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한 세계인가, 약동하는 세계인가?: 프레이의 「헤겔의 “전도된 세계”」에 대한 비판

Ⅰ. 들어가는 말

조셉 C. 프레이는 「헤겔의 “전도된 세계”」에서 『정신현상학』의 “힘과 오성” 장(章)에 대한 정합적 해설을 시도한다. 그는 “힘과 오성” 장 후반부에 등장하는 ‘전도된 세계’라는 개념이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에 내재된 부조리를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프레이에 따르면, 헤겔은 “힘과 오성” 장에서 일종의 귀류적 논증(reductio argument)을 제시한다.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이 ‘전도된 세계’라는 부조리로 귀결된다는 사실로부터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논증이 “힘과 오성” 장에서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고는 “힘과 오성” 장에 대한 프레이의 해설이 주석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하고자 한다.1 우선, 본고는 프레이의 해설을 전도된 세계 개념을 중심으로 간략히 요약할 것이다(Ⅱ). 다음으로, 전도된 세계가 ‘부조리한 세계’라는 주장이 지닌 문제를 지적할 것이다(Ⅲ). 그 이후, 헤겔이 “힘과 오성” 장 후반부에서 전도된 세계를 ‘약동하는 세계’로 그려내고 있다고 강조할 것이다(Ⅳ). 마지막으로, 전도된 세계가 약동하는 세계라는 사실이 오늘날의 철학에서 어떠한 함의를 지니는지를 논의할 것이다(Ⅴ).

Ⅱ. 프레이의 전도된 세계

프레이는 『정신현상학』이 자연적 의식에 내재된 부조리를 끊임없이 드러내는 방식으로 철학적 학문의 형성 과정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는 처음 상정된 자연적 의식이 매 순간 부조리에 직면하여 전도되는 과정이야 말로 정신이 현상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즉, 프레이에 따르면, 『정신현상학』은 감각과 상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직접적 정신이 본래적 지식에 도달하여 자신을 실체와 주체로서 자각하게 되는 과정을 해명하는 작품이다. 이러한 과정은 프레이가 “의심과 절망의 여정(journey of doubt and despair)”(Flay, 1970: 664)이라고 일컫는 방식을 따라 이루어진다.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서 출발한 우리의 의식은 처음에는 자신이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고찰하는 상황에서는 그동안 의식이 세계를 어떠한 내용과 구조로 경험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이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서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해 자명하게 전제한 생각들이 부조리(absurdity)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따라서 의식은 부조리에 직면하여 자신이 그동안 지닌 믿음에 대해 의심하고 절망하는 과정 속에서 다양한 의식의 양태를 통과한다. 우리가 의심과 절망의 여정 끝에 획득하게 되는 ‘철학적 학문(philosophical science)’이란 결국 자연적 의식의 전도인 것이다. 프레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철학적 학문은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유일한 학문인데) 부조리이며, 직접적인 저인 혹은 자연적 의식의 우월함으로부터의, 자연적이지 않은 전도(ein Verkehrtes)이다. 따라서, 『정신현상학』의 전체 작업은 처음으로 현상한 것의 이해가능성이 부조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명료하게 하는 것이다.(Flay, 1970: 664)

『정신현상학』의 “힘과 오성” 장 역시 세계를 힘의 법칙에 따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직면하게 되는 부조리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여겨진다. 프레이에 따르면, “힘과 오성” 장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의식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현상을 ‘힘’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지각” 장에서 다루어진 지각적 세계는 “힘과 오성” 장에서는 더 이상 궁극적 실재가 아니다. 지각을 통해 파악되는 현상 뒤편에는 이제 힘의 법칙으로 구성된 초감성적 세계가 궁극적 실재로서 새롭게 상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초감성적 세계 역시 궁극적 실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진다.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은 결국에는 (동적이고, 무법칙적이고, 변화하는) 현상과 (정적이고, 법칙적이고, 불변하는) 초감성적 세계가 동일하다는 부조리한 결론을 함의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힘과 오성” 장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전도된 세계’라는 개념이 바로 초감성적 세계가 현상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되는 상황에서 생겨나는 “부조리한 입장”(Flay, 1970: 662)이다.

프레이는 “힘과 오성” 장에서 헤겔이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방식이 일종의 귀류법 논증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헤겔이 귀류법 논증을 통해 전도된 세계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관념론을 도출하였다고 주장한다(Flay, 1970: 677-678 참고). 따라서 우리는 프레이가 제시한 “힘과 오성” 장에 대한 해설을, 프레이가 이야기한 귀류적 논증의 형식2을 통해, 다음과 같이 더욱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p: “힘과 오성” 장의 초반부에서 이해하는 의식(understanding-consciousness)인 오성은 세계를 힘의 법칙 아래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여기서 세계는 끊임없는 변화의 영역(realm of change)인 현상과 법칙의 객관적 영역(objective realm of law)인 초감성적 세계로 이분화된다. 이제 오성에게는 현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실재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법칙을 통해 파악하는 작업이 바로 세계에 대한 설명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문제는 ‘설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러한 과정이 단순한 동어반복이라는 혐의를 벗어버리기 어렵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초감성적 세계를 통해 현상을 설명하는 활동이란 사실상 ‘보편자’와 ‘필연성’이라는 이름으로 현상을 재서술하는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현상을 초감성적 세계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작업이 결국 현상을 현상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프레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간단히 말해, 이러한 입장에서 오성은 단지 잡다의 구성이나 현상의 세계를 보편성과 필연성의 형식 아래에서 반복할 뿐이다. 오성은 자신을 동어반복적 과정 속에 포함시키며 “아무것도 분명하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너무 분명해서 이미 말해진 것과 다른 무엇인가를 말할 준비를 할 때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단지 동일한 것을 다시 반복한다.”(Flay, 1970: 668)

