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윈필드, 『헤겔의 논리의 학』, 제19장 「개념」

개념은 사유, 보편성, 자기규정, 주관성과 연관되는 개념이며, 이들은 이전까지의 모든 범주들과 달리 자기규정의 구조를 지닌다. 이전의 많은 철학자들은 개념을 자기규정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 결과 개념은 자율적인 질서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고정불변하고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개념이 이렇게 생각될 경우, 개념들의 연결은 개념 내부가 아닌 바깥의 수단, 즉 비개념적인 것을 매개로 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개념과 대상 사이의 연결 역시 비개념적인 것에 의해서만 담보된다.

그렇다면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인 사유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는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넘어갈 수도 없으며 개념 너머에 대해서도 접근할 수 없다. 또한 개념이 비자율적인 것으로 간주될 경우 사유의 내용은 사유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으로 나타나는 까닭에, 사유는 스스로 개념을 생산할 수도 없다. 개념을 통해 파악되는 진리는 어떤 객관적인 것도 아니고 새로운 지식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며, 개념적 작업인 철학은 공허한 형식에 대한 분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철학이 행하는 자살”(Winfield, 2012, p. 208)은 보편성과 자기규정의 병행을 깨닫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많은 철학자들은 개별자와 특수자를 개념적으로 구별해내는 데 실패했는데, 이 실패는 보편자와 특수자를 연결하는 일에 대한 실패로 귀결된다. 예컨대 『파르메니데스』에서 관여 이론에 대한 반박으로 제시될 수 있는 제3자 논변이 그 전형적인 문제설정을 보여주고 있다. 보편자는 특수자 속에 현전해야 하지만, 동시에 특수자와 보편자는 구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보편자와 특수자가 구별된다는 점을 견지하면서도, 보편자는 특수자 속에서 그 스스로 달라지지 않은 채 동일하게 남아있어야 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보편자와 특수자의 관계를 일자와 다수의 관계로 두고, 보편자란 여러 개의 특수자가 공통으로 지니는 특징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다면 보편자와 특수자를 매개해주는 제3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제3자가 정말로 보편자와 특수자를 매개하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또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무한히 많은 제3자가 요구된다. 제3자 문제는 보편자와 특수자가 처음부터 분리된 두 개의 개념이라는 전제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제3자 문제를 극복하고 보편자와 특수자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설명하려면 보편자가 자기를 구별하고 스스로를 특수화한다는 생각이 도입되어야 하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발상이 바로 자기규정이다.

단일한 보편자와 하나 혹은 다수의 특수자 사이의 관계와는 별도로, 『논리의 학』에서는 다수의 보편자가 출현하기도 한다. 헤겔에 의하면, 우리는 이전에 도출되었던 모든 범주들은 그 반대 범주와의 관계 혹은 통일 속에서 고찰될 경우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 경우 각 범주들은 각기 다른 보편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범주들은 이행, 정립 혹은 전개를 통해 다른 범주와의 통일 속에 들어서는데, 범주들이 이러한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파악될 때 이들은 표상 속에서 범주들이 나타나는 방식과 구별되어 그 개념 속에서 파악된다.

사유는 표상과 달리 그 규정을 자체독자적으로 파악한다. 무언가를 자체독자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그것을 스스로 자기가 규정한 대로 되어가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사유는 대상을 자율적인 것, 스스로 운동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존재규정들과 본질규정들을 포함하여) 논리적 범주들이 그 스스로를 규정해나가는 것으로 파악되는 한 이 범주들은 개념으로서 파악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칸트의 구별에 따라 말하자면, 경험적이 아니라 선험적이다. 왜냐하면 논리적 범주들은 외부의 관찰자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와 상관없이 내재적으로 자기규정하고 전개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경험적 개념들이라 일컫는 것을 헤겔은 개념이 아니라 관념이라고 부른다. 헤겔이 보기에 관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적이지 않다.

헤겔은 두 가지 보편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먼저 다수의 특수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추상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보편자란 추상적 보편자이다. 추상적 보편자는 그 안에 특수자를 함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 스스로 특수자로 화할 수도 없다. 보편자가 이러한 추상적 보편자와 동일시된다면, 철학이 구체적인 실재와 실존을 도외시한 추상적 학문이라는 키에르케고르나 니체의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추상적 보편자와 비슷한 사례로 보편자를 집합과 동일시하고 특수자를 집합의 원소로 취급하는 관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보편자를 집합으로 본다면 그 안에 정확이 무엇이 그 원소로 속하는지, 각각의 원소를 다른 원소들과 변별해주는 개별화의 원리는 무엇인지를 해명하지 못한다.

