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 - 하이데거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견해

안녕하세요.

배경설명: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이하 『논고』)가 하이데거의 철학과 유사하다는 점(대표적으로 『논고』의 5.552, 6.44 명제 참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자가 주목한 바 있습니다. (이에 관한 국내의 연구로는: 이승종, 「반시대적 고찰 :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의 수리논리학 비판」, 『현상학과 현대철학』 제12집, 1999. ; 김영건, 「하이데거와 분석철학 -카르납, 로티, 비트겐슈타인-」, 『철학논집』 제23집,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10. 참조) 비트겐슈타인은 실제로 1929년 12월 30일(월요일)에 하이데거에 관한 짧은 언급을 남깁니다. 전문 번역입니다.

저는 하이데거가 존재(Sein)와 불안(Angst)으로 뜻한 바를 곧잘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언어의 한계로 달려가다 부딪치려는 충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경탄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 경탄은 질문의 형식 안에서 표현될 수 없고, 대답 또한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은 선험적으로(a priori), 그저 무의미하게 존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의 한계에 달려가 부딪칩니다. 이러한 부딪침을 키에르케고르 또한 보았으며, 심지어 그것을 매우 유사하게 (역설로 달려가 부딪침)이라 불렀습니다. 이러한 언어의 한계로 달려가는 부딪침이 윤리입니다. 저는 우리가 윤리에 대한 모든 잡담 - 앎이 있는지, 가치가 있는지, 선(善)이 정의될 수 있는지 등등- 을 끝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윤리학에서 언제나 사물의 본질에 관계하지 않는 것, 관계할 수도 없는 것을 말하려 시도합니다. 이것은 선험적(a priori)으로 확실합니다: 언제나처럼 사람들이 선(善)에 대해 하나의 정의를 내리고 싶어 하는 것은, 언제나처럼 그저 하나의 오해이며, 그들이 실제로 뜻하는 바가 그 표현에 대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질적인 오해라는 것 말입니다. (무어) 그러나 이 경향성, 이 부딪침은 무언가를 가리킵니다. 이를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기, 미쳐 날뛰는 짐승이여, 무의미를 말하지 않으려 하는가? 그저 무의미를 말하거라,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Ich kann mir wohl denken, was Heidegger mit Sein und Angst meint. Der Mensch hat den Trieb, gegen die Grenzen der Sprache anzurennen. Denken Sie z. B. an das Erstaunen, daß etwas existiert. Das Erstaunen kann nicht in Form einer Frage ausgedrückt werden, und es gibt auch gar keine Antwort. Alles, was wir sagen mögen, kann a priori nur Unsinn zu sein. Trotzdem rennen wir gegen die Grenze der Sprache an. Dieses Anrennen hat auch Kierkegaard gesehen und es sogar ganz ähnlich (als Anrennen gegen das Paradoxon) bezeichnet. Dieses Anrennen gegen die Grenze der Sprache ist die Ethik. Ich halte es für sicher wichtig, daß man all dem Geschwätz über Ethik – ob es eine Erkenntnis gebe, ob es Werte gebe, ob sich das Gute definieren lasse etc. - ein Ende macht. In der Ethik macht man immer den Versuch, etwas zu sagen, was das Wesen der Sache nicht betrifft und nie betreffen kann. Es ist a priori gewiß: Was immer man für eine Definition zum Guten geben mag- es ist immer nur ein Mißverständnis, das Eigentliche, was man in Wirklichkeit meint, entspreche sich im Ausdruck (Moore). Aber die Tendenz, das Anrennen, deutet auf etwas hin. Das hat schon der heilige Augustin gewußt, als er sagt: Was, du Mistwieh, du wilst keinen Unsinn reden? Rede nur einen Unsinn, es macht nichts!”(Manfred Geier, Wittgenstein und Heidegger. Die Letzten Philosophen, 218쪽 재인용.)

6개의 좋아요

제가 이해한게 맞다면 비트겐슈타인은 (1) 선을 규정하고 선에 부합하는 대상의 목록을 제시하는것은 불가능하다 (2) 그러나 그것을 규정하려고 하는,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그 경향성에는 중요한 단초?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무한, 절대자에 대한 감정인가요? 이 글이 어떤 맥락에서 의미를 주는지 실은 명확하게 잡히지 않네요.

1개의 좋아요

비트겐슈타인 연구에 필요한 중요한 구절들을 번역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개의 좋아요

댓글에 쓰신 내용이 재미있네요. 댓글 내용으로 단독적인 글를 만들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1개의 좋아요

뭔가 댓글이 있었다가 사라진 것 같은데, 분명 논문 같은 게 아닐까요? 기대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