(2) q · -q: 초감성적 세계를 통해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동어반복을 넘어설 수 없다는 깨달음은 초감성적 세계와 현상이 사실상 동일하다는 깨달음 을 함의한다. “설명이란 단지 그 근거가 이해 자체에 놓여 있는 현상에 대한 설명일 뿐이라는 깨달음으로부터 […], 우리는 법칙의 영역(변화 없음, 다수임을 통해 영속성)과 변화의 영역(현상, 잡다한 사건)이 의식에게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깨달음에 이른다.”(Flay, 1970: 669) 즉, 처음에 우리는 동적이고, 무법칙적이고, 변화하는 현상 뒤편에 정적이고, 법칙적이고, 불변하는 초감성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이분법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초감성적 세계를 현상과 다르지 않은 변화의 영역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여기서 새롭게 파악된 ‘두 번째 초감성적 세계’는 이전에 파악된 ‘첫 번째 초감성적 세계’를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놓은 것만 같은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헤겔은 이러한 새로운 초감성적 세계를 ‘전도된 세계’라고 일컫는다. 프레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지성적 세계와 감성적 세계, 변화하지 않는 것과 변화하는 것, 일자와 다자, 동일한 것과 다른 것은, 이제 하나이며 동일한 영역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역은 사물의 내적인 것으로서, 현상 자체의 근거로서 밝혀진다. 이러한 세계가 처음에 두 번째 초감성적 세계로서, 부조리하며 첫 번째 것의 전도인 현상의 두 번째 법칙과 함께 현상한다 . 전도의 이유는 모든 구별이 내적인 구별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는 다수이고 다수는 하나이다.(Flay, 1970: 675)

(3) -p: 그러나 전도된 세계란 부조리한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현상 뒤편에 존재하는 정적이고, 법칙적이고, 불변하는 초감성적 세계가 동시에 동적이고, 무법칙적이고, 변화하는 현상과 동일하다는 주장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다. 이러한 전도된 세계를 받아들인 입장에서는 동일성과 차이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 “변화하는 지각적 세계가 이러한 두 번째, 초감성적, 법칙적 세계인 한에서, 불안정성, 변화, 차이는 안정성, 변화 없음, 동일성과 같다. 차이이면서 그러므로 동일성인 것은 무의미해진다. 두 번째 초감성적 영역의 법칙은, 여기서 잘못 해석됨에 따라, 사실상 법칙 없음이다.”(Flay, 1970: 676) 따라서 우리는 전도된 세계가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잘못된 세계라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처음 상정한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을 부정하는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애초에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을 상정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전도된 세계’라는 부조리 자체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레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따라서, 전도된 부조리한 세계는 인식자가 객관적 현상과 이러한 현상을 근거짓는 초감성적인 것에 맞서면서 초월적으로 서 있는 의식의 순수한 태도의 관점에서는 전도되고 부조리한 것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의식의 한계가 명확하게 우리 앞에 제시될 때, 이러한 이중성의 전도에 대한 자각 및 앎과 알려질 수 있는 것의 그러한 경험으로의 붕괴에 대한 자각이 존재할 때, 부조리는 증발한다. 이러한 “부조리의 증발”과 함께 우리는 절대적 지식과 철학적 학문을 향한 결정적인 걸음을 내딛는다(Flay, 1970: 677)

따라서 프레이가 “힘과 오성” 장에 대해 제시한 해설은 전제에서부터 모순된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으로 해당 전제를 부정하는 형식을 지닌다. 즉, “힘과 오성” 장은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가 오성에게 서로 구별된다는 이분법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이러한 이분법은 결국 초감성적 세계를 통해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실패하는 것으로 비판받는 과정에서 ‘전도된 세계’라는 모순에 도달하는 것으로 밝혀진다. 이제 우리는 처음 상정된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을 폐기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귀류적 논증의 형식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힘과 오성” 장의 논의는 다음과 같다.

현상 뒤편에 초감성적 세계가 존재한다면,
초감성적 세계는 변화하는 세계이면서 변화하는 세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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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상 뒤편에 초감성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프레이는 현상 뒤편에 초감성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관념론을 함의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는 감각과 상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출발한 자연적 의식이 “힘과 오성” 장에 이르러 마침내 실재에 대한 급진적 의문에 도달한다고 주장한다. 궁극적 실재라고 여겨진 초감성적 세계가 “힘과 오성” 장 후반부에서 부조리로 논증되는 과정에서 관념론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상과 진리가 즉자적으로 존재하며 의식과 다르다는 (헤겔이 이미 서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학문을 부조리하고 전도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상식, 자연적 태도에 급진적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는 모든 참된 철학에서 받아들여지는 관념론의 원리를 위한 근거를 놓았다.”(Flay, 1970: 677)

Ⅲ. 전도된 세계는 과연 부조리한 세계인가?

