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창조와 동화(207-253)
로티는 지금까지 전개한 <아이러니스트>와 <형이상학>의 대립을 헤겔, 니체, 하이데거의 예시를 들며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이 세 철학자는 반쯤은 아이러니스트이나, 반쯤은 형이상학자인 <아이러니스트 이론가>이다. 특히 그가 조망하는 철학자는 니체와 하이데거인데, 전반부는 니체를 위주로 후반부는 하이데거를 위주로 다룬다. 내용이 사실상 같기에 니체 부분을 중심으로 다룬다.
이전 장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형이상학자들은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예상치 못한 통일성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될 거라며 희망하면서 현상의 다양성을 넘어서려 한다. 이들이 말하는 통일성이란 실재하는 어떤 것, 현상 배후에 있으면서 그 현상을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 어렴풋이 감지되어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이다. 그리고 아이러니스트들은 이러한 커다란 비밀을 발견해 올바른 서술을 제공하려는 형이상학자의 작업에 대해 반대하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올바른 서술이란 있을 수 없기에 오직 재서술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데 일군의 아이러니스트들 중에서 마치 형이상학자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아이러니스트 이론을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스트 이론가들이 있다. 이들은 플라톤-칸트 정전과 그 정전에 대한 주석 독해를 과거로 갖고 있는 자들로, 그 정전이 자신에게 미치고 있던 힘을 무력하게 해줄 재서술을 시도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재서술 과정에서 그들은 단순한 재서술과 새로움만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마치 형이상학자들처럼 ‘유럽’, ‘역사’, ‘존재’ 등과 같은 새로운 거대한 것에 대해 서술하며 자신의 재서술에 진리치를 부여한다. 이 점에서 아이러니스트 이론가들은 프루스트 같은 아이러니스트 소설가와 다르다. 그들은 또다른 ‘숭고한 것’을 추구하고 말았다.
그들은 그 자신의 용어가 아니고서는 자신에 대한 재서술을 불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을 쓰고자 한 것이고, 자신이 타인이 만드는 아름다운 패턴 속의 한 요소가 되는 것을, 즉 또 하나의 사소한 사물이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을 쓰고자 한 셈이다.
대표적으로 니체의 경우, 관점주의를 논하고 실체를 거부하며 자신 이전의 철학자들에 반대하는 아이러니스트가 됐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과거의 자극에 대한 특이한 반박용의 묶음으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자아창조로서, 순수한 자발성으로서 존재할 초인”, “힘에의 의지라고 불리는 인간 자아의 저장소”를 상상하며 관점주의와 아이러니즘과 반대의 길을 걷게 됐다(227). 이에 더해, 니체는 ‘유럽의 문제’를 논하며 자신이 “공적 행위에 대한 적절한 관심이라도 가진 듯이” 말했다(214).
이렇게 아이러니스트 이론가로서 니체는 내러티브보다는 체계를 통해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종합을 이루어내려고, 자아창조와 사회적 책임의 대립을 무화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그런 대립은 이론 속에서 종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결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아창조와 정치와 같은 더 큰 어떤 것을 결합하려는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