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정리의 정리

  1. 이 글은 많은 사람들이 헛갈리는 정의definition와 정리theorem의 차이를 정리organization해보고자 쓰여졌다. 최근들어 정의와 정리를 많은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한다고 느껴졌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들이 개념의 정의를 정리하고 하면서 혹은 정리를 정의라고 하면서 가지고 와서는 정의와 정리에 대한 이해마저도 합치되지 않아 이야기가 제자리 걸음을 반복하는 일이 종종(아마도 매우 자주) 발생하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두 개념에 대한 명확clean한 정리를 가진 것은 아니므로 이번 기회에 간략하게나마 두 개념에 대해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를 적어두고자 한다. 혹시 본문에서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에 대한 여러분들의 지적 역시 환영한다. 미리 적어두자면 이 글은 수학에만 한정한 글은 아니다. 즉 개념의 의미와 성질에 대해 논하는 많은 논의들은 수학이 아니더라도 과학science 일반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과학의 성질이 으레 그렇듯이 논리에 대한 논의는 수리적 사고를 요구한다.

  2. 이러한 문제에 앞서, 정의와 정리를 논하려면 먼저 그것들이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뒤따라가다보면 모든 정의의 근본이 되는 최초의-근원적인 정의가 정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종래에는 그러한 근원적인 지점을 공리axiom라고 불렀다. 공리는 다른 별도의 증명과정 없이도 그 자체가 우리에게 직관적 참으로 다가오는 명제로서, 다른 정리들을 증명하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다. 칸트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의 선험적인 인식에 의해서만 붙잡히는 것으로, 우리의 경험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필연적 참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world 그리고 그 세계에 의해 관측되는 직관이라는 인식이 모두 같은 식으로 작동하는 것일까? 가령 수학이라는 분야는 인류가 가진 지식 체계 중에서도 가장 참과 거짓이 분명한 범주로 이해된다. 그러나 수학이라는 분야 역시도 '수'라고 하는 추상적 개념에 의해 쌓아올린 공리계이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이 수라고 말하지만, 만물의 근원이 수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참일까? 어쨌든 우리가 그것을 일단 근원적 참으로 간주한다면 그러한 참을 채택하여 만들어진 공리계에 의해 형성된 세계상world vision만이 그 시야에 의해 관측할 수 있는 직관을 인식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서로가 가진 공리계가 다르다면 서로가 가진 직관적 인식도 다를 것이므로 어떠한 직관적 참이 곧 필연적 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피타고라스의 정리theorem 마저도 수학이라는 일정한 공리계 위에서만이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3.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코 회의주의로 환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거짓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중에서도 어떠한 참이 더욱 분명한 참임을 의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 공리axiom는 정리의 일종으로 이해된다. 직관에 의해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인식되는 명제가 기본 전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각자의 명제와 정리들이 또다른 정리의 공리가 되는 식으로, 참이라고 간주되는 명제들이 서로 균형cosmos을 이루면서 각자를 지탱한다. 1+1=2라는 명제는 수학이라는 공리계 안에서는 참이다. 그것이 불변의 법칙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참으로 간주해야만 그 다음의 논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참으로 간주하는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학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진 논리체계 안에서 발상하는 어떠한 증명은 무수한 약속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1+1은 정의보다는 정리일 것이다. 이 식은 1+1 자체가 무엇이냐는 함축에 대한 것이 아니라 1이라고 정의된 그것이 +라고 정의된 활동을 했을 때에 2라는 결과가 도출된다는 과정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개념에 대한 정의는 어떤 공리계를 채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양상을 도출할 수 있다. 그러나 정리는 일정한 공리계 안에서 그 안의 약속들에 의거하여 이루어진 증명이기 때문에 사람들 간에 달리 정리될 수 없다. 이것이 실험과학에서 말하는 재현가능성일 것이다. 같은 조건에서 같은 과정에 의해 실험을 진행했다면 같은 결과가 도출되어야 한다. 즉 증명은 재현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4. 정리가 과정에 대한 증명이라면 정의는 그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에 대한 질문의 답이라고 하면 될까. 중요한 점은 그 답이 규정적으로 명확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의는 흔히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정리하는 작업으로 이해된다. 쉬운 말로 풀이하면 필요조건은 '이 정도는 필요하다'라고 제시되는 필수 요건이며, 충분조건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주어지는 부가 요건이다.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동일한 양상으로 만족되는 필요충분조건이야말로 그 개념의 정의와 같다. 이를 기호로 표현하면 iff인데, 이는 if and only if(만약 그렇다면, 그리고 유일하게 그러할 경우에만)의 약자로서, '만약 p이면 q라면,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만 p가 q라면, p와 q는 동치이다.' 즉 완전히 같다는 것을 함축한다. 개념의 정의는 이러한 경우에만 그것이 하나의 정의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어떤 개념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그 개념이라고 의미의 범주를 규정짓는 일이 바로 무엇인가를 정의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원의 정의가 '어떤 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어떤 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은 원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어떠한 개념이 그것이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원 이외의 다른 것들을 지칭할 수 있기 때문이다. p의 정의가 q라면 p는 유일하게 q만을 지칭해야 한다. 그리고 q를 보고 유일하게 p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5. 그런데 사람들이 언어를 이해하는 양상은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개념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A가 p를 q라고 생각하고 B가 p를 q'라고 생각한다고 할 때, 둘이 이해하는 p의 의미는 엄밀하게는 다르지만 둘이 엄밀성을 추구하는 학술적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실질적으로는 대화하는 데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치킨chicken은 닭을 의미하지만 닭 요리에 대한 함의로서 쓰이기도 한다. 닭과 닭 요리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으로 우리는 문맥에 따라 이 둘을 구분하여 치킨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언어의 화용론적 측면을 더욱 주시하고자 한다면, 개념에 대한 정의는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아도 된다. 이를 논리학에서는 실질함축과 엄밀함축이라는 용어로 부르는 것 같다. 엄밀함축은 개념이 엄밀하게 어떻게 정의되느냐이고, 실질함축은 개념의 엄밀한 정의와는 별개로 사용적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실질적으로 갖고 있는가를 뜻한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치킨은 닭에 대한 엄밀함축이고 닭 요리에 대한 실질함축이다. 나는 적어도 우리가 학술적 대화를 하고자 한다면 그 대화에서 사용하는 핵심적인 어휘는 엄밀함축에 의거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금 다른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개념의 실질함축 현상 자체를 다루는 논의에서일 것이다. 이를테면 chicken이라는 단어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와서 어떻게 오늘날의 치킨으로 그 의미가 변해왔는지를 탐구하는 연구가 그것이다. 그러한 논의에서도 엄밀하게 규정해야 하는 용어들은 있기 마련이다.