프레이의 해설이 “힘과 오성” 장에 대한 주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몇 가지 주제들을 명료하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힘들다. 특별히, 그의 해설은 힘의 법칙을 찾고자 하는 시도에 내재된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 설명 개념의 의의와 한계, 첫 번째 초감성적 세계와 두 번째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대비를 잘 지적하고 있다. 다만, 프레이는 자신의 해설을 귀류적 논증의 형식에 너무 억지로 끼워 맞춘 나머지 정작 “힘과 오성” 장의 전체 논의가 진행되는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크게 세 가지 질문을 통해 프레이가 제시한 해설이 과연 주석적으로 적절한지를 평가하고자 한다.

(1) 전도된 세계는 과연 부조리한 세계인가?: 전도된 세계가 부조리한 세계라는 주장은 프레이의 해설에서 핵심적인데도 정작 “힘과 오성” 장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헤겔은 그 어디에서도 전도된 세계를 부조리하다거나, 오해라거나, 부정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 오히려 헤겔은 프레이가 비판한 ‘모순(Widerspruch)’이라는 개념을 “힘과 오성” 장에서 매우 긍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헤겔에 따르면, 전도된 세계는 얼핏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단맛과 신맛, 검은 색과 흰 색, 북극과 남극, 산소 극과 수소 극 같은) 극들이 실제로는 서로 완전히 분리된 상태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극들은 ‘순수한 교체(reine Wechsel)’ 혹은 ‘자기 자신 속의 대립(Entgegensetzung in sich selbst)’이라는 형태로 서로 뒤엉켜 모순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여기서 극들이 맺고 있는 모순적 관계는 사유되어야만 한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두 극들을 마치 서로 분리된 것처럼 오해하도록 만드는 ‘구별의 고정에 관한 감성적 표상(sinnliche Vorstellung von der Befestigung der Unterschiede)’은 제거되어야만 한다고 강조된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초감성적 세계가 지닌 하나의 측면의 본질을 형성하는 전도의 표상으로부터, 존립의 상이한 요소 속에 있는 구별의 고정에 관한 감성적 표상은 제거되어야 하고, 구별의 이러한 절대적 개념은 내적 구별로서, 같은 이름의 것(Gleichnamige)의 밀어냄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같은 이름의 것으로서 그리고 동일하지 않은 것(Ungleiche)의 동일한 존재(Gleichsein)는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서 순수하게 서술되고 파악되어야 한다. 순수한 교체나 자기 자신 속의 대립 , [곧] 모순 이 사유되어야 한다(Hegel, 1986: 130).

헤겔은 이외에도 “힘과 오성” 장 후반부와 “자기의식” 장 초반부에서 핵심이 되는 수많은 개념들을 전도된 세계에 적용한다. 그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초감성적 세계가 ‘무한성(Unendlichkeit)’이자, ‘절대적 개념(absolute Begriff)’이자, ‘생명의 단순한 본질(einfache Wesen des Lebens)’이자, ‘세계의 영혼(Seele der Welt)’이자, ‘보편적 혈통(allgemeine Blut)’이라고 일컫는다(Hegel, 1986: 132 참고). 여기서 헤겔이 전도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한성’과 ‘생명’ 같은 긍정적 용어들은 프레이가 전도된 세계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는 ‘부조리’와 ‘오해’ 같은 부정적 용어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러한 용어들은 전도된 세계를 거부되어야 하는 입장이 아니라 지지되어야 하는 입장으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전도된 세계가 부조리한 세계라는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오히려 전도된 세계는 “힘과 오성” 장 후반부에 긍정적 의미로 제시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2) 헤겔은 귀류적 논증을 제시하는가?: 전도된 세계가 부조리한 세계로 여겨질 수 없다는 사실은 “힘과 오성” 장의 논의가 귀류적 논증의 형식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힘과 오성” 장이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에 내재된 문제를 고민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문제로부터 ‘전도된 세계’를 부조리로서 이끌어내고 있지는 않다. 당연하게도, 처음 상정된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이 폐기되어야 하는 논리적 타당성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즉, 적어도 헤겔이 “힘과 오성” 장에서 말하고자 한 내용이란 ‘p ⊃ (q · -q)’라는 전제로부터 ‘-p’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귀류적 논증이 아니다. 현상 뒤편에 초감성적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p)이 논의의 시작점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서는, 전도된 세계가 제거되어야 할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는 주장(q · -q)도,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결론(-p)도 “힘과 오성” 장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3

(3) 관념론이 “힘과 오성” 장의 결론인가?: “힘과 오성” 장의 후반부가 관념론의 원리를 지지한다는 주장 역시 정당하지 않다. 전도된 세계가 헤겔이 “힘과 오성” 장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이 아니 한, 전도된 세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관념론의 원리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논증은 성립하지 않는다. 즉, “힘과 오성” 장은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을 비판하고 있지 않다. 거부되는 것은 첫 번째 초감성적 세계이지 초감성적 세계 자체가 아니다. 두 번째 초감성적 세계는 (프레이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여전히 ‘궁극적 실재’로서 남아 있다.4 프레이가 비판하고자 하는 전도된 세계는 헤겔이 옹호하고자 하는 ‘무한성’, ‘절대적 개념’, ‘생명의 단순한 본질’, ‘세계의 영혼’, ‘보편적 혈통’이다. 따라서 “힘과 오성” 장의 내용으로부터 현상 뒤편에 초감성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론의 원리를 도출해내고자 하는 시도는 논리적 비약이다. 실제로, 애초에 ‘관념론’이라는 용어는 “힘과 오성” 장에서 등장하지조차 않는다. 『정신현상학』에서 관념론에 대한 논의는 “이성” 장에서야 명시적으로 다루어진다(Hegel, 1986: 179 이하 참조).

