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도덕 및 정치 철학에서의 완전주의 (1)

원문 정보: Perfectionism in Moral and Political Philosophy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원문이 좀 길어서 풀 번역은 못했고, 나머지 부분도 시간이 나면 번역하여 올리겠습니다~


도덕 및 정치 철학에서의 완전주의

완전주의는 현대 도덕 및 정치 철학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획득했다. 이 용어는 좋은 인간 삶에 대한 논의, 인간의 복지(well-being)에 대한 논의, 도덕 이론, 그리고 정치에 대한 접근법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역사적으로, 완전주의는 인간 본성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좋음(human good)을 특징짓는 윤리 이론과 연관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스피노자, 마르크스, T.H. 그린과 같이 다양한 저술가들이 이런 의미에서 완전주의자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완전주의 저술가들은 좋음에 대한 객관적인 논의를 제시하고, 다음으로 그 좋음에 관한 논의에 기초한 윤리학 그리고/또는 정치학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킨다. 서로 다른 완전주의 저술가들은 좋음에 대한 서로 다른 논의를 제안하고, 서로 다른 윤리적, 정치적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모든 완전주의자는, 그것들이 인간에 의해 욕망되거나 즐겨진다는 사실 덕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 사태, 활동, 및/또는 관계를 식별한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인 선에 대한 논의를 옹호한다.

1. 완전주의와 가치 이론

가장 먼저 말할 것은, 좋음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이 인간의 좋음을 참조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연 세계의 특정 측면이 가치가 있으며, 어떤 인간도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가치를 지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예술과 과학에서의 위대한 성취가 그것들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모든 영향을 떠나서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다. 이러한 종류의 판단을 긍정하는 완전주의적 견해가 *비인간주의적 완전주의(nonhumanistic perfectionism)*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의 예다. 대조적으로, 인간의 좋음에 대한 완전주의적 설명은 인간에게 가치 있는 삶에 기여하는 좋음을 식별하고자 하는 논의이다.

인간에게 좋은 삶은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하게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 번째 이해에 따르면, 그러한 삶은 복지의 관점에서 해석된다. 인간에게 최선의 삶이란 삶을 이끄는 사람에게 최고로 잘 풀리는 삶이다. 두 번째 이해에 따르면, 인간을 위한 좋은 삶은 탁월성 또는 성공의 관점에서 해석된다. 탁월한 인간의 삶은 복지의 관점에서 최선인 삶일 수 있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탁월한 인간의 삶은 타인이나 좋음을 위해 자신의 복지를 희생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탁월한 인간의 삶이라는 개념은 복지가 높은 삶이라는 개념보다 더 넓다. 그리고 그것이 더 넓은 개념이므로, 완전주의에 관한 전반적인 묘사는 복지보다 탁월함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이해된 완전주의는 인간의 좋음에 관한 쾌락주의 및 욕구 충족 논의 모두와 대조된다. X가 대상, 활동 또는 관계를 지칭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만약 X가 좋음이라면, 완전주의자가 보기에, 그것은 그것이 인간에 의해 욕구되거나, 적절한 조건 하에서 욕구될 것이라는 사실 덕분에 좋은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X가 좋음이라면, 완전주의자가 보기에, X는 반드시 즐거운 정신 상태이거나 즐거운 정신 상태와 인과적으로 관련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물론, 인간의 좋음에 대한 완전주의적 설명은 일부 좋음이 [특정한 감정·신체적 느낌과 관련된] 경험적인 것일 수도 있음을 허용하지만, 모든 본질적인 인간의 선이 즐거운 감각이나 태도로 구성된다는 쾌락주의적 명제는 거부한다.

1.1 완전주의의 두 가지 버전

비인간주의적 완전주의를 제쳐두고, 완전주의적 좋음은 탁월한 인간 삶의 구성 요소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역사적으로 완전주의자들은 이러한 좋음들을 인간 본성의 발달과 관련시켰다. 예를 들어, 합리성의 발달은 대개 그것이 인간 본성에 본질적인 능력이기 때문에 완전주의적 좋음으로 여겨졌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많은 현대 저술가들이 이러한 노선을 따라 인간의 좋음에 대한 설명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해왔다 (Hurka 1993, Foot 2003). 우리는 완전주의적 좋음을 인간 본성의 발달과 관련시키는 인간의 좋음에 관한 논의들을 전반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인간 본성 완전주의(human nature perfectionism)*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저술가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어떤 참조도 없이 완전주의를 특징지어왔다. 존 롤즈는 완전주의가 “예술, 과학, 그리고 문화에서의 인간 탁월성의 최대 달성”을 요구한다고 특징짓는다 (Rawls 1971, 325). 데릭 파핏은 완전주의를 “삶에 있어서 최상의 것들”의 성취 또는 실현의 관점에서 특징짓는다 (Parfit 1986, 162). 여기서는 객관적인 좋음의 존재가 강조되지, 그것들과 인간 본성의 발달과의 관계가 강조되지 않는다. 유사하게, 다른 저술가들은 완전주의를 구체적으로 명시된 객관적 좋음 목록의 실현과 동일시해왔다 (Finnis 1980, Griffin 1986, Arneson 2000). 우리는 완전주의적 좋음을 인간 본성의 발달과 관련시키지 않고, 완전주의적 좋음을 식별하는 인간 좋음에 관한 설명들을 전반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객관적 좋음 완전주의(objective goods perfectionism)*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두 가지 유형의 완전주의 모두 만만치 않은 도전에 직면한다. 인간 본성 완전주의의 지지자들은 인간 본성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제시해야 한다. 더 정확하게, 그들은 인간 본성에 중심적인 속성들과, 왜 특정 활동과 상태가 인간에게 좋은지를 설명하는 속성들의 발달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을 제공해야 한다 (Hurka 1993). 그럴듯한 결과를 낳으면서도 정말로 설명력을 가지는 어떤 인간 본성에 관한 설명이 있는지 여부는 의심받을 수 있다 (Dorsey 2010). 대조적으로, 객관적 좋음 완전주의의 지지자들은, 객관적 좋음의 식별을 인간 본성의 발달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해방시켰기에, 왜 다른 것들이 아닌 일부 것들이 좋음으로 간주되는지 설명해야 한다. 객관적 좋음 완전주의자들이 이러한 좋음들에 관한 완전한 목록을 공식화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그러한 시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주장된 좋음을 추구할 가치가 있는 객관적인 좋음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할 말이 있어야 한다 (Sumner 1996, Sher 1997).