반면 헤겔이 이야기하는 두 번째 보편자인 유는 특수자들을 종으로서 필연적으로 포함하며, 필연적으로 종으로 특수화한다. 다시 말해 유는 필연적으로 종으로 분화한다. 예컨대 수는 짝수와 홀수를 그 종으로 갖고 있다. 물론 종은 그 자신 유로서 다시 그 아래에 하위 종을 지니며, 이런 식으로 계속 분화될 때 가장 낮은 종(최하종; species infima)에 도달하게 된다. 최하종은 개별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하종과 개별자의 관계는 집합과 원소의 관계에 상응한다. 추상적 보편자, 집합, 유는 모두 각기 다른 종류의 보편자이며, 이들은 추후 상이한 판단 형식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한편 헤겔은 위의 세 보편자와는 다른 구체적 보편자 개념을 갖고 있다. 구체적 보편자는 유에서처럼 특수자의 특수성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개별자의 개별성 역시 규정하고 확보한다. 여기서 특수자와 개별자의 개념을 정확히 구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특수성은 무언가를 보편성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것인 반면, 개별성은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와 변별되도록 규정해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보편자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보편자를 특수자와 구별해주는 규정이 필요하며,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특수자를 다른 특수자와도 구별해주는 규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보편자는 특수자와 개별자 없이는 성립할 수가 없다.

실체에는 아직 우유적인 요소가 남아있다. 실체의 변화하는 우유적 규정들은 실체의 힘에 종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체 내의 자기규정하는 원리에 의해 출현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는 자기동일적이기는 하지만 자유롭지는 않으며, 스스로를 전개할 수 없다. 반면 자유의 경우 자기규정에 의해 자기동일성을 확보한다. 자유에서는 선택이 성격에 우선한다. 물론 이는 선택에서 성격이 배제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자는 선택을 통해 선택의 결과로서의 성격을 스스로 발전시킨다. 그러므로 자기의 변화하는 상태들은 실체에서와 달리 우유적이 아니라 자기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자기의 상태 변화가 자기규정에 의거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는 자유 혹은 주체성(주관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기준이며, 개념론을 본질론과 변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상기의 설명에서 주관성과 자기규정,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관계가 잘 드러난다.

주관성과 보편성 사이의 관계는 자기규정하는 것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설명에서 잘 드러난다. 이와 관련하여 헤겔이 드는 대표적인 예시는 칸트의 초월론적 통각인데, 칸트는 개념들 사이의 필연적 연결(선험적 종합판단)이 경험이 아니라 오직 사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간파했으며, 주관의 통일이야말로 대상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근거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개념들의 종합이 직관의 다양을 매개로 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제약 조건을 부가했기 때문에 개념에 대한 참된 이해, 대상에 대한 자체독자적인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물론 칸트는 초월론적 통각에 자신이 가한 제약과는 대조되는 지성적 직관에 대해 말하기는 한다. 지성적 직관에서는 직관하는 활동이 곧 직관되는 대상의 정립과 동일하다. 그러나 칸트에게 이 능력은 신에게만 귀속됨직한 것일 뿐이다.

개념논리학의 제1편은 주관성이다. 주관성 장은 개념, 판단, 추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2편의 제목은 객관성이며, 이 장은 기계론, 화학론, 목적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3편은 이념인데, 이념이란 주관성과 객관성, 혹은 개념과 객관성의 통일이다. 이념 편에는 생명, 진리 인식, 선의지, 그리고 절대적 이념이 속한다.