Ⅳ. 헤겔의 전도된 세계

프레이의 해설이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로부터 이제 “힘과 오성” 장을 새롭게 독해해야 할 필요가 생겨난다. 우리는 헤겔이 (관념론의 원리를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왜 “힘과 오성” 장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인지, ‘전도된 세계’가 (부조리한 세계가 아니라면) 과연 무엇인지,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으로부터 시작된 논의가 (귀류적 논증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어떻게 ‘전도된 세계’라는 결론에 이르는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답해야 한다. 이러한 해설은 우선 “힘과 오성” 장의 구조를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즉, 힘이란 무엇인지(Hegel, 1986: 107-116 참고), 첫 번째 초감성적 세계란 무엇인지(Hegel, 1986: 116-126 참고), 두 번째 초감성적 세계란 무엇인지(Hegel, 1986: 127-136 참고)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프레이의 해설에 대한 대안으로서 “힘과 오성” 장에 대한 새로운 해설이 요약적으로 제시될 것이다.

(1) 힘이란 무엇인가?: 헤겔은 “힘과 오성” 장의 첫 부분에서 힘의 개념에 대해 서술한다. 그는 우선 (“지각” 장을 통해) 의식의 대상으로 주어지게 된 ‘무조건적 보편자(das Unbedingt-Allgemine)’를 고찰하여 힘의 개념을 도출한다. 즉, 사물을 무조건적 보편자로 파악한다는 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한편으로, 사물은 다양한 보편자들(속성들)이 모인 집합체로서 ‘다수성(Vielheit)’이라는 형태로 파악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물은 보편자들(속성들)이 서로 나누어지지 않게 결합된 개체로서 ‘단일성(Einheit)’이라는 형태로 역시 파악된다. 여기서 ‘힘(Kraft)’이라는 개념은 얼핏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다수성’과 ‘단일성’이라는 두 현상이 실제로는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도입된다. 사물을 힘의 관점에서 바라볼 경우에는 다수성과 단일성이 힘의 운동에 따라 발생한 두 가지 측면으로 파악될 수 있다. 하나의 단일한 힘이 자신을 전개하여 표출된 상태가 다수성을 형성하고, 그 힘이 자기 내부로 되돌려진 상태가 단일성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자립적으로 정립된 것이 직접적으로 그것들의 단일성으로 건너가고 그것들의 단일성이 직접적으로 전개(Entfaltung)로 건너가며 이러한 전개가 다시 환원으로 회귀한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이 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즉,] 이러한 운동의 한 계기, 다시 말해, 자신의 존재 안에 자립적 물질의 확장으로서의 힘은, 힘의 표출 이며 그러나 이러한 자립적 물질의 소멸해있음으로서의 힘은 자립적 물질의 표출로부터 자신으로 떠밀려들어간 힘 혹은 본래적인 힘이다.(Hegel, 1986: 110)

따라서 힘의 운동은 자신 안에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힘이란 단일한 하나의 힘으로서 ‘자신 안으로 되돌려지는 본래적 힘(der in sich zurückgedrängten eigentlichen Kraft)’이라는 형태를 지니면서도 다양한 현상으로서 ‘자립적 질료의 전개(Entfaltung der selbständigen Materien)’라는 형태 역시 지닌다. 두 측면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상반된 두 가지 측면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함께 존립하고 있을 때에야 힘이 존립할 수 있다. “힘(sie)은 이러한 대립되는 방식으로 실존하며 이는 다름 아니라 양쪽 계기가 동시에 자립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Hegel, 1986: 111) 하나의 힘 속에 내재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대립되어 있는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이후에 ‘유발하는 힘(das Sollizitierende)’과 ‘유발되는 힘(das Sollizitierte)’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여기서 핵심은 유발하는 힘과 유발되는 힘이 언제나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양쪽 힘들의 놀이(das Spiel der beiden Kräfte)’라는 하나의 현상을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각각의 힘들은 (혼자서 자립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대편 힘으로 전환되는 (일종의 놀이와도 같은) 운동 속에서 ‘힘’이라는 하나의 현상을 구성한다는 것이다.5 헤겔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로부터 힘의 개념이 두 가지 힘 속의 이중화를 통해 현실적으로 된다는 사실과 어떻게 그 개념이 이것이 되는지가 밝혀진다. 이러한 두 가지 힘들은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본질로서 실존하며 그러나 그 힘들의 실존은 서로에 대한 운동과 같은데 그래서 그 힘들의 존재 는 오히려 타자를 통해 순수하게 정립된 존재이며 즉, 그래서 그 힘들의 존재는 오히려 소멸 의 순수한 의미를 지닌다.(Hegel, 1986: 114)

