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Winfield, 『Hegel’s Science of Logic』 - 1장

헤겔의 『WL』(『Wissenschaft der Logik』)은 별도의 도입이 필요 없는 철학 작품이다. 이는 (헤겔 자신이 생각하는) ‘철학’이라는 학문적 탐구의 성격 때문이다. 철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다루는 학문적 대상과 그 대상을 탐구하기에 적절한 방식을 가정하고 있어야만 한다. 물리학의 경우, 그것은 자신이 다룰 것들(예를 들어 힘)과 그들을 다룰 방식(과학적 실험)을 가정하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렇게 가정을 한다는 점에서 철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은 이미 어느 정도 조건 지어져 있고, 다양한 가정들에 대해 상대적인 의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반면, 철학이라는 학문은 그렇게 외부로부터 조건 지어진(외부로부터 규정; 그저 주어진; 소여된) 의견에 머무르는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정에 도전한다. 이 때문에 철학은 자기 자신의 내용과 방식을 다룬다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철학은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독자적으로 판정하는 과제를 안는다.
다른 학문은 겪지 않는 문제를 안게 된다고 한들, 바로 그 문제를 안는다는 점에서 철학은 두 가지 자유를 얻게 된다. 우선, 철학은 그저 주어진 가정들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부정적 자유(소극적 자유; negative freedom)를 얻는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철학은 철학적 활동이라는 그 자신을 통해 자기 자신을 규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자유(적극적 자유; positive freedom)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철학이 자신의 학문적 대상(무엇을 사유하는가?)과 방식(어떻게 사유하는가?)에 대해서 다룬다고 할 때, 이미 사유를 당연히 철학의 도구로 상정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렇기에 철학은 사유를 특권화하는 일에도 반기를 들고 비판해야만 한다. 즉, 철학은 ‘왜 자신이 사유에 의존해야 하는지, 또 이런저런 가정에 의존하는 저러한 학제들의 조건적이고 상대적인 성격을 넘어서려는 시도에 필요한 종류의 자율성을 어떤 유형의 사유가 지닐 터인지’를 어떻게든 다루어야만 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마주한 곤경을 우리도 겪게 된다. 즉, 이러저러한 주장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주어진 주장들이 틀렸음을 깨닫게 되지만, 긍정적 의미에서 확실한 대답을 갖지 못한다. 기껏해야 우리는 부정적인 결과만 갖게 된다.
이런 막다른 골목에 마주하여 이전의 사상가들은 ‘자신 개인의 선택과 이론적 탐색에 상대적이지 않은, 단순히 의견의 산물이 아닌 것’인 ‘주어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가정을 넘어서는 것’을 찾고자 했다. 즉, 어떤 것도 전제하지도 의존하지도 않으면서 본성적으로 있는 것을 발견하고자 했다. 이때, 그것이 정말로 그러한 종류의 것이려면 우리의 인식에도 영향을 받지 않아야만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어떤 행위도 가하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취하는 방식으로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방식의 대표적인 사례가 ‘직관’이다. 직관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널리 알려진 방식으로, 우리는 직관을 통해 ‘우리가 아는 것을 구성하지 않고 주어진 것에 참으로 수동적인 따라서 참으로 직접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주어진 것을 관조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철학은 역사적으로 파생적이지도 매개적이지도 않은 존재론적으로 제일원리를 찾으려고 시도했다. 쉽게 말해 존재론을 펼쳤다. 하지만 존재론을 통한 철학은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직접적인 것, 처음에 오는 것’이 어떤 내용을 지녀야 하는지를 보여주지 않았고, 수많은 제일원리의 후보가 나열됐을 뿐이다. 심지어 우리는 그들 중 무엇이 진짜 제일원리인지 따질 수 없다. 그것들 가운데 무엇이 제일원리인지 따질 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제일원리는 바로 그 근거와 매개된 것인바 특권적 권리를 내놓아야만 한다.
이러한 문제점에 직면하여 ‘마음’을 제일원리에 놓아보아도 상황을 타개하지 못한다. 또 다른 전략으로, 이러저러한 것을 제일원리의 목록에서 배제하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겠다. 이때, 배제를 통해 하나의 무언가만을 목록에 남겨둔다고 한들, 그것이 제일원리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참임을 보장하는 배중률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 무엇이든 알 수 있기 전에 알려져야 하는 이 궁극적 소여가 배중률을 요구한다면, 자신을 제일원리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공박을 행하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존재론으로 철학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앎에 대한 탐구에 앞서 앎의 대상에 관해 무언가를 알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무너진다.

