑스어로 런던이 아름다운 장소라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그는 런던이 아름다운 장소라고 믿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런던에 실제로 여행할 일이 생기게 됐다. 그는 그가 간 장소가 프랑스어로 들었던 런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곳에 갔고, 영어에 대한 사전지식도 없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가 런던을 여행하면서 받은 인상은 매우 좋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영어-프랑스어 간 번역관계를 모른채 그곳에서 자신들이 사는 곳을 "런던"이라고 영어라고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됐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피에르는 영어 "런던"이 아름답지 않다라는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퍼즐은, 피에르는 과연 런던이 아름다운 장소라고 믿는지 아닌지의 문제이다. 우리는 분명 프랑스어 화자로서의 피에르의 믿음과 영어 화자로서의 피에르의 믿음 모두를 고려해야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럴 경우 프랑스어 화자로서 피에르는 "런던(프랑스어)은 아름답다"와 "런던(영어)은 아름답지 않다"라는 모순된 믿음을 동시에 가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피에르가 모순된 믿음을 가진다고 해야할 것인가?

(1) 피에르가 모순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경우

두 가지 반론이 가능하다. 하나는 피에르는 영어 런던과 프랑스어 런던의 동일성에 대한 정보를 몰랐을 뿐, 논리적 오류를 저지른 적이 없다. 따라서 그가 모순된 믿음으로 인한 오류의 책임을 진다고 하기 어렵다. 다른 하나는, 피에르가 논리학자이고 "뉴욕이 아름답다면, 런던도 아름답다"라는 명제에 동의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영어를 배워서 "런던은 아름답지 않다"라고 주장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피에르는 논리적으로 후건부정을 통해 뉴욕도 아름답지 않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피에르가 정보를 결여한 상태에서 이런 논리적 결론을 도출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2) 재서술을 통한 문제의 해결

우리는 피에르가 프랑스어 런던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영어 런던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방식으로 문제를 재서술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이렇게 재서술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탈인용 원칙, 번역의 원칙, 그리고 대체율 그리고 여러 원리들 중 어떤 것이 합당하고 그렇지 않은지를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식의 재서술은 문제를 후퇴시킬 뿐, 해결책일 수 없다.

(3) 기술주의를 통한 문제의 해결

기술주의자들은 프랑스어 런던과 영어 런던에 피에르가 할당한 속성과 기술구가 다르므로 피에르는 모순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주장할 경우에도 문제는 남아있다. 먼저, 그래서 우리가 "런던"이라고 부르는 장소에 대해 피에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 아닌지의 문제를 답해주지 않는다. 두 번째로, 이름에 동일한 식별하는 속성들을 연관시킨다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런던은 영국의 중요한 도시'라는 속성을 영어 런던과 프랑스어 런던에 모두 할당한다고 하더라도 하나에 대해서는 아름답다, 다른 하나에 대해서는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유하게 식별하는 속성들을 관련시킨다고 해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피에르가 런던은 영국의 수도이고, 토트넘의 연고지라는 것을 믿는다고 가정하고 그는 이 속성들이 런던을 고유하게 식별하는 속성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어만 할 줄 알았을 때 그는 프랑스어 영국과 프랑스어 토트넘을 프랑스어 런던에 연관지었다. 차후 그가 영어를 할 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가 프랑스어 영국과 영어 영국, 그리고 프랑스어 토트넘과 영어 토트넘을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다면 기존의 문제는 여전히 발생한다.

(4) 퍼즐이 숨기고 있는 하나의 원칙

크립키는 이 퍼즐을 푸는데 있어 탈인용 원칙, 번역의 원칙, 대체율을 제시하며 기술주의자들은 대체율이 잘못되었다고 논증하지만 탈인용 원칙과 번역의 원칙도 이 퍼즐에 있어서 문제시됨을 역설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퍼즐이 밀-주의와 기술주의 그 어느쪽에도 우호적이지 않으며 어느쪽이든 이 퍼즐을 풀어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나는 크립키의 퍼즐이 하나의 원칙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표상의 원칙이다. 그는 피에르의 명제태도 문장에서 '영어 런던'과 '프랑스어 런던' 모두 동일한 런던을 표상하는 단어라고 당연하게 가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표상의 원칙을 거부하면 퍼즐은 더 이상 퍼즐이 아니게 된다. 먼저 피에르의 믿음 맥락에서 영어 런던과 프랑스어 런던은 다른 장소라고 추론되므로 두 장소에 대한 동일한 종류의 진술에 각기 다른 진리값을 부여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모순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정보로 인해 잘못된 추론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 간단히 문제가 해결된다.

