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인은 'what' , 'there is', 'is', 'thing', 'everything' 같은, 비존재나 없음 (nonbeing)에 관한 논의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을, 존재론적 함의를 갖도록 하여 철학적 용어를 탈취했다. 그러나 허구적 대상에 관한 'What is...?' 문장이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존재하지 않는 무엇 d가 예컨대 마이농의 둥근 사각형일 때, "d는 비존재한다."에서 "d는 존재한다."가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 무엇임 (whatness)과 사물성 (thinghood)이 존재하거나 존재성을 가졌다는 부당한 제한 때문에 퍼즐이 생긴 듯하다.
우리가 증감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선택해서) 말하는 것, 우리 이론이 이러저러하게 우리를 구속 (우리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즉 오컴의 면도날이나 이것에 대한 콰인의 사용은 존재하는 것과 우리가 (택해서) 말하는 것 또는 우리 (이론)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혼동한다. 관념이 그것들이 나타내는 대상과 다르다는 것에 대한 자세한 논증은 마이농에 의해 제시되었다.
- 관념은 그 본질상 무엇 (어떤 대상)에 대한 것이다.
- 관념은 발생할 때 존재한다. ([2]에서 거부되는 이 전제는 없어도 된다.)
- 관념이 그것의 대상과 동일하다면, 누군가가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모든 대상이 존재할 것이다.
- 그러나 결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 있다. (e. g. 영구 기관, 페가수스)
- 따라서 관념은 그 대상과 동일하지 않다.
콰인의 핵심 메시지: "문법적 관점에서 고유명사인 일부 유의미한 단어...는 무엇도 명명하지 않는다". => 양화사를 존재론적으로 부담 있는 것으로 제한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좋은 이유들이 있다. d에 존재성을 할당할 필요가 없으므로, 경험주의 같은 referential position에서 등장한 거짓 이분법도 제거될 수 있다.
단, Noneist 입장을 Wyman의 입장과 혼동하지 말 것: 비존재가 실현되지 않은 가능태로서 또는 다른 식으로 존재한다고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가능태 (possibilia)나 추상처럼 존재하지 않는 항목들을 포함한 존재론에 개입하지 않는데, 그러한 각각의 x에 대해 x is not이 참이기 때문이다.
- 논리적으로 비존재는 존재론적으로 포함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noneist의 입장은 이러한 비존재적 항목에 대한 존재론적 개입을 회피한다.
- 'is'가 자동사로 기능하는 한, 'x is'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지적하듯 'x exists'를 의미한다.
- 마이농의 대상 이론도 불가능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지만 독특한 속성을 지닌다고 보므로 Wyman과 다르다.
콰인의 스콜라적인 반론이 문제를 제기한다고 널리 간주되지만,
- 그의 주요 문제 제기의 근거는 "동일성 개념이 실현되지 않은 가능태에 단순히 적용될 수 없다"는 근거 없는 가정에서 찾을 수 있다.
존재[자]에 적용되는 동일성 - 가장 중요하게는 외연적 동일성 - 과 구별성의 개념들이 비존재에도 적용된다. 엄밀하게, 비존재에 대해 고전적으로 참인 것은 채택된 이름과 기술 이론에 따라 다르다.
Linsky가 언급한 현재의 프랑스 왕-현재의 중국 왕 동일성 문제처럼, 비존재 대상의 동일성과 구별에 관한 의문은 일상적, 기술적 담론에서 충분한 기준으로 처리될 수 있다. 결국 noneism은 오컴의 면도날과 콰인의 제한적 양화사 사용에서 일어나는 "실제 존재하는 것"과 "우리가 (택해서) 말하거나 이론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에의 동일시에서 오는 혼동을 피한다.
마이농의 이론에는 '존재론적 인구 폭발'이 존재하지 않는다. 최소한 대상의 동일성 조건은 명확하다.
- 기존의 동일성 원칙이나 러셀의 기술 이론으로 답할 수 있다.
- Linsky의 동일성 문제는 프랑스 왕과 중국 왕의 외연적 차이로 인해 불발한다.