개념론의 객관성은 존재론의 실재성, 본질론의 실존에 상응하는 범주이다. 그러나 다른 두 범주들과 달리 객관성은 주관성에 의속적이거나 실존에서처럼 다른 실존에 의해 제약되지 않는다. 객관성은 자기규정을 그 본성으로 하는 까닭에 다른 개념규정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오직 자체독자적으로 규정해나가며 자기전개하는 범주이다. 이처럼 자기전개하는 대상이야말로 진정한 진리 인식의 대상이며, 이는 개념의 자기전개하는 본성에 상응한다는 점에서 개념적 파악의 대상이다. 자체독자적으로 자기전개하는 대상은 바로 그 사실에 의해 이미 개념적인 대상이며 개념에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개념의 객관성은 개념이 완전히 자기규정적일 때 비로소 확보된다. 왜냐하면 개념은 자기규정 속에서만 자체적으로 또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고, 그렇게 존재할 때 비로소 자체적으로(있는 그대로) 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개념은 개념 자체(Begriff an sich)로 혹은 직접적 통일 속에서 나타난다. 그 다음 개념의 계기들은 판단 속에서 외적으로 관계한다. 그러나 판단은 그 전개 속에서 순전한 개념들의 외적 관계가 아니라 보편자와 특수자의 동일성을 나타냄으로써 개념을 규정하는 방식이 된다. 한편 판단 속에서 개념들을 통일하는 것은 개념이 아닌 계사이다. 이 점에서 판단 속 개념들의 통일은 직접적이다. 반면 추론에서 개념들은 다른 무엇이 아닌 개념을 매개로 해서 통일된다. 개념은 추론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매개하고 통일하게 된다.

헤겔에 의하면 개념은 그 자체로 볼 때 보편성, 특수성, 개별성이라는 세 가지 계기를 지닌다. 본질론에서 “피정립존재”라고 불렸던 요소는 이 세 계기들이 자기를 개념의 규정들로 정립하는 과정 속에서 변형된 채로 수용된다. 즉 본질이 정립자와 피정립존재라는 두 층위 속에서 작동했던 반면, 보편성, 특수성, 개별성은 개념의 규정성을 구성하면서도 각기 스스로가 전체 개념이기도 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편성은 개념의 세 계기 중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특수성과 개별성을 자기 내에 지닌다. 이는 특수성과 개별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개념규정이 개념의 계기이면서 전체일 수 있는가? 이는 각 규정들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기에 의해 행해진 규정이기 때문이다. 자기규정의 구조에 이르러서 각 범주는 비로소 계기이자 전체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똑같은 통일하는 자기의 각 규정들이다.”(Winfield, 2012, p. 218)

개념논리학은 보편성과 더불어 시작한다. 의아하게도 헤겔은 보편성을 보편적 개념이라고 칭하며, 특수성 역시 동시에 특수적 개념이라고 부르면서도, 개별성에 대해서는 개별적 개념 대신 개별자라고 칭한다. 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질 것이다.

이제 개념의 각 계기가 어떻게 동시에 전체로 존재할 수 있는지가 구체적으로 입증된다. 먼저 보편성은 개념 전체와 구별되는 규정적인 개념이라는 점에서 특수자이다. 같은 이유에서 개별성도 특수자이다. 또 보편성은 다른 계기들인 특수성 및 개별성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개별자이다. 같은 이유에서 특수성도 개별자이다. 한편 개념의 각 계기도 모두 특수하다면, 특수성은 보편성을 지닌다. 마찬가지로 다른 두 계기가 개별자로 입증되었으므로 개별성 역시 보편성을 지닌다. 이처럼 개별성, 보편성, 특수성은 서로의 성격을 모두 지닌 채 각자가 총체성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 속에서 개념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개념은 스스로 분화하여 분화한 것과 교통하며, 이런 방식으로 오직 자기와만 관계한다. 이것이 자기규정이 지니는 성격이다. 개념은 자기동일성의 기준을 자기 안에 갖고 자기의 모든 계기들을 포함하는 총체성이다.

한편 보편자는 자기의 계기들과 대조된다는 점에서 자기를 스스로 계기로 만드는데, 이는 보편자가 자기를 특수자로 정립함을 뜻한다. 한편 이 점은 다시 개념의 개별자로의 자기 정립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로부터 개념은 또 판단으로 자기를 정립하게 된다.

