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캐릭터의 존재론에 대해 참고할 만한 글이 있을까요?

온라인 게임의 아바타나 가상현실의 캐릭터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은데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주체가 아바타를 의도대로 조작하고 어떤 세계와 접촉하는 통로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정신-신체의 관계와 주체-아바타 사이의 관계가 유사하고, 더 나아가 주체는 아바타에게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에 다른 추상적 혹은 허구적 존재자들과 존재론적 위상에 차이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문제와 직결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참고할 만한 논문이나 책이 있으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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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떠오르는게 미우라 도시히코의 <허구세계의 존재론>, 마이클 하임의 <가상현실의 철학적 의미>정도네요.. 근데 두 권 다 30년 전에 나온 낡은 책이라...그래도 참고는 가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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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의도한 바가 명확해야, 자료를 찾는데 수월할 것 같습니다.

(1) 가상현실의 아바타가 "무엇"과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는 것인지, 이 무엇이 애매하다고 보여집니다.

추상적 존재(abstract)와 가상적 존재(fictional)은 살짝 다른 범주입니다. 추상적 존재는 보통 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있는 존재와 다른 것으로 지칭하는데 사용됩니다. 예컨대 숫자나 명제 등이죠. 반대로 가상적 존재는 말 그대로 가상(fiction) 속에 있는 존재자를 가리킵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대표적이죠.

의도하신 바가, 가상현실 캐릭터들이 숫자와 같은 추상적 존재자와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소설과 같은 다른 매체 속에 있는 가상적 존재자와 차이가 있다는 것인지 질문 자체에서는 명확하지 않아보입니다.

아마 전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이므로, 후자를 의도하셨다고 추정되긴합니다.

그렇지만 이 논의에도 애매한 지점이 존재합니다. 의도하신 바는 아바타는 일종의 주체의 연장선으로 "동질감"을 느끼는 것으로 차별화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허나 이 동질감의 정의가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저희가 모든 픽션에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픽션 속 가상적 주인공에 (굳이 이게 내 아바타가 아닐지라도) 감정 이입, 즉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던가요?

아마 의도하신 바는 아바타는 이런 소설 속 가상의 존재자와는 다른 "신체/주체의 연장과 같은 것"으로 주장하고 싶으신 듯합니다. 허나 여기서도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됩니다.
a) 아바타가 신체-주체의 연장이라면, 아바타는 안경 등과 무슨 차이를 가지는가? 안경 역시 눈의 연장이고 이를 통해 저희는 세계와 접촉합니다만, 아바타처럼 열심히 관리하는 경우는 드문듯합니다.

b) 아바타가 특수한 것은 아바타가 가진 존재론적 위상과는 무관한 어떤 "애착"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안경보다 아바타에 더 특별하게 여기는 건, 단순히 우리가 아바타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쏟아부어 애착의 정도가 차이나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쓰신 개요를 읽고 의문되는 바를 간략히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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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ussell93님이 쓰신 것처럼, 『허구세계의 존재론』이라는 책을 어느 정도 참고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 데이비드 루이스 같은 형이상학자들의 논의를 통해 소설 속 캐릭터나 이야기 등과 관련된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는 책이에요. 질문에 정확히 대응하는 내용을 이 책에서 찾으시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허구적 캐릭터들을 철학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논의하는지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2) 철학의 범위를 조금 벗어나서, 사이토 타마키의 『캐릭터의 정신분석』 같은 서브컬쳐 비평 계열의 책들에서도 관련된 내용이 나올 것 같아요. 이 책은 저도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사이토의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이라는 책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읽은 적이 있거든요. (정신분석가인 저자가, 라캉주의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일본 애니에 '전투미소녀'들이 등장하게 된 사회적-심리적 배경을 설명한 내용이었는데, 다소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꽤나 진지한 학술적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캐릭터의 정신분석』에도 '캬라의 하나의 신체'라는 제목을 지닌 장이 있는 걸 보면, 어느 정도 비슷한 주제가 나오지 않을까 하네요.

(3) 서브컬쳐 비평과 관련해서 이 분야의 '고전'이라고 불릴 수 있는 책들이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과 『게임적 리얼리즘』이에요. (농담이 아니라, 두 책은 대학에서 이쪽을 전공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필독서에요.) 두 책은 현대사회를 '데이터베이스 모델'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오늘날의 오타쿠 애니나 게임(주로 '미연시' 게임) 속에서 독자가 겪는 경험이 어떻게 이전의 문학적 경험들과 구분되는지 설명하는 내용이에요. 저는 아즈마 히로키의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많지만, 그래도 가상 현실에서의 경험에 대해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4) 정신-신체 관계에 대한 철학의 가장 고전적 연구로는 역시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이 있죠. victorego님은 신체를 마치 정신이 조종한다는 뉘앙스로 글을 쓰셨지만, 메를로퐁티는 이런 '데카르트주의적' 신체관을 날카롭게 비판해요. 우리의 지각 경험이 언젠나 신체성과 긴밀하게 엮여 있기 때문에, 정신이 신체를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식의 생각들이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오히려 신체의 구조와 분리된 '순수한 정신'이나 '순수한 지각'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메를로퐁티의 지적이에요.

글을 쓴 분께서는 아바타와 다른 추상적/허구적 존재자들의 차이를 심성인과의 매개로서의 가용성 여부의 측면에서 추적하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이는 추상적/허구적 존재자에 관한 주류 담론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거기서 참고하실 만한 내용은 별로 없을 겁니다. 오히려 글을 쓴 분의 문제의식은 가상세계의 형이상학과 마음철학과 더 관련 있는 문제로 보입니다. 입문서는 아닙니다만, 영어가 부담되지 않으신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음철학자인 데이비드 차머스의 신간 Chalmers, D. (2022) Reality+: Virtual Worlds and the Problems of Philosophy와 거기 수록된 참고문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아바타 같은 가상 대상의 형이상학과 가상실재 속 심신문제에 관한 논의가 집중된 4-5부를 참고하시면 관련 논의를 파악하고 논지를 보강하시는 데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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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건 정말 6일 전에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이네요!

아이고… 다들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을 명확하게 드리지 못했는데 상당히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최근에 <허구세계의 존재론>을 끝내고 <Reality+>를 읽고 있는데 원서임에도 읽기 쉽게 쓰여 있고 입장이 일치하는 부분도 많아서 즐겁네요! 서브컬처 비평도 직접적인 관련은 적지만 관심 있는 분야라 눈여겨 보고 있고 남겨주신 의문들도 고민해 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