비슷함 (likeness)과 유사성 (similarity)에 대해서도 두 항목이 충분히 많은 외연적 속성을 공유할 때 비존재 역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특정 속성을 가진 대상이 몇 개 있는지 묻는 질문은, 그 대상의 실제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열린 문간과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임의의 뚱뚱한 사람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고전적 정통 입장의 대답과 정확히 일치한다. 어떤 종류든 간에 비존재자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실제 문간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콰인의 질문들이 비존재 대상을 다루는 이론에 특히 심각한 어려움을 준다고 여겨진 많은 이유 중 하나는, 실질적 [de re] 양태가 명제적 [de dicto] 양태와 혼동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 전자: 사실적 상황에서의 있음 관계
- 후자: 어떤 가능세계에서의 있음 관계
여러 흥미로운 지점들
(1) 그 실제 문간에 단지 가능한 (비실재의) 사람이 몇 명 있는가?
(2) 그 문간에 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몇 명인가?
(3) 그 문간에 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최대 몇 명인가?
(2)는:
(2a) 어떤 수의 사람 n에 대해, 그 n명의 사람들이 함께 그 문에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 참인가? Of what numbers n of men is it true that for those n men it is possible that they are in that doorway (together)?
(2b) 어떤 수의 사람에 대해, 그 사람들이 그 문에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 참인가? Of what number of men is it true that it is possible that those men are in that doorway?
(3)에 대한 대답은 (2)의 상한을 설정한다. 그리고 (2b)에 대한 답은: "0과 상한 사이의 모든 수"이다. 따라서 (2)에 대한 최선의 답은: "불확정적이지만, 그 불확정성은 상한에 의해 제한된다."
'가능한 뚱뚱한 사람'이라는 표현에는 '가능한'이 설명에 포함되는지, 아니면 결과적 의미로 간주되는지에 따라 모호성이 있다.
- 후자의 해석을 따를 때, 파슨스에 의하면 그 문간에는 무한히 많은 가능한 뚱뚱한 사람들이 있다.
어떠한 (비존재) 대상에 대한 이론이라도 그 문간에 서 있는 매우 많은 가능자 (possibilia)를 생성할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존재하는 것과 단지 가능한 것 사이에 새로운 외연적 관계를 확립하거나 존재론적 논증을 보증하지 않는다.
우리가 문간에 있는 뚱뚱한 사람들을 묘사하는 서로 모순된 다양한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유사한 답변을 할 수 있다.
- 어떤 특징화 상정 (postulate of characterization)도 적용되지 않는다: 이야기로는 현실 세계에서 실제 장소에 서 있는 것이 무엇인지와 같은 특성을 직접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 이에, 콰인의 "몇 명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레셔 (Rescher)의 답변, 즉 "서술된 만큼 있다"는 대답은 부적절하다.
존재자와 비존재자 간의 차이는 특히 경험주의자와 관념론자에 의해 과장되어 왔다.
… 나는 우리가 존재자의 빈민가를 없애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거되어야 할 것은 존재자와 비존재자의 견고한 거처를 빈민가로 축소시킨 고전 논리 체계이다.
추가 지점들:
- 비존재자의 경우에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많은 문제들이 존재자의 경우, 특히 자연적 대상의 경우에서도 발생한다.
- 이때 이중적인 기준이 적용되고 있다.
- 정확한 경계에 대한 질문은 자연적 존재자에게 매우 흔하다.
결국 존재자에 대한 일반적 철학적 패러다임과 그로부터 도출된 우주에의 관점은 상당한 수정 내지 대체가 필요하다.
- 존재자의 패러다임은 자주 명확한 경계와 확정적인 수적 속성을 지닌 인공물이었다.
- 이는 속성 같은 것을 배제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졌으나, 너무 엄격하게 적용되면 많은 자연적 대상들을 존재자로 간주하지 못하게 한다.
왜 동일성 문제가 비존재자에게 훨씬 더 심각한 것으로 간주되어, 존재자보다 훨씬 더 문제적으로 여겨졌는가? 대상 이론의 서로 다른 측면들이 이러한 서로 다른 근원을 다루는 데 적절히 적용될 수 있다.
Noneist는 과하게 빈약한 담론을 선호하지 않는 동시에, 콰인처럼 추상적 대상을 초한적 다수성 (transfinite multiplicity)으로 현실 영역에 배치할 설득적 근거를 찾지 못한다.
Noneist의 논제는 McX와 반대로 속성, 관계, 집합, 수, 함수, 명제 등과 같은 존재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콰인의 주요 전략은 속박 변항 사용의 기준을 통해 우리에게 존재론적 개입의 기준을 강요하려는 것이다.