헤겔은 보편성의 자기규정적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해 개념규정들을 존재 및 본질규정들과 변별하는 데 많은 노력을 들인다. 개념의 피정립존재는 개념의 자기 내 회귀이다. 다시 말하면, 개념의 타자화는 자기화와 같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이는 본질이 갖고 있는 자기동일성과는 다른 개념의 절대적 자기동일성 때문이다. 본질의 정립 혹은 내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두 개의 다른 층위를 만든다. 반면 보편자는 자기구별 속에서 자기동일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먼저 처음에 보편자와의 구별 속에서 출현한 특수자(the particular)가 복수의 특수자(particulars)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자. 특수자는 보편자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보편자와 동일한 것이다. 한편 자기구별이라는 작용에 의해 보편자는 자기를 특수자와 구별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 특수자가 되면서 보편자에 속하는 하위의 종들을 산출함으로써 스스로 복수가 된다. 이 점에서 개념의 보편성은 집합보다는 유에 가까운 것이다. 이처럼 보편자는 자기 내에서 특수자를 구별함으로써 자기를 특수화하고, 동시에 두 규정성을 포괄하는 유적 전체로서 자기를 재생산한다. 이제 개별자가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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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개념을 조금씩 보고 있는데, actuality와 개념의 차이가 어렵더군요. 모든 개념은 actuality고 모든 actuality가 개념은 아닌 건 알겠다만, 개념이 아닌 actuality의 예시를 생각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혹시 생각나는 예시 있나요?

@yhk9297 님의 질문을 제가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개념이 아닌 actuality가 있는가 혹은 이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마치 "개념"과 "현실성 actuality"라는 두 고정된 개념(:joy:)을 전제한 뒤 이 두 개념이 가지는 외연(extension)을 비교하게 되는 것 같아서 조금 어색하다고 생각합니다. 헤겔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고정된, 형식적, 추상적 개념들 간의 외연 비교가 아니라, 처음에는 "개념"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현실성"의 계기가 결국 "개념"이라는 새로운 계기로 내재적이면서 필연적으로 이행한다는 것이 포인트겠죠. 따라서 "개념"은 "현실성"의 계기를 자체 안에 aufheben하는 것이구요. 그렇다면 "개념이 아닌 현실성"에 대한 물음보다는 "개념 이전의 현실성"이 무엇을 고려한 것인가를 묻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헤겔 본인이 비판하는 것으로서) "개념 이전의 현실성"이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이냐고 묻는다면, 단적으로 칸트의 예시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실제로 헤겔은 "현실성"과 "개념"을 다루는 서술에서 칸트를 많이 인용합니다.) 칸트는 직관(intuition)과 개념(concept)의 이분법을 가져갔고, 때문에 칸트는 개념(지성)만으로는 "현실성"을 규정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개념적 능력으로서의 지성이 어떤 것을 모순 없이 사유할 수 있다면 이것의 "가능성"을 규정할 수 있지만 "현실성"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현실성"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존재가 직관 속에 주어져야 하지요. 이 점에서 칸트에게 "현실성"과 "개념"은 서로 독립적이고 외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성"을 "개념" 속에서 내재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헤겔은 이러한 칸트가 못마땅한 것이겠죠. 가령 헤겔은 개념논리학 초두에서 칸트의 "개념"론에 대해서 이렇게 씁니다.

[...] 개념들은 직관이 없다면 공허하고, 오직 직관을 통해서 주어진 잡다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타당성을 지닌다. [...] 개념과 논리적인 것은 오직 형식적인 것으로서 설명될 뿐이며, 내용을 추상한 것이기에 진리를 담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 dass die Begriffe ohne Anschauung leer sind und allein als Beziehungen des durch die Anschauung gegebenen Mannigfaltigen Gültigkeit haben. [...] und überhaupt wird der Begriff und das Logische für etwas nur Formelles erklärt, das, weil es von dem Inhalt abstrahiere, die Wahrheit nicht enthalte (Suhrkamp, 6: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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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을 rigorous하게 하진 않은 것 같네요. 하지만 개념으로써의 현실성은 Herb님이 말씀하신 대로 Aufheben되겠지만, 실제 존재하는 것들이 이런 개념들을 형태로 가지고 있을 경우 그 개념들이 Aufheben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이 컴퓨터가 a thing with multiple properties/ whole parts, etc.라고 해서 이 컴퓨터가 살아숨쉬는 무언가가 되진 않으니깐요 (신진대사하는 것들 역시 대논리학 뒷부분에 나오는 thought category이기도 하니깐요).