1.2 완전주의와 다원주의

인간 본성 완전주의와 객관적 좋음 완전주의 사이의 구별은 우리가 가치 이론의 중요한 질문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완전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최선인 삶의 형태가 단 하나뿐이라고 주장하는 일원론자여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은 인간에게 동등하게 좋은 삶의 형태들이 다원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한 인간에게 최선인 삶이 다른 인간에게 최선인 삶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그럴듯하기에, 이 물음은 중요하다.

인간 본성 완전주의는 인간의 선을 인간 본성의 발달과 동일시한다. 이것은 일원론적인 이상, 즉 모든 인간에게 최선인 단일한 삶의 형태를 식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인간 본성 완전주의의 이상은 많은 쟁점들을 열어둔다. 한 인간에게 최선인 삶이 그의 본성의 발달을 극대화하는 삶이라고 규정하자. 그렇다면 다른 인간들에게는 다른 활동과 추구가 그들의 좋음을 가장 잘 증진한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일 수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은 인간 본성의 다른 측면들을 가장 잘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질과 재능을 고려할 때, 어떤 사람들은 예술적 추구에 집중하는 것이 좋은 반면, 다른 사람들은 이론적인 연구나 운동 성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다. 더욱이, 동일한 유형의 완전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은 사람들조차도, 일부 활동과 목표가 다른 사람들보다 그들에게 이 목적을 더 잘 수행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완전성과 다른 사람들의 완전성 사이의 다른 절충안들을 합리적으로 가질 수도 있으며, 이것 또한 완전주의적 이상과 일치하는 삶의 양식의 다원성과 다양성에 기여할 것이다.

객관적 좋음 완전주의와 가치 다원주의의 양립 가능성 또한 확립될 수 있다. 일부 완전주의적 좋음이 가치의 측면에서 거의 동등하거나 비교 불가능하다고 가정하기만 하면 된다 (Finnis 1980, Raz 1986). 예를 들어, 우정과 이해는 둘 다 완전주의적 좋음일 수 있지만, 그것들은 이러한 좋음들을 다른 정도로 실현하는 삶의 순위를 매길 수 있는 방식으로 비교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더 일반적으로, 완전주의적 좋음들은 다른 비율로 결합될 수 있고, 이에 따라 가치 있고 추구할 만한 다양한 유형의 삶의 범위가 생긴다. “완전한”이라는 형용사가 인간 삶에 적용될 때, 그것은 최대로 좋거나 탁월한 삶을 시사하지만, 만약 좋음들이 충돌하고 비교 불가능하거나, 또는 좋음들의 조합이 동등하거나 비교 불가능한 가치를 가진다면, 다른 유형의 삶의 복수성은 그 명칭[즉, 객관적으로 좋거나 탁월한 삶]을 취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또는 아마도 어떤 삶도 엄격하게 완전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삶이 매우 좋을 수는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한 어떤 것도 인간에게 최대로 최선인 삶의 방식이 정말로 단 하나뿐일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강조된 요점은 단지 완전주의가 가치 다원주의와 양립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많은 최근의 저술가들이 주장하듯이 만약 객관적인 좋음이 다원적이고 비교 불가능하다면, 가치의 본질에 대한 이 사실이 인간 본성 또는 객관적 좋음의 다양성 중 어느 하나의 완전주의의 그럴듯함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분명히 그럴듯한 완전주의는 다원주의에 한계가 있음을 인식할 것이다. 완전주의적 가치 이론은 인간이 보존하고, 증진하며, 관여해야 할 좋음과 활동을 식별하고자 한다. 이는 일부 삶의 방식이 충분히 수용되더라도 인간에게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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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perfection을 '완벽성'이 아닌 '완전성'으로 번역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통용되는 국역인지도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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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용되는 번역어가 있는 것 같진 않더라구요. 저는 "Perfectionism"을 "완벽주의"라고 번역하면, 의도치 않은 혼란을 줄 것 같아서 "완전주의"라고 번역했습니다. 저는 "완벽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내가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역량 따위를 완벽히 갖추겠다!'와 같은 일종의 마음가짐(혹은 태도나 성향?)이 자연스레 떠오르거든요. 근데 이게 Perfectionism 논의의 핵심은 아닌 것 같아요. 이에 따라 "완벽성"이 아니라 "완전성"으로 옮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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