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읽을땐 정신현상학 입문서에 들어갈만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대학원에서 철학을, 특히나 대륙철학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술술 쉽게 읽어냈을까? 싶다. 답을 맞추긴 쉬우나, 내가 이 지문을 처음 읽는 수능생이라면 난해할것같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것같다. ‘종합’, ‘절대정신’, ‘직관.표상.사유’’ ‘범주’ 등이 특히 그럴것 같다. 만약 이 문제가 ‘오답률과 관계없이’ 수험생들에게 잘 읽히는 지문이었다면, 한국 수험생의 지성이 정말 굉장히 뛰어난것은 사실이 아닐까…
그리고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점은, 아무리 세부영역별로 배치되는 문항번호가 정해져있지만, 헤겔을 4번에 배치하는것은 수능시험시작하자마자 애들 힘빼려는거 아닌가 싶다..
짧게나마 제 공부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헤겔은 이해하기 위해 이런저런 사전 배경 이해가 많이 필요한 철학자라 생각하기 때문에, 수능 지문으로 내기에는 별로 적절하지 않은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맥락을 다 사상한 채 보면 뜬구름 잡는 헛소리를 하는 철학자라 생각하기 딱 좋죠.
PS. 첫머리에 헤겔 전공자들이 싫어하는 "정반합" 도식이 나왔네요. 제 마음속에선 아웃입니다.
강력하게 동감합니다.
이 글을 쓰고나서 헤겔철학의, 동시에 저 수능지문에서 핵심역할을 하는 ‘이념’개념에 대해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헤겔의 이념 개념은 지문에서 알려주는 ‘세계의 근원적 질서~’라는 설명으로 충분히 이해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애초에 수험생에게 헤겔의 이념개념을 완벽히 이해하라고 출제한것은 아니지만, 수험생 입장에선 너무나 찝찝한 상태에서 시험을 치뤄야만 하는것 같습니다. 예를들어 그래서 이념이 뭐야? 절대정신이 뭔데?? 근원적 질서가 뭔데???…
덧붙여 ‘이념’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 ‘좌 대 우’, ‘진보 대 보수’ 같은 현실정치를 묘사하는데 쓰이는 단어로 전락한 마당에, 이념을 핵심으로 하는 철학을 수험생에게 제시하는 것이 올바른지도 모르겠습니다. 헤겔의 이념과 한국의 이념은 너무나 다른 단어같습니다
두 분이 하신 말씀에 동의가 많이 되네요. 기계적으로 지문을 읽어내서 답을 찾는 과정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야 있겠지만, 굳이 헤겔처럼 철학계 내에서조차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에 대해 논란이 많은 학자를 수능 지문으로 출제한 건 그다지 좋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저 지문만으로는 '변증법'이나 '절대정신' 따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전혀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는데, (심지어는 정립-반정립-종합 같은 잘못된 설명이 들어가 있기까지 한데,) 저런 막연한 글에서 내용 이해 없이 글의 뼈대만 훑어서 답을 추려내는 능력이라는 게 과연 언어 능력으로서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네요.
예전 글이지만 언급돼있어서 댓글 달아봅니다. 일단 글쓰기가 명료성은 포기한 글 같네요. 절대 잘 써진 글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 (명료하지 않지만 잘 써진 글은 있을 수 있습니다. 깊이가 있다면 말이죠 (물론 그런 글이 수능에 적합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후술하듯이, 이 글은 깊이를 떠나서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문제들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으니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내용에 대해서 얘기해볼게요. 제가 보기에 정반합 도식이란 게 크게 틀리진 않습니다. 왜냐면 "정반합 도식"이라는 건 이렇다할 의미도 갖고 있지 않고 해석하기 나름이기 때문이지요. 다만, 정반합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존재는 정, 무는 반, 그리고 생성은 합이다 (실제로 이는 저희 학교 교수님 중 한 분, 심지어 (헤겔 전공은 아니지만) 독일 철학과 깊게 맞닿아있으신 분이 이렇게 생각하시더군요). 하지만 제가 이해하기로는 정은 존재가 무와 다르다는 것, 반은 존재가 무라는 것, 그리고 합은 존재가 무와 같으면서 다르다는 모순을 해소한 결과로 이해가 돼야합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이 수능 지문 역시 틀린 의미로 정반합을 해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존재가 정, 무가 반, 생성 혹은 실존이 합이라고 해봅시다. 하지만 이 지문에 의하면 정과 반 둘 다 범주입니다:
변증법은 ... 대립적인 두 범주가 조화로운 통일을 이루어가는 수립적 상향성을 구조적 특징으로 한다
그렇다면 이 지문이 말하는 것은 무가 범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헤겔에게 무는 범주가 아닙니다.
제 총평은: "명료하지도 않고, 깊이도 없으며, 내용적으로도 틀린 부분이 많다" 입니다. 그러니깐
이거보다 훨씬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헤겔이 나오더라도 충분히 명료하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수능 문제는 대학 교수들이 내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닌가봐요? 아니면 비철학과 교수가 냈던지요.
교수와 교사들이 합심하여 문제를 냅니다. 철학과 교수가 냈지만 헤겔에 빠삭하지 않은 사람이 냈다고 봅니다. 이 지문은 문제가 많지만, 제가 알기론 크게 문제가 되는 철학 지문은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수능 문제(특히 국어와 수학)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사고력을 굉장히 요구하도록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