"어떤 존재론적 전제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은, 그 전제가 우리의 변항들이 범위로 삼는 존재자들 중 하나로 간주되어야만 우리의 주장 중 하나가 참이 될 수 있는 경우에만 해당한다" (p. 13, 강조 추가).
그러나 이것이 존재론적 개입이 발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며, 또한 비존재적 양화가 반드시 존재론적 개입을 동반할 필요는 없다. 특정한 것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은 특정한 것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존재론적으로 개입된다.
콰인의 추가 논증(12-13쪽)은 이름과 기술(descriptions)의 제거 가능성이 이름과 기술이 "존재론적 문제에 완전히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존재한다'는 지칭적으로 투명한 술어이므로 이 논증은 무효하다.
- 결론: 우리가 존재론적 개입에 연루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속박 변항이라는 콰인의 주장은 거짓이다.
양화사와 속박 변항의 사용이 항상 우리를 존재론적 개입에 연루시키는 것도 아니다. 참이 아닌 것은 "과학 언어의 기본 구조가 이처럼 엄격히 통제된 형태이다"라는 주장이다.
처음부터 잘못된 기준이 콰인의 존재론 및 존재론적 문제에 대한 논의 전반에 스며들어 이를 수용할 수 없게 만든다: 이는 개념적 틀의 존재론적 개입과 보편자 문제에 대해 콰인이 말한 내용에도 해당한다.
"존재론은 사람이 모든 경험, 심지어 가장 평범한 경험까지 해석하는 개념적 틀의 기초이다. 특정 개념적 틀 내에서 판단될 때, 존재론적 진술은 별도의 정당화 없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된다" (p. 10).
Noneist 개념 틀이나 이론은 분명 존재로 할당되지 않는다. 또한, 존재 여부가 알려지지 않았거나 열려 있는 항목들도 포함할 수 있다.
- 심지어 콰인의 관점에서도 양화가 배제되는 한 이러한 상황이 가능하다.
따라서 존재론은 별로 근본적이지 않고, 전체적 개념적 틀의 고정이 존재론을 결정하지 않는다.
콰인은 개념적 틀의 상대성과, 그와 자동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간주되는 존재론을 이용하여 McX와 같은 보편자에 관한 입장을 제거하려 한다.
- 놀라운 것은 'is red'나 'is brittle' 같은 술어들이 의미는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콰인의 주장이다.
- 동의어 관계로만 설명하려 함으로써 속성 추상화를 통해 이런 술어들의 의미를 회복할 가능성을 간과한다.
콰인은 수학과 물리학의 보편자에는 긍정적 태도를 취하며, 고차 신화가 유용하고 경제적이며 목표 충족적이라고 말했다.
- 이는 진리의 문제를 도외시한다; 여러 본질적 문제를 간과한다.
콰인은 자신의 개념으로 McX와 날씨, 정치, 언어 등의 주제로 성공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제한적 개념을 보면 이는 지지되기 어려운 듯하다.
- 그는 최소한의 논리적 구도로 날것의 경험을 간단하게 배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보지만, 실제로는 경험적-실용적 관점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진리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 순수 경험뿐만 아니라 다양한 요소들이 올바르게 설명되어야 하며, 해당 설명이 고전적 논리의 구속을 강제하는지 여부도 중요하다.
이후 콰인의 사상은 과학을 중심으로 물리주의적 존재론으로 전환되었다.
- 형이상학적 차원에서의 '무엇이 존재하는가?' 문제를 사소하거나 이론 상대적으로 본다.
- 상대주의적, 축소주의적 성향을 강조하여 이전의 입장 일부가 폐기/수정되었다.
그는 존재론적 상대성을 주장하며, 특정 이론의 존재론이 배경 이론에 상대적이라고 본다. + 그는 진리와 과학의 절대적 성격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 긴장 관계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단순 선택이나 실용적 관점으로 결정될 수 없고, 사실 (진리)과 분명히 연결되어야 한다. => 콰인에 의하면 존재에의 주장과 실제 존재 간의 차별성이 약화된다.
실용주의는 존재론적 개입과 실제 존재의 문제를 혼동하고; 콰인이 추구하는 궁극적 순수 집합 이론으로의 존재론적 축소도 primitive subject term을 줄이는 작업일 뿐이다.
따라서 이론적 존재론적 축소는 존재의 제거를 의미하지 않고, 무엇이 존재하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쟁점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