존재론으로 철학을 규명하려는 시도가 벽에 부딪힌 이후, 인식 대상의 성격을 규정하는 근거가 앎의 구조라고 생각한 칸트를 비롯한 그 후예는 인식론을 통해 철학을 하려 시도했다. 인식론을 통해 철학을 한다는 말은 주어진 것에 호소하고 직접적으로 ‘무엇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일에서 벗어나서 ‘앎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다는 말과 같다. 즉, 궁극적 소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 규정되는 방식을 살펴본다. 어쨌든, 이제 철학이 단순한 앎이 아니라 앎에 대한 앎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전회를 이룬다.
그런데 칸트처럼 객관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의 영역에 제한을 가하고 그것이 그 밖에 있는 어떤 것(예지계)으로부터 규정된다고 주장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앎의 대상을 조건 짓는 것들을 우리의 지식 범위 밖에 둘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알려질 수 있는 바를 규정하는 것으로 앎을 간주하는 경우, 앎에 대한 앎, 앎 그 자신은 지식의 주제 한계 밖에 놓이게 된다. 즉, 앎에 대한 앎은 대상들의 조건이자 근거이지만 알려질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지식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결국, 칸트는 앎에 대한 앎을 독단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점에서 토대의 자리에 있던 존재론 대신 인식론을 두었을 뿐, 여전히 존재론과 같은 한계에 부딪힌다.
물론 이때, 규정하는 앎(앎에 대한 앎)과 앎의 대상 사이의 차이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인식론의 한계를 극복하려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규정하는 앎을 앎의 대상과 동일시한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동일시된 앎에 대한 앎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이 시도는 무한퇴행의 문제에 빠지게 된다.

지금까지 시도된 두 시도와 그들이 마주한 문제는 결국 토대론의 문제이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존재론을 최초에 오는 것으로 만들고 주어진 것의 성격을 읽어내서 어떤 제일 원리를 찾는다면 우리는 의견과 가정을 붙드는 일을 극복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다른 한편, 그 대신에 앎으로 돌아서서 인식을 알려질 수 있는 객관성의 규정자로 취급하여 인식의 성격을 읽어내는 식으로도 가정들을 극복하지 못했다. 두 경우 모두에서 근본적 가정을 하고, 토대를 상정하고 있다. 그것은 존재론의 제일원리에 호소하는 데에 있는 토대, (혹은) 초월론적 전회를 행할 때 앎에 있는 토대이다. (두 경우 모두) 어떤 소여를 존재의 궁극적인 제일원리를 특권화된 것으로 취하거나, 아니면 규정자를, 객관성을 규정하는 앎의 구조를 특권화된 것으로 취한다(10).”
토대론의 문제에 빠진 철학은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자신의 길을 찾곤 했다. 그들은 ‘모든 담론, 앎, 이론 혹은 실천 속에서 규범적인 여하한 것에 대한 모든 시도는 항상 토대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데 그 토대는 우연적이다’라는 방식으로 토대론에서 철학을 구출하려 시도했다. 이 전략을 취한 이상 철학은 비합리성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포스트모던의 이러한 주장이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이 비합리적 주장이 아니라 합리적인 주장임을 보여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들 말에 따르면 그 모든 것에도 확정적으로 의지할 수 없기에, 자신 주장의 타당성을 보장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철학은 어떻게 철학을 할 수 있는가? 다른 선택지가 있는가? 즉, “주어지는 것에 호소하고 소여를 읽어내는 존재론”도 아니며, “앎에 대한 앎인 인식론을 토대적으로 만드는 철학”도 아니라는 점에서 토대로부터 자유로운 철학, 심지어 포스트모던 식의 철학도 아닌 그러한 철학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12)? 단 한 가지 남은 길은 자신의 토대가 바로 그 자신인, 즉, 자기 자신이 “모든 규범성, 모든 진리, 모든 권리의 조건 혹은 토대”인, “자기를 근거 짓는 것”이다(12). 따라서 이제는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과 ‘타당성을 소유하는 것’이 똑같은, 그러한 자기 규정적 존재의 여부가 문제가 된다. 이때 ‘자기 규정적’인 것은 자기에 의해, 자기 내에 자리하는 규정하는 과정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단순히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소여와 달리,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전개를 동반한다.
어쨌든, 바로 이렇게 ‘토대 없이 체계를 전개’하는 것이 바로 헤겔이 『WL』에서 행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리고 당연한 듯이 전제되었던 모든 것을 헤쳐놓고 사유에 대한 사유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헤겔이 말하는 논리학은 사유 대상과 사유의 구별은 철폐된다. 바로 이것이 헤겔 논리학의 특징이고, 이로부터 우리는 논리학이 다른 탐구와도 명백히 다른 성격을 가진 탐구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출처: R. Winfield, 2012: 1-15; @TheNewHegel 님 제공 자체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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