칸트데 대한 설명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듣고 싶은 것은 actuality를 형태로 갖고 있지만 concept은 형태로 갖고 있지 않은 예시였습니다. 예를 들어, 헤겔이 맨날 예시로 드는 도토리 같은 경우에는 개념의 형태로 존재하고, 당연히 thing with properties, whole and parts, something,등의 형태 역시 갖고 있겠죠. 하지만 아까 말한대로 이 컴퓨터는 whole and parts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개념 혹은 신진대사하는 무언가로 존재하고 있진 않습니다. 즉, whole and parts지만 개념은 아닌 예시가 되겠지요. 같은 의미에서 actuality이면서 개념이 아닌 무언가가 궁금했습니다.

+) 지금 보니 예시를 든 건 알겠지만, 칸트의 체계가 아닌 헤겔의 체계 안에서 알고 싶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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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개념이 현실성의 계기를 aufheben한다"라고 말한 것은 "현실성 혹은 objectivity를 구성하는 것이 개념적 활동성을 통해서이므로, 현실성 및 objectivity는 개념 안에 보존되어 고양된다"라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어떤 무생물적인 thing이 마치 살아숨쉬는 개념으로 transform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생물적인 thing은 개념적 활동성을 가지지 못하니까요. 마찬가지로 이러저러한 속성을 가진 컴퓨터를 개념적으로 파악한다고 해서 컴퓨터가 살아숨쉬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만, "~~한 컴퓨터"라고 개념화하고 이를 통해 컴퓨터에 현실성과 objectivity를 부여하는 것은 something given in the intuition (independent of concept) 의 상태로서는 불가능하고 오히려 개념을 통해 파악되었을 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framework가 개념논리학에서 가능한지가 애초에 제겐 의문입니다. 마치 non-conceptual (or pre-conceptual) contents의 예시를 찾고 계신듯 한데, 애초에 개념논리학의 방향은 이러한 non-conceptual (or pre-conceptual) objectivity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헤겔이 칸트를 끌고들어오는 지점도 바로 같은 지점입니다. 헤겔은 objectivity가 개념 속에서 비로소 구성된다는 것을 칸트 역시 옳게 보았다고 지적합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칸트의 "개념"이란 그저 형식적이고 따라서 actuality에 외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이 그 불만의 요지입니다. 이 점에서 굳이 actuality without concept의 예시를 찾자면, 칸트의 체계에서 찾게된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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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한 서술은 아니겠지만, 현실성이면서도 아직 개념은 아닌 것 중 가장 대표적인 예시에는 스피노자적인 실체가 있을 것 같습니다(물론 헤겔이 독해한 대로의 관점에서요). 실체는 자기 안에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 정립하는 것과 정립되는 것을 모두 포함하기는 하지만, 양자가 서로 다른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자기에 의해 생산된 것을 자기 자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자기로부터 생산된 것이 자기와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면 생산의 원리는 맹목성을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기의 생산물이 자기가 아니라 타자로 경험된다면 (마치 마르크스가 노동자의 소외에 대해 말하는 것과 흡사하게) 실체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은 정립하는 것과 정립되는 것의 완전한 일치를 맹목적 필연성에서 자유로의 이행으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 (본질과 실존의 통일로 정의되는 그 성격상) 현실성은 특정한 대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절대자 혹은 세계 전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댓글에서 드셨던 컴퓨터의 사례처럼 현실성의 뚜렷한 예시를 들기 어렵다는 점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현실성이냐 개념이냐의 문제는 동일한 세계를 맹목적 필연성의 체계로 볼 것이냐 아니면 자유로운 주체성의 자기전개라는 관점에서 볼 것이냐에 달린 문제일 터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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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예시는 대논리학에도 나와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추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논리학을 안 읽은지 좀 돼서 까먹고 있었는데, 리마인드시켜주셨네요. 조만간 다시 읽어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 점은 저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이미 개념의 형태를 가진 모든 것들은 현실성의 형태도 가지지만, 뚜렷한 예시들이 개념의 형태를 가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헤겔이 맨날 예시로 드는 도토리라던가, 목표 (purpose)등은 개념의 예시이기 때문에, 현실성의 예시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개념의 형태가 아닌 현실성의 형태만 갖고 있는 예시를 알고 싶었던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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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 한국어의 한계인 것 같은데, 전 현실성이 개념 중 하나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이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actuality is a concept but not concept). Aufheben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깐요. 마치 whole and parts가 개념 중 하나지만 개념은 아닌 것처럼요. 어떤 물체가 whole parts의 형태로 존재한다면 그 형태는 개념이겠지만, 그 물체가 개념처럼 자유롭게 존재하진 않으니깐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현실성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개념으로썬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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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야 헤겔이 현실성에서 개념으로의 이행에서 극복하려는 철학자로 명시적으로 거명하고 있고, 헤겔에 대해 잘 아시니 예시도 알고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실체도 예시라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그 자체로 해명이 필요한 개념이라 사실 예시라고 부르기에도 좀 그렇지요. 그밖에 구체적이고 단순명쾌한 예시가 있는지는 저도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저기서 제가 예시하기 어렵다고 한 것은 당연하게도 지금 논의거리가 되고 있는 아직 개념이 아닌 현실성의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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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단어들이 제게는 어려운 것들이 많아 억지로 유추하다보니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TheNewHegel님의 포인트는 얼추 알 것 같습니다.