(2) 첫 번째 초감성적 세계란 무엇인가?: “힘과 오성” 장의 중반부는 힘의 놀이를 ‘법칙(Gesetz)’이라는 형태로 파악하고자 하는 오성의 시도를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즉, 우리는 사물을 무제약적 보편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입장에서 나타나는 다수성과 단일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도입하였다. 이제 사물은 유발하는 힘과 유발되는 힘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물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힘의 상호작용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물의 모습은 단지 현상(Erscheinung)이고,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힘의 상호작용이야 말로 사물의 진정한 본질(wahrhafte Wesen der Dinge)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물의 이러한 진정한 본질은 이제 그것이 의식에 대해 직접적이지 않다고 [규정되었고], 오히려 이러한 것(의식)은 내면적인 것과의 매개적 관계를 가지며 오성으로서 힘의 놀이의 이러한 중심을 통해 사물의 참된 배경을 바라본다고 규정되었다. 오성과 내면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극을 묶는 중심은, 오성 자체에 대해서는 이제 사라진 것 인, 힘의 전개된 존재 이다. 그런 이유로 그 중심은 현상 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가상[겉모습]을 직접적으로, 그 자체로 비존재존재 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Hegel, 1986: 116)

따라서 오성은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현상 뒤편에 힘의 법칙(Gesetz der Kraft)으로 이루어진 초감성적 세계를 상정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힘의 법칙을 향해 나아가는 작업이야 말로 오성에게는 사물의 내적 영역으로 향해 나아가는 작업으로 여겨진다. “보편자와 개별자의 대립 으로부터 벗어난, 그리고 오성에 대해 생성된 절대적 보편자로서의, 이러한 내적 진리 에서, 비로소 현상하는 세계 로서의 감성적인 세계 너머에 이제 참된 세계로서 초감성적인 세계 가 열린다.”(Hegel, 1986: 117) 가령, 즉자적으로 보편적인 통일성(die an sich allgemeine Einheit)을 발견하고자 하는 뉴턴 역학의 시도가 바로 초감성적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오성의 시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뉴턴 역학이야 말로 모든 사물이 힘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철저하게 개진하여 단 하나의 법칙 아래에서 힘의 상호작용을 완벽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오성(er)은 많은 법칙들을 이런 이유로 오히려 [뉴턴 역학과 같은] 하나의 법칙으로 일치하도록 하는데, 예를 들어, 돌이 떨어지는 법칙과 천상의 영역이 움직이는 법칙이 하나의 법칙으로서 파악된 것처럼 말이다.”(Hegel, 1986: 121)

그러나 단 하나의 법칙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힘의 상호작용에 대한 설명(Erklären)이란 결국 일종의 동어반복적 운동(tautologische Bewegung)을 넘어설 수 없다는 문제를 지닌다. 가령, 뉴턴 역학이 모든 현상을 ‘보편적 인력(allgemeine Attraktion, 만유인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자 할수록 ‘보편적 인력’이라는 개념은 점점 더 공허해지고 만다. 더 많은 현상들을 포괄하는 법칙이란 실제로는 더 현실과 괴리된 추상적인 법칙일 수밖에 없다. 모든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법칙이란 역설적이게도 아무런 문제도 설명하지 못하는 법칙과 다르지 않다. 법칙이 어떠한 현상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법칙의 내용이 대단히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법칙들끼리의] 이러한 서로를 향한 뒤섞임(Ineinanderfallen)과 함께, 법칙은 자신의 규정성을 상실하는데, 법칙은 점점 더 피상적이 되고, 이와 함께 사실상 이러한 규정된 법칙들 의 통일성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규정성을 상실하는 법칙이 발견된다. 마치 땅에 떨어지는 물체의 법칙과 천상의 운동의 법칙을 자신 속에 통합하는 법칙이, [그러면서도] 그들 양쪽을 사실상 표현하지 않는 하나의 법칙이 발견되는 것과 같다. 보편적 인력[만유인력] 으로의 모든 법칙들의 합일은 법칙 안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정립되는 법칙들 자체의 순전한 개념 과 같은 것 이상의 내용을 표현하지 않는다.”(Hegel, 1986: 121)

(3) 두 번째 초감성적 세계란 무엇인가?: 따라서 “힘과 오성” 장의 후반부에서는 초감성적 세계를 (뉴턴 역학과 다른) 새로운 법칙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논의가 전개된다. 힘의 법칙을 점점 더 추상화시키는 작업으로는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후에 고민되는 사안이다. 여기서 바로 ‘전도된 세계(verkehrte Welt)’라고 일컬어지는 새로운 초감성적 세계가 등장한다. 즉, 힘들의 놀이란 결코 고정된 형태로 설명될 수 없는 절대적 교체(absolute Wechsel) 그 자체이다. 우리가 오성을 통해 사물을 힘의 법칙 아래에서 파악하고자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힘들의 놀이에서 발생하는 절대적 교체가 힘의 법칙 속에 가두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힘의 법칙에 대한 사유를 더 철저하게 전개하고자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힘이 우리가 처음 찾고자 한 ‘즉자적으로 보편적인 통일성’을 통해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오성의 운동(ihr) 속에서 우리는 단지 법칙에서 없다고 하였던 것을 즉 절대적 교체 자체를 인식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운동 은, 우리가 그 운동을 더 상세하게 고찰할 경우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의 반대이다.”(Hegel, 1986: 126) 절대적 교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그동안 우리가 힘의 법칙에 따라 파악한 초감성적 세계가 완전히 전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설명을 통해 이전에 내적인 것 외부에 단지 현상에서 존재한 변천과 교체가 초감성적인 것 자체 속으로 침투되며, 우리의 의식은 그러나 대상으로서의 내적인 것으로부터 다른 측면을 향해 오성 속으로 넘어갔으며(herübergegangen), 오성(ihm) 속에 교체를 지닌다. 이러한 교체는 그러므로 아직 사태 자체의 교체가 아니라, 오히려 교체의 계기들의 내용 이 내용(derselbe)에 머문다는 사실을 통해, 순수한 교체 로서 서술된다. 그러나 오성의 개념으로서의 개념 이 사물들의 내적인 것 과 같은 것인 한에서, 이러한 교체 는 오성(ihn)에 대해 내적인 것의 법칙 이 된다.(Hegel, 1986: 126)