그리고 피에르가 런던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추론주의의 입장에서는 간단히 대답할 수 있다. 추론주의는 '런던'이라는 이름에 반드시 단일한 런던이라는 장소가 지칭체로 할당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하기에 피에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프랑스인 친구로부터 전해들은 런던'이고 피에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 장소는 '직접 경험해본 런던'이라고 주장하면 해결된다.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 안에서 최선의 추론을 하였고, 그 추론이 잘못됐다면 그것이 잘못된 이유를 알려주면 되는 것이다. 피에르의 추론의 맥락을 배제한 채로 영어 런던과 프랑스어 런던은 동일한 장소인데 어떻게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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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런던 여행은 가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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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비슷하게 생각하긴 하지만 약간 다른 입장이에요. (사실, 입장이 다르다기보다는 eric970이 주장하신 내용이 추론주의적으로 더 자세히 설명되어야 한다고 봐요.) 저는 크립키의 퍼즐에서 '피에르의 관점'과 그걸 듣는 '우리의 관점'이 구분되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브랜덤이 지적하는 것처럼 (더 정확하게는, 브랜덤의 논의를 제레미 반더러가 Robert Brandom이라는 해설서에서 잘 설명한 것처럼), 이유를 제시하고 요구하는 놀이에서 참여자들은 놀이수행자(gameplayer)인 동시에 점수기록자(scorekeeper)의 위치에 서게 되거든요. 한편으로는, "런던은 아름답다." 같은 언명을 발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놀이에서 제시되는 (자신과 상대방의) 발화를 평가하는 거죠.

우리의 사례에 적용하자면, 크립키의 퍼즐에서 피에르는 놀이수행자로서 "런던은 아름답다."라는 발화를 제시했고, 그걸 듣고 있는 우리는 그 발화가 피에르의 이전 찬동과 모순된다고 평가를 내리고 있는 거죠.

중요한 점은, 여기서 각각의 참여자들이 전제하는 부차적 전제와 보조적 가설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죠. 즉, 놀이수행자인 피에르는 'London'과 '런던'이 동일한 장소를 표상하는 말인지 모르지만, 점수기록자인 우리는 그 둘이 동일한 장소를 표상하는 말인지 안다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런던은 아름답지 않다.

라는 믿음을 피에르에게 대언적(de dicto)으로 귀속시켜서

(D) 피에르는 런던은 아름답지 않다고 믿는다.

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이 말을 우리의 관점에서 대물적(de re)으로 재해석하여

(R) 피에르는 London에 대해 그것이 아름답지 않다고 믿는다.

라고도 할 수 있는 거죠.

그렇지만 피에르에 대한 대언적 귀속과 대물적 귀속은 모두 '우리의(점수기록자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피에르 본인이 "런던은 아름답지 않다."라는 언명을 이해하는 방식과는 무관하죠.

그리고 이렇게 '피에르의(놀이수행자의) 관점'과 '우리의(점수기록자의) 관점'을 구분하면, 크립키의 퍼즐은 해소되어버려요. (a) 피에르의 관점에서는 모순이 발생하지 않죠. 피에르의 배경 지식에서는 '런던'과 'Lodon'이 동일하지 않으니까요. (b) 우리의 관점에서는 '피에르에게' 모순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죠. 피에르가 말한 "런던이 아름답지 않다."는 우리의 관점에서 "London이 아름답지 않다."이고,이 말은 "London이 아름답다."라는 피에르의 찬동과 모순되니까요. 따라서 관점을 구분하게 되면, 왜 크립키의 퍼즐이 '한 관점에서는' 모순이 아니면서도 '다른 관점에서는' 모순인지가 매우 깔끔하게 설명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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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 글은 정확히 말하자면 추론주의에 입각했다기 보다는 이 퍼즐의 표상주의적 전제를 거부하기가 더 적합하겠죠. 이래서 제목을 가장 마지막에 정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보다 자세히 설명했어야 할 부분을 잘 보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보충하자면, 여기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크립키는 이 문제를 재서술하는 것이 "그래서 피에르가 런던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냐 하지 않느냐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라고 주장하기에 크립키의 문제 설정이 일종의 정당화되지 않는 전제를 숨겨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추론주의의 입장에서 관점에 따라 실제로는 같은 대상에 대한 다름 이름일지라도 정보의 결여나 여타 이유로 다른 대상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이는 믿음문장, 명제태도의 문제에서 쉽게 발생할 수 있는 사례일 것입니다.

그러나 표상주의적 구도에서는 이러한 관점의 차이와 상관없이 고유명에 기술구나 속성 내지는 대상 자체를 무조건 할당해야 하기 때문에 문제의 핵심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진짜 너무 웃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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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저 개그에 웃는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철학과...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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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좋은 설명 잘 읽고 갑니다. 콜린 맥긴의 '크립키의 믿음에 관한 퍼즐'을 읽고서 추가 자료를 찾다가 봤는데 무언가 명쾌한 면이 있는 내용이네요. '언어철학' 책의 많은 주장들이 흥미롭고 영감을 주지만, 여러 층위의 개념들을 '표상주의'라는 판에 때려부어 마구 휘저은 듯한 느낌을 주어서 '삶의 진실'이 되기에는 무언가 모자라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게임참가자(피에르), 판정자(크립키 등의 철학자), 언어의 간극(영어와 한국어의 비동일성), 독서자(나), 나의 경험과 추론 능력 등 포괄적으로 봐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어쨌든 '표상주의'와 '추론주의'의 일차적인 차이에 대해 들었으니 도움이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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