특히 이 문장이 제가 이해할 만한 문장이면서 포인트는 다 포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Aufheben이 일어났기 때문에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며 개념이 아닌 현실성의 형태를 가진 것이 있어야한다고 생각은 하긴 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해석의 차이라고 볼만한 수준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현실성을 아직 충분히 읽지도 않았기 때문에 제 의견을 말하는 게 의미없다고 생각이 드네요.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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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른 존재가 된다"는 말씀이 사실 맞습니다. 가령 개념논리적으로만 제대로 포착될 수 있는 존재(생명체, 인간, 국가 등)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비생명체, 비인간, 비국가인 것들 중에 현실성의 예시가 되는 것들이 있을 법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확답을 드리기 망설인 이유는, 개념론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소통적 자유(kommunikative Freiheit)의 구조가 인간 등의 주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념논리학 속에서는 인간이나 생명체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타자와의 상호 인정 관계 속에 들어서고 타자를 자기실현의 가능 조건으로 경험합니다. 헤겔 논리학의 규범적 이상은 하버마스 류의 사회철학적 기획과 바로 이 점에서 변별됩니다(Theunissen, M. (1978). Sein und Schein. Suhrkamp. pp. 46-47). 사정이 그렇다면 곧 똑같은 비-개념논리적 사물도 본질논리학과 개념논리학 속에서 각기 달리 파악될 것이기 때문에, 단순명쾌하게 이거다 하고 예시를 말하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래저래 논리학은 참 이해가 까다로운 저술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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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부분에서 굉장히 놀랐습니다. 전 요즘 정신현상학의 주인/노예 변증법이 개념이 아닌 현실성의 예시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물론 주인/노예가 각기 다른 의식인지, 주인과 노예가 life and death struggle에 participate하는 것인지 등등 수많은 논란이 있겠지만, 전 적어도 주인/노예 변증법이 어떤 의미로든 개념이 아닌 현실성의 예시여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헤겔이 나중에 로빈슨 크루소와 프라이데이의 역사가 주인/노예 변증법이라고 하기 때문에 이 로빈슨 크로소와 프라이데이가 개념이 아닌 현실성의 예시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주장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성과 개념은 확실히 구분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주인/노예는 개념이 아닌 현실성, 그리고 그 뒤에 오는 자의식의 자유는 개념이라고 보고 있거든요).

전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그렇기 때문에 개념이 아닌 현실성을 믿는 편입니다. 생각한지 얼마 안 된 편이라 구멍이 많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개념이 아닌 현실성은 something that affects itself whose affection is directed to itself not by virtue of itself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를 아직 제대로 읽진 않았지만, 로빈슨 크로수가 자신을 규정하는 방법이 프라이데이를 통해서지라고 칩시다. 하지만 프라이데이를 통해서 자신을 규정할 경우 로빈슨 크루소의 존재에 의해서 자신을 규정하는 게 아닙니다. 프라이데이나 외적 요소가 들어가겠죠. 그렇게 되면 로빈슨 크루소의 존재에 의해서 로빈슨 크루소가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규정 자체는 로빈슨 크루소의 존재에 의한 것이겠지만, 자기 규정은 자신의 존재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이 책을 한 번 읽어봐야 제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 막연하게 생각하는 스케치는 이렇습니다 (다른 예시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이었습니다만, 아직 제대로 설명하긴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주인 노예 변증법이 개념이 아닌 현실성의 예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한지 얼마 안 된 young project이기 때문에 여러 코멘트나 objection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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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노예 관계를 예시로 제시한다는 발상은 못 해봤는데, 말씀을 들으니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는 예시 같네요. 주인/노예 관계에서는 주체들이 서로를 통해 자기를 주인 및 노예로 위치 지우지만 서로를 낯설고 외적인 것으로 경험하는데, 그렇다면 이는 '타자를 통해 자기를 규정하기는 하지만 아직 자유롭지는 않은 현실성'의 예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아마 하신 말씀의 요지 같습니다. 수긍이 되는 착상이네요.