  6. 시선을 조금 밖으로 환기해보자면, 개념의 정의를 규정짓는 것에 대한 윤리적 이야기 역시 회피할 수 없다. 이를테면 종래에 사랑은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애틋한 감정 정도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성애규범적인 정의로서, 이성애를 제외한 다른 성지향성을 배제하여 사랑으로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여러 윤리적 문제들을 야기한다. 즉 우리는 정의definition를 어떻게 정의define하는 것이 가장 정의justice로운가 하는 문제에 답변해야 한다. 그래서 철학의 자식들이 논의를 거듭하며 개별 학문으로 독립하는 유구의 과정 속에서도 논리학과 윤리학 만큼은 철학과 함께 동거하는 것일지 모른다.

  7. (추가) 내용에 몇가지 문제가 발견되어 이에 대해 명시하려고 한다. 글의 본문을 수정하기보다는 새롭게 첨언을 덧대는 식으로 추가하려고 한다. 먼저 1) "공리가 정리의 일종"이라는 표현에 대해, "다양한 공리계 중에서 어떤 공리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거기서 도출할 수 있는 정리가 달라진다고 표현하는 게 올바를 것 같"다는 지적이 있었다. 공리는 증명 없이 참으로 받아들이는 명제들이고, 정리는 정의와 공리로부터 도출되는 결론들이라는 점에서 두 개념은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2) 어떠한 개념에 대한 설명이 정의(ex: 선은 폭이 없는 길이이다.)라면 어떠한 개념에 대해 우리가 별도의 증명 없이 참으로 받아들이는 사실(ex: 서로 다른 두 점이 주어졌을 때, 그 두 점을 잇는 직선을 그을 수 있다.)이 공리이기에 정의와 공리의 개념은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었었다. 추가로 3) 실질함축과 엄밀함축의 구분은 화용론과는 크게 관련이 없으며 단지 정의의 차이 문제일 뿐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실질함축이 "p이면 q이다."라면 엄밀함축은 "필연적으로 p이면 q이다."라는 것이다. 덧붙여 실질함축을 받아들일 경우, 전건이 거짓인 상황에서 후건에 관계없이 전체 조건문이 참이 되거나 후건이 참인 상황에서 전체 조건문이 전건과 무관하게 참이 되는 것이 일종의 '실질함축의 역설'이라고 받아들여지는데, 이 때문에 이 문제를 '화용론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진리함수의 특성 때문에 발생하는 역설이기에 화용론적이냐 아니냐로 구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지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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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자체에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다만, 몇 가지 표현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가령,

(1)

따라서 오늘날에 공리axiom는 정리의 일종으로 이해된다. 직관에 의해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인식되는 명제가 기본 전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각자의 명제와 정리들이 또다른 정리의 공리가 되는 식으로, 참이라고 간주되는 명제들이 서로 균형cosmos을 이루면서 각자를 지탱한다.