이제 초감성적 세계는 약동하는 세계로서 새롭게 파악된다. 힘과 힘 사이에서 벌어지는 절대적 교체란 단순히 현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초감성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이해된다. 즉, 우리가 바라보는 사물의 뒤편에는 ‘즉자적으로 보편적인 통일성’이 아니라 ‘절대적 교체’가 존재한다. 변화하는 힘을 넘어서 변하지 않는 힘의 법칙에 도달하고자 한 시도의 끝에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진리란 역설적이게도 초감성적 세계야 말로 끊임없는 변화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세계를 명확하게 구별되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표상하고자 하는 입장이란 아직 초감성적 세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진다. “존립의 상이한 요소 속에 있는 구별의 고정에 관한 감성적 표상은 제거되어야 한다.”(Hegel, 1986: 130) 오히려 현상에서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하였던 두 극이 실제로는 초감성적 세계에서 아무런 구별 없이 뒤엉켜 끊임없이 서로 교체되고 있는 것으로 사유되어야 한다. “순수한 교체나 자기 자신 속의 대립 , [곧] 모순 이 사유되어야 한다.”(Hegel, 1986: 130) 현상을 ‘힘의 법칙Gesetz der Kraft)’이라는 보편적, 추상적, 통일적 질서를 통해 표상하고자 하는 입장이 철저하게 개진된 상황에서는 (처음 입장과는 반대로) 초감성적 세계를 ‘현상 자체의 법칙(Gesetz der Erscheinung selbst)’이라는 개별적, 구체적, 분열적 질서로 파악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여기서 ‘순수한 교체’이자 ‘자기 자신 속의 대립’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초감성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도입되는 용어가 바로 ‘무한성’과 ‘생명’과 ‘자기의식’이다.6 헤겔은 이러한 용어들을 통해 사물이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서 역동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양쪽 구별된 것들(Unterschiedene)은 존립하는데, [즉,] 그들은 즉자적으로 존재하며, 즉자적으로 대립된 것으로서 존재하며, 다시 말해 그들 자신의 대립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데, 그들은 그들의 타자를 그들에게서 지니며 단지 하나의 단일성이다. 이러한 단순한 무한성 또는 절대적 개념은 [……] 생명의 단순한 본질, 세계의 영혼, 보편적 혈통이라고 불릴 수 있다.”(Hegel, 1986: 132)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에게 대립되는 요소를 자신 내부에 포함한 상태에서 고정된 형태 없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에서 ‘무한성’을 지닌다. 마치 유기체가 명확한 부분으로 분절될 수 없는 것처럼, 매 순간 세포분열을 통해 변화하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의 단일성을 계속 유지하는 것처럼, 사물은 절대적 교체 속에서 마치 ‘생명’과도 유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특별히, 다양한 생명 현상 중에서도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과 대립시켜 사유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라는 단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자기의식’이야 말로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을 가장 잘 나타낸다. 따라서 “힘과 오성” 장의 마지막은 ‘무한성’과 ‘생명’에 대한 논의를 통해 결국 “자기의식” 장으로 이어진다.

Ⅴ. 전도된 세계는 약동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헤겔이 “힘과 오성” 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논의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사물은 (뉴턴 역학이 제시하는 것과 같은) 힘의 법칙만으로는 충분히 파악되지 않는다. 힘의 법칙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모든 현상을 힘의 법칙에 자의적으로 끼워 맞추려는 시도로 귀결되고 만다. 둘째로, (대립되는 두 힘이 서로를 향해 변화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절대적 교체야 말로 사물의 진정한 본질이다. 사물과 사물이 서로 구별된 것처럼 보이는 현상 뒤편에는 아무런 구별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초감성적 세계가 존재한다. 셋째로, 초감성적 세계가 절대적 교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힘의 법칙에 대한 사유를 철저하게 개진하는 과정에서 도출된다, 힘의 법칙을 찾고자 하는 작업은 그 끝에 이르러 현상의 법칙을 옹호하는 결론을 낳는다. 우리는 “힘과 오성” 장에서 제시된 이러한 논의가 오늘날의 철학에서 지닐 수 있는 함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뉴턴 역학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실증주의(positivism)에 대한 반증주의(falsificationism)의 비판을 선취하고 있다. 두 입장은 특정한 이론이 단순히 높은 설명력을 지닌다는 사실만으로 그 이론이 곧바로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지적한다. 즉, 설명력이 높은 이론 중에는 반증가능성이 없는 이론 역시 포함된다. 특별히, 모든 현상을 설명한다고 자부하는 이론이란 반증가능성 자체를 허용하지 않기로 선언하는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론은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기준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단지, 자신과 상충하는 사례를 독단적으로 무시하거나, 부주의하게 간과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할 뿐이다. 따라서 반증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론에서는 ‘설명’이라는 작업이 아무런 내용 없는 공허한 주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물론, 뉴턴 역학에서 제시되는 설명이 과연 헤겔이 비판한 것처럼 반증가능성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동어반복적’ 운동에 지나지 않는지는 재고되어야 한다. 뉴턴 역학이 높은 설명력을 지닌다는 사실만으로 뉴턴 역학이 반증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기 때문이다. 다만, 높은 설명력을 지닌 이론이 그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유의미한 이론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높은 설명력을 지닌 이론도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는 점에서) “힘과 오성” 장에서 이루어지는 뉴턴 역학 비판은 ‘반증주의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7

