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지시 없는 역설

Yablo, Stephen (1993), “Paradox without Self-Reference”, Analysis, vol. 53, no. 4, 251-252.

‘이 문장은 거짓이다.’는 참인가, 거짓인가?

자기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들의 집합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는가?

이러한 역설은 흔히 순환성(circularity), 특히 자기지시(self-reference)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일단 자기지시는 역설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음처럼 역설을 발생시키지 않는 무해한 자기지시도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한국어 문장이다.

많은 철학자들은 자기지시가 역설의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들이 생각한 해결책은 자기지시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러셀의 유형 이론이나 타르스키의 대상언어-메타언어 구분이 그런 방향을 취하는 대표적인 접근법이다. 그러나 자기지시는 역설의 필요조건도 아니다. 자기지시를 포함하지 않은 역설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처럼 문장의 무한한 열을 생각해보자.

(S1) 모든 n>1에 대하여, Sn는 거짓이다.
(S2) 모든 n>2에 대하여, Sn는 거짓이다.
(S3) 모든 n>3에 대하여, Sn는 거짓이다.
……

저 무한한 문장들 중 적어도 하나가 참이라고 가정하고, 이를 Sk라고 하자. Sk가 참이라면 k보다 큰 첨자를 지닌, Sk 아래의 모든 문장은 거짓이어야 한다. 따라서 Sk+1은 거짓이다. 그런데 Sk+1이 거짓이라면 k+1>n인 Sn 중 적어도 한 문장은 참이어야 한다. 이는 모순이다. 한편, 저 무한한 문장들 모두가 거짓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S1는 거짓이므로 n>1인 Sn 중 적어도 한 문장은 참이어야 한다(이를 Sk라고 하자). Sk가 참이라면 k보다 큰 첨자를 지닌, Sk 아래의 모든 문장은 거짓이어야 한다. 따라서 Sk+1은 거짓이다. 그런데 Sk+1이 거짓이라면 k+1>n인 Sn 중 적어도 한 문장은 참이어야 한다. 이는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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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건 아니지만, 퍼트남이 자기지시가 그 자체로 역설을 발생시키는 게 아니라고 말했던 게 생각나네요.

(I) The sentence (I) is false.

I suppose someone might think that it is illegitimate to use "(I)" to name an expression which contains "(I)" itself as a proper part, but many forms of "self-reference" are quite harmless. (Consider: "Write down the sentence I am uttering in your notebook.") In any case, the suggestion that we throw self-reference out of the language turns out to be excessively costly; in fact, Gödel showed that as long as our language contains number theory, there will always be ways of constructing sentences that refer to themselves. So we shall stipulate that (I) cannot be denied the status of a proper sentence merely on the ground that it mentions itself. (H. Putnam, “Realism with a Human Face”, Realism with a Human Face, J. Conant (ed.), Cambridge, Massachusetts, and London, England: Harvard University Press, 199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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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블로 패러독스 재밌죠! EdX 강좌 Paradox and Infinity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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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은 항상 거의 자기지시와 관련해서 이야기가 되었는데, 야블로 논문은 자기지시가 역설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님을 보였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의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강의는 처음 들어보네요.

애초에 타르스키의 진리 정의는 자연언어가 아닌 형식화된 언어를 겨냥한 것이었고, 퍼트남의 이야기대로 괴델의 정리에 의하면 자연수 체계를 포함하는 체계에서는 항상 다음의 문장이 구성될 수 있죠.

(G) ~(∃x)Dem(x, Sub(y, 17, y))=g
괴델수가 g인 식(다름 아닌 G 자신)에 대한 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퍼트남의 언급은 역설에 대한 타르스키 식의 해법에 한계가 있고, 이 해법을 선택함으로써 치러야 할 대가도 생각보다 크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역설에 대해 제안된 최근의 해법 중에 '고정점 정리'(fixed point theorem)라는 게 있다는데, 어떤 식의 해법인지 살펴보려니 상당한 수학적 지식을 필요로 하고 있어서 접근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이 글을 보고 조금 읽다 방치했던 송하석 저 <거짓말쟁이 역설에 관한 탐구>를 다시 꺼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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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마침 저도 그 책 사려고 하는데 어떤가요? 괜찮나요?

잘 모르는 분야고 완독한 것도 아니라 조심스럽지만ㅜㅜ 교과서같이 깔끔하고 친절한 편이다 생각합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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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dox and infinity는 재밌는 논리적 역설들과 수학적 역설들을 다루는 강좌인데, 시간 날 때마다 보면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타르스키의 참 이론이 괴델 정리랑 연관이 있다는 것(타르스키의 정의불가능성 정리)과 fixed point theorem(위상수학의 정리가 아니라면, 논리학에서 diagonalization lemma라고 불리는 정리)이 정의불가능성 정리를 증명하는 데에 쓰인다는 것까지는 아는데, fixed point theorem이 역설 해결과 관련있다고 주장하는 논문이 있었을까요?

네, 꽤 많이요. 자기지시와 역설에 관한 논문집 Bolander, Thomas et al. (ed.), Self-Reference(Stanford, California: CSL Publications, 2006)의 서론에서 해당 역설의 해결을 위한 접근법으로 Fixed Point Approach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음 논문에 의해 처음으로 주장되었고 요즘 진리론에서 핵심 주제 중 하나라고 소개되고 있네요.

Gilmore, P. C., “The consistency of partial set theory without extensionality”, Axiomatic set theory (Proc. Sympos. Pure Math., Vol. XIII, Part II), pp. 147–153, Providence RI: Amer. Math. Soc., 1974

(아까 전에 The Revision Theory of Truth가 Fixed Point Theorem을 받아들인다고 썼는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는 게 거의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눈치를 보니 뭔가 fixed point theorem 자체로 역설을 해결한다기보다는 진리 이론이 자기지시를 발생시키는지 점칠 수 있는 수단으로 쓰는 느낌인데, 위상수학 정리가 이런 데서 쓰이다니 신기하네요.

저 책 좋아요. 저도 아주 꼼꼼하게 읽은 건 아니지만, 진리 이론과 거짓말쟁이의 역설에 대한 일종의 교과서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거에요. 언젠가 이 책으로 스터디 모임을 열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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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해법에서 Fixed Point는 하나의 검사 도구라기보다는 직접적인 역설 해결을 위한 장치로 쓰이고 있네요. 크립키는 역설을 발생시키는 거짓말쟁이 문장이 '기반을 갖지 않는'(ungrounded) 문장이기 때문에 진릿값을 할당할 수 없다는 식으로 역설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 '기반을 갖지 않는' 문장이란 최소 고정점(minimal fixed point)에서 진릿값이 할당되지 않는 문장으로 규정됩니다. 또한 General Fixed Point Approach는 고정점을 이용해 긍정 문장들에 대한 진리 정의를 산출하는 식으로 역설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바로 사서 보고 있습니다. 매우 유익한 책이네요.

여훈근교수님의 논리철학 책에 크립키의 고정점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하게 나와있습니다. 본서에서 소개된 고정점 이론른 본질적으로는 타르스키의 방법과 다름 없다 생각되어지지만 무한한 층위를 갖는 재귀적인 타르스키의 방법의 해결책으로 제시되어져있습니다. 혹시 현재 논의 되는 고정점 개념은 크립키의 고정점과 다른 종류의 것일까요?

다르지 않습니다. 크립키의 해법에서도 General Fixed Point Approach에서도 기본적으로 고정점은 '다른 층위의 언어에서도 그 진릿값이 보존되는 지점'을 일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