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이 대단하다!] 근본악의 문제에서, 이율배반을 지나, 종교적 희망으로: 최소인과 정제기의 「근본악과 희망의 문제」

최소인과 정제기는 칸트의 철학이 근본악의 문제를 종교적 희망을 통해 극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들은 근본악에 대한 칸트의 입장을 “근본악은 극복되어야 한다/근본악은 근절될 수 없다.”(최소인·정제기, 2019: 381)라는 이율배반의 형태로 요약한 뒤, 유한한 한계를 넘어서 끊임없이 탈-한계를 지향하고자 하는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칸트가 종교적 희망을 전제로 긍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비록 근본악이 실제로 극복될 수 있을지를 우리가 확신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근본악이 극복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서 도덕을 향해 자신을 기투하는 주체는 ‘도덕적 인간의 숭고함’을 지닌다는 것이다. 본고는 우선 최소인과 정제기의 논문에서 제시된 칸트의 입장을 요약할 것이다(Ⅰ). 다음으로, 그들의 논문이 칸트의 도덕철학과 종교철학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근본악의 이율배반’과 ‘희망’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참신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것이다(Ⅱ). 마지막으로, 그들이 구성한 칸트의 입장이 과연 근본악의 극복가능성과 희망의 필요성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있는지 비판적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Ⅲ).

Ⅰ. 칸트의 종교철학에 담긴 희망

최소인과 정제기의 논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논문은 (1) 칸트의 『종교론』에서 근본악의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설명하고, (2) 『종교론』과 『실천이성비판』이 고민하는 문제상황을 ‘근본악의 이율배반’을 통해 설명하고, (3) 칸트의 철학에서 제시된 근본악의 극복가능성을 세 가지 희망을 통해 설명한다. 그들의 논문에 따르면, 칸트는 『종교론』에서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도덕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얼핏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두 입장 사이의 이율배반은 인간이 지닌 선의 소질이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라는 희망, 순수하게 도덕법칙만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심정의 혁명’이 실현가능하다는 희망, 유한한 인간의 능력을 채워주는 무한한 신의 은총이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을 통해 극복된다.

(1) 근본악이란 무엇인가?: 칸트에게 악이란 실천이성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보편적 도덕법칙과 상충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가령, 우리는 생물로서 ‘순전히 기계적인 자기사랑’이라는 동물성의 소질을 가지고 있고, 이성적 존재자로서 ‘비교하는 자기사랑’이라는 인간성의 소질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 소질은 우리가 생물이자 이성적 존재자로서 지닐 수밖에 없는 본성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는 선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법칙보다도 동물성의 소질이나 인간성의 소질을 우선하여 선택을 내리는 상황에서는 두 소질이 각각 ‘동물적 패악’과 ‘악마적 패악’으로 변화하고 만다. 즉, 인간이 지닌 근원적 요소 중에서 그 자체만으로 악한 것으로 단정된 소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소질을 도덕법칙과 상충되는 방향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자연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악을 발생시킨다. 따라서 칸트가 『종교론』에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다.”라는 명제를 통해 상정하고 있는 ‘근본악’이란 인간 종에 내재된 소질(Anlage)이 아니라 인간 종이 지니고 있는 성향(Hang)이다. 인간이 선한 소질을 악한 성향에 따라 오용한다는 사실이 바로 칸트가 ‘근본악’이라는 용어로 고민하는 문제이다. 인간은 도덕법칙을 항상 따르기에는 의지가 허약하다는 사실(인간 본성의 허약성), 인간은 ‘의무에 맞게’ 행동할 때조차 항상 ‘의무에서 나온’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인간적 심정의 불순성), 인간은 도덕적이지 않은 동기를 도덕적 동기보다 자주 우선시한다는 사실(사악성 혹은 인간적 심성의 부패성)이 바로 근본악인 것이다.