"공리가 정리의 일종"이라기보다는, 다양한 공리계 중에서 어떤 공리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거기서 도출할 수 있는 정리가 달라진다고 표현하는 게 올바를 것 같습니다. '공리'는 증명 없이 참으로 받아들이는 명제들이고, '정리'는 정의와 공리로부터 도출되는 결론들이라는 점에서, 두 개념은 구분되어야 하니까요.

(2)

또 2.에서 '정의'라는 개념과 '공리'라는 개념이 다소 혼동되고 있는 것 같아서 아쉬운데, 가령,

'선'은 폭이 없는 길이이다

처럼 '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선의 정의라면,

서로 다른 두 점이 주어졌을 때, 그 두 점을 잇는 직선을 그을 수 있다.

처럼 선에 대해서 우리가 별도의 증명 없이 참으로 받아들이는 사실이 공리라, 둘이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3)

이를 논리학에서는 실질함축과 엄밀함축이라는 용어로 부르는 것 같다. 엄밀함축은 개념이 엄밀하게 어떻게 정의되느냐이고, 실질함축은 개념의 엄밀한 정의와는 별개로 사용적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실질적으로 갖고 있는가를 뜻한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는데,

실질함축과 엄밀함축의 구분에 대한 설명이 다소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둘 모두 화용론과는 큰 관련이 없는 논의이고, 단지 정의의 차이 문제일 텐데요. 실질함축은 'p⊃q'이고 엄밀함축은 '∼◇(p·∼q)'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말하자면, 전자는 "p이면 q이다."인 반면, 후자는 "(p이고 ~q)는 가능하지 않다." 혹은 "필연적으로 (p이면 q이다.)"인 거죠.

아마 이런 구분이 '실질함축의 역설'이라고 일컬어지는 문제와 관련 있다는 점 때문에 전자를 '화용론적'이라고 보신 것 같네요. 실질함축을 받아들일 경우, 전건이 거짓인 상황에서 전체 조건문이 (후건과 관계 없이) 참이되거나, 후건이 참인 상황에서 전체 조건문이 (전건과 관계 없이) 참이 되는 게 일종의 '역설'이라는 거거든요. 일상적 대화 속에서는 이런 역설이, "니가 대통령이면, 나는 교황이다!" 같은 조건문의 형태로 등장하기도 하죠. 그렇지만 이건 일상적 문맥의 언어사용과 관련이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진리함수의 특성 때문에 발생하는 역설이라, '화용론적'이냐 아니냐로 구분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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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감사합니다. 제가 철학 전공자가 아니라 이런 부분에서는 약한 것 같습니다. 조만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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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하신 부분을 압축하여 7번 항목으로 편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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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선생님. 댓글 잘 읽었습니다. 내용상의 오류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포함해서 저도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공부하며 고쳐나가겠습니다. 제가 혹여나 이상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적받고자 철학 커뮤니티에 올린 것이고, 배움이 깊으신 분들의 말씀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별개로 선생님의 댓글이 다소 격앙되어 있으신 것으로 보여 일부러 시간차를 두고 댓글을 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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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논리학을 세부전공으로 공부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논리학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다소 주제 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는 keyahn님의 글이 말하려고 하는 전체 논지는 크게 잘못된 부분이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해하기로, keyahn님이 적으신 내용을 좀 더 적절한 언어로 재구성하면,

(1) 우리의 사고는 비추론적 전제(noninferential premise)와 추론적 결론(inferential consequence)으로 구분될 수 있다.
(2) 비추론적 전제에 대해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근본적인 불일치가 있을 수 있다.
(3) 무엇을 비추론적인 전제로 받아들일 것인지는 가치 판단의 문제이다.
(4) 비추론적 전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상황에서야 '증명'이라는 활동이 가능할 수 있다.

라고 요약될 수 있다고 봐요. 그리고 제 관점에서는, 이 네 가지 논제들이 철학적으로 크게 결함이 있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miserere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keyahn님이 '정의', '공리', '정리', '필요충분조건' 같은 용어 사용에서 다소 오류를 많이 범하셨다고는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제 개인적 의견으로는, keyahn님이 주장하시려는 내용은 논리학보다 인식론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내용이다 보니, 문제 영역 자체가 약간 엇나가 있다는 인상도 받습니다.

그렇지만 (1)-(4)라는 논지대로라면, 글의 형식은 다소 수정되어야 한다고 해도, 글의 내용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지 않은가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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