(2) 초감성적 세계를 약동하는 세계로 서술하는 “힘과 오성” 장 후반부의 내용은 ‘생성의 철학(Philosophie des Werdens)’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조와 공명한다. 헤겔의 ‘절대적 교체’ 개념은 니체의 ‘힘에의 의지’, 베르크손의 ‘생명의 약동’, 들뢰즈의 ‘차이 자체’라는 개념과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 즉, 헤겔의 철학이 현상을 힘의 법칙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입장에 반대하여 세계를 ‘순수한 교체’, ‘자기 자신 속의 대립’, ‘모순’으로 묘사하고자 한 것처럼, 생성의 철학은 존재를 수리물리학적 법칙으로 고정시키고자 하는 시도에 저항하여 세계를 끊임없는 ‘생성’, ‘변화’, ‘차이’의 관점에서 묘사하고자 한다. 특별히, 헤겔의 철학에서 ‘생명’이 힘들의 끊임없는 교체를 나타내는 표상인 것처럼, 생성의 철학에서 역시 ‘생명’은 차이 자체로 이루어진 세계의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을 표현하는 이미지이다. 물론, 세계를 약동하는 ‘생명’의 구조로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은 “힘과 오성” 장의 결론이지 『정신현상학』 전체의 결론은 아니다. 헤겔의 철학은 생성의 철학이 결론으로 받아들이는 세계의 이미지에서 안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힘과 오성” 장의 논의 자체는 오늘날 생성의 철학이 주장한 내용에 많은 부분 대응한다. 따라서 우리는 “힘과 오성” 장의 논의와 그 이후의 논의를 통해 생성의 철학이 지닌 의의와 한계를 헤겔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3) “힘과 오성” 장의 논의는 힘의 법칙에 대한 일종의 탈구축이다. 헤겔은 힘의 법칙을 찾고자 하는 사유로부터 역설적이게도 현상의 법칙을 옹호하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즉, 한편으로, 헤겔의 논의는 보편적 인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동어반복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힘의 법칙을 찾고자 하는 사유를 파괴(deconstruction)한다. 힘의 법칙에 따라 표상된 첫 번째 초감성적 세계는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헤겔의 논의는 동어반복으로 폭로된 힘의 법칙이 절대적 교체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초감성적 세계를 약동하는 세계로 이해해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을 구축(construction)한다. 여기서 현상의 법칙에 따라 표상된 두 번째 초감성적 세계가 성립된다. 따라서 “힘과 오성” 장에서 제시되는 논의는 파괴와 구축의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담고 있다. 처음 상정된 주장에 대한 파괴는 곧바로 이후 등장하는 주장을 위한 구축에 기여한다. 데리다가 ‘파괴’와 ‘구축’이라는 단어를 혼합하여 만들어낸 ‘탈구축(deconstruction)’이라는 용어는 ‘변증법(Dialektik)’이라고 일컬어지는 헤겔의 논의 전개 방식에 내재된 이러한 양면적 성격을 표현하기에 대단히 적합해 보인다. 헤겔의 ‘변증법’과 데리다의 ‘탈구축’이 과연 세부 사항에서도 일치하는지에 대해서는 더욱 비판적 고찰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두 방법론은 파괴와 동시에 구축을 시작하는 사유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만큼은 일치하고 있다.8

Ⅵ. 나가는 말

따라서 “힘과 오성” 장에 대한 프레이의 해설과 “힘과 오성” 장에서 헤겔이 실제로 제시한 내용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존재한다. 프레이에 따르면, “힘과 오성” 장은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을 비판하는 논의를 담고 있고, 그 결론으로 관념론을 도출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귀류적 논증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주장은 ‘전도된 세계’가 ‘부조리한 세계’라는 해석을 전제로 성립한다. 그러나 헤겔이 “힘과 오성” 장 어디에서도 전도된 세계를 비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프레이가 제시한 해설을 의문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당연하게도, “힘과 오성” 장이 관념론을 주장하고 있다거나 귀류적 논증을 따르고 있다는 입장 역시 전도된 세계에 대한 해설이 정당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다. 오히려 “힘과 오성” 장에서 제시된 내용은 현상과 초감성적 세계 사이의 이분법이 아니라 뉴턴 역학을 비판하고 있다고 해석되어야 한다. “힘과 오성” 장이 도달하고자 하는 결론이란 관념론이 아니라 현상의 법칙이라고 여겨져야 한다. “힘과 오성” 장이 따르고 있는 논의 전개 방식 역시 귀류적 논증이 아니라 힘의 법칙에 대한 전도라고 독해되어야 한다. 헤겔의 ‘전도된 세계’란 제거되어야 하는 ‘부조리한 세계’가 아니라 사유되어야 하는 ‘약동하는 세계’인 것이다.