(2) 근본악은 극복될 수 있는가 없는가?: 인간에게 근본악이 존재한다는 『종교론』의 입장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자유롭다는 『실천이성비판』의 입장과 얼핏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다.”라는 명제가 참일 경우 인간이 실천이성의 명령을 따라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차단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실천이성의 명령을 따라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경우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다.”라는 명제가 거짓이 된다. 그러나 최소인과 정제기는 근본악의 존재와 도덕의 가능성 사이의 갈등이 단순히 제거되어야 할 모순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그들은 둘 사이의 갈등이야 말로 『실천이성비판』과 『종교론』을 관통하는 “칸트 도덕철학의 근본적 문제상황”(최소인·정제기, 2019: 393)을 드러내준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근본악의 문제를 이율배반의 형태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정립: 인간이 보다 선하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의무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보다 선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반정립: 그러나 인간은 선의 소질에 따라 도덕법칙을 자신의 준칙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으며, 오히려 이를 전도시키려는 악의 성향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부패되어 있다.

(최소인·정제기, 2019: 392)

인간은 실천이성이 명령하는 도덕법칙을 따라 선을 실천해야 하면서도 근본악에 따라 선을 실천할 수 없는 문제상황에 놓여 있다. 『종교론』에서 제시된 소위 ‘근본악의 이율배반’은 『실천이성비판』에서 제시된 최고선에 대한 실천이성의 이율배반과 동일한 구도를 지닌다. 두 이율배반은 모두 “도덕적 필연성을 지닌 명령과 유한한 인간의 한계로 인한 명령의 실행 불가능성의 인정”(최소인과 정제기, 2019: 393)을 대립시키고 있다. 우리가 선을 온전히 추구해야 하면서도 선을 온전히 추구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야 말로 칸트가 도덕철학과 종교철학에서 일관되게 지적하고 있는 문제상황이다. 최소인과 정제기는 칸트의 실천철학 전반에 내재된 고민을 다음과 같은 이율배반의 형태로 요약한다.

정립: 인간은 도덕적인 선을 실현하고 완성시켜야 한다.
반정립: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은 자신의 한계로 인해 온전히 도덕적 선을 실현하고 완성시킬 수 없다.

(최소인·정제기, 2019: 393)

(3) 근본악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칸트는 근본악의 이율배반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세 가지 희망에서 찾는다. (a) 첫째는 근본악보다도 인간에게 있는 선의 소질이 더 근원적이라는 희망이다. 인간이 악으로 향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지닌 자연적 소질 자체는 선하다. 도덕법칙에 따라 행위하고자 하는 선의 동기는 우리가 실천이성을 지닌 존재인 한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 (b) 둘째는 ‘심정의 혁명(Revolution in der Gesinnung)’이 가능하다는 희망이다. 인간은 선의 동기를 바탕으로 모든 상황에서 도덕법칙만을 선택하겠다고 굳게 결단할 수 있다. 설령, 우리가 결단을 철저하게 지키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고선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니고서 도덕법칙을 선택하기로 결단하는 자세는 실제로 악한 성향을 저지하는 실천적 힘이 있다. (c) 셋째는 도덕법칙을 따르기로 결단한 인간을 신이 은총으로 도와줄 것이라는 희망이다. 무한한 신은 언젠가 유한한 인간이 근본악을 완전히 극복한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신의 은총에 대한 종교적 희망은 우리가 현실에 만연해 있는 악에 좌절하지 않고서 최고선을 지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여기서 핵심은 세 가지 희망이 근본악의 극복가능성을 실제로 증명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세 가지 희망은 우리가 ‘근본악의 이율배반’이라고 일컬어지는 문제상황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주체로 존재하기를 포기하지 말 것을 독려하기 위해 제시된다. 즉, 우리는 근본악이 완전히 극복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근본악’이라는 한계에서 시작하여 우리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무한하게 노력할 뿐이다. 칸트는 바로 유한한 한계를 지닌 인간이 끊임없이 탈-한계를 향해 자신을 기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근본악이 실제로 극복될 수 있는지와 상관없이, 한계와 탈-한계라는 이율배반 속에서 갈등하면서도 선을 향해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 자체에서 ‘도덕적 인간의 숭고함’을 발견하는 입장이 바로 칸트의 도덕철학과 종교철학인 것이다.

