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Rorty,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 1장

언어의 우연성(33-68)

0.

이전의 철학자들은 ‘세계 그 자체’, ‘저 밖의 진리(Truth)’를 찾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의 정신과 독립적인 절대적 진리는 존재할 수 없다. 진리에 대한 판정은 문장을 통해 가능하고, 문장은 인간이 만든 인간 언어의 구성 요소이므로 진리는 오직 인간 서술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세계 그 자체’, ‘저 밖의 진리(Truth)’는 참이나 거짓일 수 없다. 참이나 거짓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 언어를 통한 ‘세계에 대한 서술’ 뿐이다.

이 경우, 우리는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정확한 표상’이 무의미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세계는 말하지 않고, 오직 인간인 우리가 말할 뿐이라면 우리는 ‘세계 그 자체’에 대한 탐구를 멈추고 ‘세계에 대한 서술’만을 시도해야 한다. 나아가, ‘세계 그 자체’가 진리의 지위를 잃어버린 이상, ‘세계에 대한 서술’ 중 무엇이 절대적으로 옳은지 그른지 따를 기준도 사라진다. 이때, 핵심은 ‘서술을 위한 어휘 선택이 객관적 기준이 아닌 주관적 기준을 따라야 한다’가 아니라, ‘참/거짓을 나누는 기준을 찾으려는 유혹이 여전히 한 언어에 특권을 부여하려는 유혹의 결과임을 알아차리고 그 기준의 절대성의 무의미함을 깨닫는 것’이다. 기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본래적 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사실 그것은 외재적인 것이었다’가 아니라, ‘본래적 본성이란 용어가 아무런 값어치를 가지지 않는다’라는 교훈을 얻어내야 한다.

지금까지 논의가 옳다면, 이제 철학은 많은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서술하는 데 힘써야 한다. 철학은 진리(Truth)를 향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실용적 서술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 세계에 대한 그림 또한 ‘지적이고 도덕적인 진보의 그림’이나 ‘사물들의 실제 모습에 대한 이해가 증대되는 역사’가 아니라, ‘유용한 메타포들이 증대되어가는 역사’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

논의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데이빗슨의 주장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전의 철학자들은 정신(혹은 의식, 언어)을 세계와 자아를 매개하며 세계에 대한 표상이 적절한지 혹은 부적절한지 따지는 매개물로 여겼다. 이러한 시도는 ①신념이나 욕망의 그물망 안쪽에 그것을 파악, 표현, 표상하는 핵심 자아가 있고 ②그물망 바깥에 파악, 표현, 표상되는 세계 혹은 실재가 있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반면 데이빗슨의 주장에 따르면 언어는 매개물이 아니다. 우리의 언어는 세계 그림에 부적절한 조각이라서 폐기되고, 적절한 조각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언어가 세계에 대한 서술을 위해 더 좋은 도구라고 여겨질 때, 그 이전의 언어는 폐기된다. 즉, 핵심은 그 언어가 ‘세계 그림에 대한 왜곡 없는 그림을 보여주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 언어가 우리에게 유용하냐 아니냐’이다.

언어가 세계에 대한 거울 역할을 한다는 전통 철학에 반대하는 데이빗슨은 ‘언어가 하나의 단위체’라는 그들의 전제에도 반대한다. 이 반대는 정신 혹은 의식이 과연 존재하냐는 의심을 품는 라일-데닛 논의와 궤를 같이한다. 데이빗슨은 찰나 이론을 통해 자신 주장을 근거 짓는다. 찰나 이론의 핵심을 잘 보여주는 원주민 사례를 보면, 언어는 “언어 사용자들이 먼저 통달하고 나서 사례에 맞춰 적용되는, 명확히 정의되고 공유된 구조”를 취하고 있지 않다(55). 오히려 그것은 의사소통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새로운 언어를 만듦으로써 좀 더 문제를 쉽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도구이다. 심리 또한 그렇다. 그것은 자아와 실재 사이의 매개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유형의 유기체에 대처할 때, ‘특정한 어휘의 사용이 바람직함’을 표시하는 것일 뿐이다. 결국, 언어-세계 물음은 ‘표현, 표상의 적합성 문제’에서 벗어나 ‘세계의 나머지 부분과 맺는 연관성의 문제를 다루는 물음’이 되어야 한다.

2.

지금까지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언어의 역사 그리고 예술과 과학과 도덕 감각의 역사를 메타포의 역사로 본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나 언어가 가령 의미를 점점 잘 표현하거나 사실을 점점 잘 표상할 수 있어 ‘신’이나 ‘자연’이 계획한 바의 목적에 점점 잘 부합되어가는 것이라고 보는 그림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일단 언어가 어떤 목적을 갖고 있다는 발상이 사라지면, 언어가 매개물이라는 발상도 사라진다(57).” 이는 ‘문자적인 것’과 ‘메타포적인 것’의 관계를 통해 달리 표현할 수 있다. 낡은 메타포들은 그 효용성을 잃어가며 문자적인 것이 되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에 대한 서술을 시도하는 메타포들의 발판이 된다. 이 과정이 바로 인류의 역사이다. 즉, 인류 역사는 대화 상대자들에게 진리를 담아 메시지를 던지는 과정이 아니라, 그들에게 모종의 효과를 낳았던 과정이다.

이렇게 인류 역사를 메타포의 역사로 보는 관점은 플라톤주의·실증주의자 그리고 낭만주의자들의 견해와 맞서는 것이다. 플라톤주의·실증주의자는 외부 실재에 대한 표상을 역사의 참된 진행으로 보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에 메타포적인 것과 별로 관계가 없다. 반면 낭만주의자는 우리 내부에 있는 어떠한 신비스러운 것(예를 들어 상상력)을 표현해내는 과정을 역사의 진행으로 본다. 이 때문에 이들은 문자적인 것과 상관이 없다. 어쨌든, 두 경우는 ‘실재가 외부에 있는 것인지 내부에 있는지’에서 차이가 있을 뿐, 실재를 정확히 표상해내는 과정이 인류 역사로 본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메타포의 역사로 보는 관점에서 역사(와 진화)는 목적 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옛 삶의 방식을 맹목적으로 죽이는 일시적이고 우연한 과정이다. 이러한 관점을 따르는 경우, 우리는 보편적 문제를 상정할 것을 거부하게 된다.


출처: 로티, 2023: 3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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