참고 문헌

Hegel, G. W. F., Phänomenologie des Geistes,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Werke Bd. 3., Suhrkamp, 1986.

Brinkmann, K., “The Dialectic of the Inverted World and the Meaning of Aufhebung”, The Dimensions of Hegel’s Dialectic, N. G. Limnatis (ed.), Continuum, 2010, 76-96.

Derrida, J.,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옮김, 민음사, 2010.

Flay, J. C., “Hegel’s “Inverted World””, Review of Metaphysics, 23(4), 1970, 662–678.

Maybee, J. E., “Hegel’s Dialectics”,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20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win2020/entries/hegel-dialectics/

Popper, K., 「변증법이란 무엇인가」, 『추측과 논박』, 제2권, 이한구 옮김, 민음사, 2001, 133-176.

Staehler, T., Hegel, Husserl and the Phenomenology of Historical Worlds,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Inc., 2017.

Stern, R., The Routledge Guidebook to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New York: Routledge, 2013.

Stewart, The Unity of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A Systematic Interpretati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2000.

Winfield, R. D.,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A Critical Rethinking in Seventeen Lectures,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Inc., 2013.

Ziep, L.,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D. Smyth (tra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1. 프레이의 논문은 1970년에 처음 출판된 이후로 헤겔의 ‘전도된 세계’를 다루는 다양한 문헌에서 비교적 최근까지도 꾸준하게 인용되고 있다. 그의 논문을 인용하는 대부분의 글들은 프레이의 해설에 동의하거나(Stern, 2013: 76-77 참고), 그의 해설을 부분적으로 비판하면서도 대체로 긍정한다(Stewart, 2000: 96; Brinkmann, 2010: 139; Ziep, 2014: 82-85; Staehler, 2017: 76 참고). 그러나 본고는 프레이의 해설이 단순히 부분적으로 오류를 지닌 것이 아니라 “힘과 오성” 장을 정합적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2. 귀류적 논증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지닌다.
    p ⊃ (q · -q)
    ──────
    -p
  3. 메이비는 헤겔의 변증법이 전통적 논리학의 귀류법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정신현상학』 §79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도 한다. “헤겔은 논증의 전제가 모순으로 이끌 때, 전제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서 완전히 폐기되어야 한다는 전통적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 논증을 거부한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그러한 논증은 ‘단지 회의주의이다.’”(Maybee, 2020 참고) 지프는 변증법이 귀류법이라는 프레이의 해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전도된 세계에 대한 두 번째 부분에 있는 논증의 주된 흐름을, 프레이가 한 것처럼, 귀류법으로 특징짓는 것은 오히려 문제적으로 보일 것이다. […] 전도, (모순적) 대립으로의 이행, 그러한 대립에의 의존은 ‘자율적 부정’의 논리적 구조가 학문, 도덕성, 종교에서 경험될 수 있는 정확히 ‘외적’ 양태이다.”(Ziep, 2014: 85)
  4. 여기서 라이프니츠와 칸트 사이의 관계를 바탕으로 전도된 세계를 해설하고자 하는 프레이의 시도는 무너진다. 프레이는 칸트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Copernican revolution)’을 통해 라이프니츠를 비판하여 오성을 대상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처럼, 헤겔 역시 “힘과 오성” 장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전도된 세계를 비판하여 관념론에 도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Flay, 1970: 670-674 참고). 그러나 “힘과 오성” 장의 결론을 관념론으로 독해하는 것이 부당할 경우 “힘과 오성” 장을 라이프니츠와 칸트 사이의 관계를 바탕으로 독해하는 것 역시 부당하다. 더 나아가, 라이프니츠와 칸트를 통해 “힘과 오성” 장을 독해하고자 한 프레이의 해설을 받아들인 다른 주석가들의 입장 역시 적절하지 않다(Stewart, 2000: 96; Brinkmann, 2010: 139; Ziep, 2014: 82; Staehler, 2017: 76 참고).
  5. 지프와 윈필드에 따르면, 속성들 사이의 관계를 힘 개념을 통해 파악하고자 하는 입장은 로크, 라이프니츠, 칸트 등 이미 헤겔 이전의 근대철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Winfield, 2013: 64; Ziep, 2014: 81-82 참고). 따라서 우리는 “힘과 오성” 장의 논의가 단순히 헤겔 자신이 자의적으로 도입한 문제에 대한 논증이 아니라 근대철학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개념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6. 윈필드는 무한성, 생명, 자기의식이 “힘과 오성” 장 후반부에서 오성의 대상으로서 다루어지는 방식을 잘 해설하고 있다(Winfield, 2013: 64; 76-81쪽 참고). 아래에서 제시되는 내용은 윈필드가 “힘과 오성” 장 후반부를 주석한 내용을 상당 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7. 그러나,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정작 반증주의의 창시자인 포퍼는 헤겔의 논의가 자신의 입장을 선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였다(Popper, 2001: 133-176 참고).
  8. 적어도, 데리다 자신은 ‘탈구축의 운동’이라는 그의 개념이 “헤겔이 사유한 모든 것”을 새롭게 재구성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였다(Derrida, 2010: 72-76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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