Ⅱ. 칸트의 도덕철학과 종교철학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

최소인과 정제기는 칸트의 도덕철학과 종교철학을 상호연관적 체계로 다룬다. 그들은 칸트의 도덕철학과 종교철학이 양립 불가능하다는 기존 연구들에 반대하여 두 체계가 한계와 탈-한계 사이에 놓여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동일하게 고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특별히, 그들의 논문은 이러한 과정에서 ‘근본악의 이율배반’과 ‘희망’이라는 주제를 독창적으로 부각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최소인과 정제기의 논문이 (1) 칸트의 도덕철학과 종교철학이 맺고 있는 긴밀한 연관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2) 종교철학에서 제시된 근본악에 대한 고민을 도덕철학에서 제시된 문제상황에 비추어 이율배반의 형태로 새롭게 재구성하였다는 점에서, (3) 칸트의 도덕철학과 종교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서 희망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크게 세 가지 의의를 지닌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1) 최소인과 정제기는 기존 연구들이 칸트의 도덕철학과 종교철학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보지 못한 채 두 체계를 서로 분리시켜 다루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가령, 괴테와 쉴러부터 슈바이처를 거쳐 오늘날의 벡(L. W. Beck), 프라우스(G. Prauss), 콘하르트(K. Konhardt)에 이르는 서구 학자들은 『실천이성비판』과 『종교론』이 서로 양립 불가능한 입장을 담고 있는 체계라고 주장하였다. 국내 학자들도 『실천이성비판』에 나타난 최고선의 문제에만 주목하거나 『종교론』에 나타난 근본악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최소인과 정제기의 논문은 『실천이성비판』과 『종교론』이 각각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희망과 인간이 실제로 놓여 있는 현실을 강조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두 체계가 공유하는 문제상황을 뚜렷하게 부각시킨다. 인간이 주어진 한계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탈-한계를 지향하는 존재라는 칸트의 근본적 통찰을 강조할 경우 칸트의 도덕철학과 종교철학이 서로 상충되는 체계나 서로 무관한 체계로 다루어져야 할 이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체계를 서로 긴밀하게 결합할 때에야 비로소 “칸트가 자신의 도덕철학에서 도덕적 주체, 종교적 믿음, 그리고 종교적 희망을 서로 연결함으로써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최소인·정제기, 2019: 384)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2) 최소인과 정제기는 칸트의 도덕철학과 종교철학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근본악의 문제를 실천이성비판에 나타난 이율배반의 형태로 참신하게 재구성한다. 그들에 따르면, 칸트는 근본악을 극복해야 하는 의무와 근본악을 극복할 수 없는 현실 사이의 이율배반을 인간이 처한 갈등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근본악의 이율배반’이라는 용어 자체는 『종교론』에 명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칸트는 『종교론』에서 근본악의 이율배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도, 이런 이율배반적 상황을 주제적으로 다루지도 않는다.”(최소인·정제기, 2019: 393) 그러나 근본악의 문제를 이율배반의 형태로 해석하는 방식은 『실천이성비판』과 『종교론』 사이의 연관성을 뚜렷하게 드러낸다는 커다란 이점을 지닌다. 『종교론』에서 제시된 “근본악은 극복되어야 한다.”라는 정립과 “근본악은 근절될 수 없다.”라는 반정립은 『실천이성비판』에서 제시된 “최고선이 실현되어야만 한다.”라는 정립과 “인간의 한계로 인해 최고선을 실현할 수 없다.”라는 반정립에 정확히 대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본악의 문제가 이율배반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는 입장이 정당할 경우 『실천이성비판』과 『종교론』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근본적 문제상황이 발견된다. 즉, “인간은 선을 실현하고 완성시켜야 한다.”라는 정립과 “인간은 선을 실현하고 완성시킬 수 없다.”라는 반정립이야 말로 칸트의 도덕철학과 종교철학을 관통하는 고민인 것이다.