한편 현실성 개념을 통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해석하는 작업은 해결해야 할 여러 가지 해석상의 과제를 수반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그러한 해석은 『논리의 학』의 범주들을 가지고 『정신현상학』에 소급적용해서 해석하는 일이 허용되는가, 허용된다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는가 하는 물음에 답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입장이지만, 이 가능성에 회의적인 헤겔학자들도 상당수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여하간 흥미로운 발상이고, 연구해보면 재밌을 주제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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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혹시 이쪽으로 아는 논문 있으신가요? 훌게이트가 비슷한 주제로 한 번 논문 낸 거 같은데 아는 논문이 그게 다여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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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가 그 이야기를 수업에서 들은 거라, 그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텍스트들에 대해서는 크게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일단은 풀다의 책에서 예나 시기 구상되었던 '논리학과 형이상학'이 최종적으로 출간된 『논리의 학』과 핵심적인 부분에서 다르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그러한 해석에 대해 간접적으로 불리한 정황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Fulda, H. F. (2003). G.W.F. Hegel. Beck. p. 96). 그밖에도 예슈케가 그 정황을 근거로 해서 『논리의 학』을 『정신현상학』 내의 내적 논리에 끌어와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Jaeschke, W. (2010). Hegel-Handbuch: Leben - Werk - Schule (2. Aufl.). Metzler. p. 178)

이 두 텍스트 외에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나중에 그런 논문을 찾으면 답글로 달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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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최근에 정신현상학-논리학의 관계에 대한 지난한 해석사를 조망한 논문이 있습니다.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 비교적 상세한 Literature 소개가 있으니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Bowman, Brady. "Zum Verhältnis von Hegels Wissenschaft der Logik zur Phänomenologie des Geistes in der Gestalt von 1807. Ein Überblick." Kommentar zu Hegels Wissenschaft der Logik, Meiner, Hamburg (2018): 1-38.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문헌학적/주석적으로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양자 간의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은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이죠. 특히 하나를 다른 하나를 통해서 이해 및 해석하고자 할 때에는 이에 대한 명확한 입장 없이는 다른 학자들의 의심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의심의 중심에는 크게 2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1: <정신현상학>이 <논리학>을 전제하는가?
2: 전제한다면, 어떤 <논리학>인가?

  1. <정신현상학>이 <논리학>을 전제하는가?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의 서술을 보면 양자가 1대1 대응 관계에 있고, 심지어 <정신현상학>의 계기들과 그 계기들의 이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리학>의 사변적 관점을 선취해야 한다는 듯이 서술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정신현상학>이 <논리학>을 선제하는 것이라면, "무전제 Voraussetzungslosigkeit" 라는 위상이 흔들릴 뿐만 아니라, 불분명한 것(정신현상학)을 더욱 불분명한 것(논리학)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obscurum per obscurius 혹은 악순환의 문제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즉 <정신현상학> 자체의 철학적 가치가 의심받게 됩니다.

  2. 전제한다면, 어떤 <논리학>인가?
    문헌학적/주석학적으로 더욱 어려운 문제입니다. 헤겔이 초기 시절부터 여러 버전의 "논리학"을 구상했고 계속해서 수정했기 때문에, <정신현상학>을 집필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논리학"이 과연 우리가 오늘날 "대논리학"이라고 부르는 그 출판된 <논리학>인지의 문제에 빠집니다. 만약 <정신현상학>에서 말하는 "논리학"이 (높은 확률로) 출판된 <논리학>과 다른, 그 이전의 논리학 구상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이 이전-논리학 구상과 출판된 <논리학>에서 바뀐 지점이 무엇인지 역시 추적되어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너무 거대하고 난감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학자들이 건드리기 꺼려하는 문제들인 것은 확실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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