(3) 최소인과 정제기는 『실천이성비판』과 『종교론』에서 제시된 칸트의 논의가 궁극적으로 종교적 희망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존 연구들은 근본악의 문제가 한계와 탈-한계에 동시에 속해 있는 인간의 문제상황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에 충분히 주목하지 못한 나머지, ‘근본악’과 ‘희망’을 서로 별개의 주제인 것처럼 다루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종교론』에 고유한 희망철학적 측면을 간과하고 있거나, 근본악 문제에 들어있는 희망철학적 함의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하고 있다.”(최소인·정제기, 2019: 383) 그러나 최소인과 정제기의 논문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칸트의 성찰과 최고선의 실현에 대한 칸트의 독려가 언제나 한 쌍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잘 지적한다. 특별히, 종교적 희망이 지닌 결정적 중요성은 근본악의 문제에서 명확하게 강조된다. 인간의 한계 너머에 ‘더 상위의 협력’으로서 신의 은총이 존재한다는 희망을 상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도덕적 주체로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독려할 수 없다. 근본악에 필연적으로 지배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에 대립하기 위해서는 근본악이 궁극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신이 존재하고, 언젠가 우리가 신의 아들처럼 변화될 수 있고, 최고선이 완전히 실현된 신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종교적 희망이야 말로 우리가 암울한 현실에서도 좌절하지 않고서 악과 맞서 싸우기 위한 투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셋째 희망의 근거인 더 상위의 협력은 근본악의 극복가능성을 온전하게—진정한 의미에서 실현가능한 것으로—희망할 수 있도록 해주며, 여기에 근본악과 연결된 칸트의 도덕신앙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신앙에 근거해서 근본악의 극복과 심정의 혁명의 실현이 인간에게 성취 가능한 희망으로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최소인·정제기, 2019: 403)

Ⅲ. 칸트의 이율배반에 대한 비판

최소인과 정제기의 논문은 칸트의 도덕철학과 종교철학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해석으로서 분명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그들의 논문이 칸트의 입장에 대한 아무런 평가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소 아쉽다. 인간의 이율배반적 상황을 중심으로 근본악과 희망을 해석하는 방식이 칸트의 입장을 명확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하더라도, 칸트의 입장이 과연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어떠한 의의와 한계를 지니는지는 여전히 해명되어야 하는 문제로 남아 있다. 특별히, 근본악과 희망에 대한 논의에 개입된 여러 가지 신학적-형이상학적 가정은 과연 우리가 칸트의 입장을 오늘날에도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최소인과 정제기가 재구성한 칸트의 입장을 비판하고자 한다. 즉, 인간에게 근본악이 존재한다는 칸트의 입장은 과연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인간에게 희망이 존재한다는 칸트의 입장은 과연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인간이 이율배반적 상황에 놓여 있다는 칸트의 입장은 과연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1) 근본악에 대한 비판: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다.”라는 칸트의 입장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적어도 최소인과 정제기가 인간에게 있는 악의 성향으로 요약한 ‘인간 본성의 허약성’, ‘인간적 심정의 불순성’, ‘사악성 혹은 인간적 심성의 부패성’만으로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다.”라는 칸트의 입장이 충분히 정당화되지 않는다. 세 가지 악의 성향은 인간이 도덕법칙과 무관하게 행동하는 사례에 대한 범주적 기술일 뿐이다. 이러한 기술만으로는 인간을 도덕법칙에서 일탈하도록 만드는 신학적-형이상학적 원리로서 ‘근본악’이라는 요소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 실제로, 최소인과 정제기는 근본악이 (a) 인간에게 우연히 발생한 악의 성향에 대한 범주적 기술인지 (b)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악의 본성에 대한 신학적-형이상학적 주장인지를 다소 혼란스럽게 정리한다. 그들은 “악의 성향은 우연적으로 인간 자신으로 인해 초래되는 것이다.”(최소인·정제기, 2019: 386)라고 설명하면서도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의 성향을 가진다.”(최소인·정제기, 2019: 386)라고도 설명한다. 여기서 칸트가 도입한 (그리고 최소인과 정제기가 받아들인) ‘소질’과 ‘성향’이라는 개념 사이의 구분은 무너지고 만다. 즉, 한편으로, 칸트는 근본악이 자연적 소질이 아닌 우연적 성향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칸트는 우연적 악의 성향이 “결코 제거될 수 없다는 절망적인 상황”(최소인·정제기, 2019: 387) 역시 강조한다. 따라서 ‘근본악’이라고 일컬어지는 요소가 과연 ‘소질’에 속하는지 ‘성향’에 속하는지는 애매하다. 칸트의 입장은 근본악이 인간에게 자연적으로(naturally) 주어진 소질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근본악이 인간의 본성(nature)에 필연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2) 종교적 희망에 대한 비판: “근본악을 완전히 극복하는 일이 더 상위의 협력을 통해 비로소 가능할 것”(최소인·정제기, 2019: 401-402)라는 희망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도덕적 주체로 살아갈 것을 독려하기 위해 신에 대한 종교적 희망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신에 대한 종교적 희망이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인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종교적 희망에 대한 별도의 정당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근본악의 이율배반에 대한 대답으로 신의 은총을 이야기하는 입장이 단순히 논점일탈의 오류로 귀결되기만 한다. 즉,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근본악의 극복가능성이다. 칸트는 근본악의 문제에 대해 “근본악은 극복가능하다” 혹은 “근본악은 극복가능하지 않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칸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적어도 최소인과 정제기가 재구성한 칸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근본악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이다. 이러한 입장은 ‘근본악의 극복가능성’이라는 사실의 문제에 대한 물음에 ‘근본악의 극복필요성’이라는 당위의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엉뚱하게 대응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칸트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근본악의 상황에서 실제로 벗어났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최소인·정제기, 2019: 398)라고 강조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근본악을 우리가 실제로 극복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애초에 칸트 본인이 대답하고자 한 문제이다. 종교적 희망에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근본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정적이다. 따라서 근본악의 상황에서 우리가 실제로 벗어났는지는 (적어도 벗어날 수 있는지는) 대단히 중요하다. 종교적 희망에 대한 정당화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칸트의 입장은 자신이 해결하고자 한 문제에 대해 실질적으로 아무런 대답도 주고 있지 않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3) 이율배반에 대한 비판: 근본악과 종교적 희망이 모두 정당화되지 않을 경우 최소인과 정제기가 “칸트 도덕철학의 근본적 문제상황”(최소인·정제기, 2019: 393)이라고 상정한 이율배반은 무너지고 만다. 이율배반을 구성하는 정립과 반정립 중 어느 쪽도 온전히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a) 우리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다.”라는 근본악의 문제를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다. 인간에게 악의 성향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과격한 신학적-형이상학적 가정에 개입해야 한다. 적어도 칸트의 입장은 근본악이 자연적 ‘소질’인지 우연적 ‘성향’인지를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신학적-형이상학적 가정을 제대로 정당화하고 있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b) 우리는 ‘더 상위의 협력’이 존재한다는 종교적 희망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다. 신의 은총이 우리를 도와주어 언젠가 최고선의 완전한 실현을 이룩할 것이라는 희망은 근본악의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아니다. 칸트의 입장은 단지 ‘근본악의 극복가능성’이라는 논점을 흐리기만 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c) 인간이 한계와 탈-한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도덕적 주체로 서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의심스럽다. 우리가 ‘근본악’에 빠져 있다고 절망해야 할 근거나 우리가 ‘더 상위의 협력’을 희망해야 한다고 독려해야 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근본악과 종교적 희망에 대한 가정은 모두 과도한 절망과 근거 없는 희망으로 드러나고 만다.

최소인과 정제기의 논문이 칸트의 입장에 제기될 수 있는 비판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특별히,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논문이 한계와 탈-한계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 인간의 문제상황에 대해 칸트의 도덕철학과 종교철학을 바탕으로 더 넓은 ‘희망철학적’ 전망을 제시하려는 야심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더욱 아쉬움으로 남는다. 아마도 그들의 논문은 희망철학을 다루는 더 포괄적이고 독자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그 체계 속에서 온전히 정초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 제기된 비판이 이후에 성립될 그들의 희망철학을 통해 답변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참고

최소인·정제기, 「근본악과 희망의 문제: 칸트의 『종교론』을 중심으로」, 『철학연구』, 제149권, 대한철학회, 2019, 38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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