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은 사유, 보편성, 자기규정, 주관성과 연관되는 개념이며, 이들은 이전까지의 모든 범주들과 달리 자기규정의 구조를 지닌다. 이전의 많은 철학자들은 개념을 자기규정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 결과 개념은 자율적인 질서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고정불변하고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개념이 이렇게 생각될 경우, 개념들의 연결은 개념 내부가 아닌 바깥의 수단, 즉 비개념적인 것을 매개로 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개념과 대상 사이의 연결 역시 비개념적인 것에 의해서만 담보된다.
그렇다면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인 사유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는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넘어갈 수도 없으며 개념 너머에 대해서도 접근할 수 없다. 또한 개념이 비자율적인 것으로 간주될 경우 사유의 내용은 사유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으로 나타나는 까닭에, 사유는 스스로 개념을 생산할 수도 없다. 개념을 통해 파악되는 진리는 어떤 객관적인 것도 아니고 새로운 지식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며, 개념적 작업인 철학은 공허한 형식에 대한 분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철학이 행하는 자살”(Winfield, 2012, p. 208)은 보편성과 자기규정의 병행을 깨닫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많은 철학자들은 개별자와 특수자를 개념적으로 구별해내는 데 실패했는데, 이 실패는 보편자와 특수자를 연결하는 일에 대한 실패로 귀결된다. 예컨대 『파르메니데스』에서 관여 이론에 대한 반박으로 제시될 수 있는 제3자 논변이 그 전형적인 문제설정을 보여주고 있다. 보편자는 특수자 속에 현전해야 하지만, 동시에 특수자와 보편자는 구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보편자와 특수자가 구별된다는 점을 견지하면서도, 보편자는 특수자 속에서 그 스스로 달라지지 않은 채 동일하게 남아있어야 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보편자와 특수자의 관계를 일자와 다수의 관계로 두고, 보편자란 여러 개의 특수자가 공통으로 지니는 특징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다면 보편자와 특수자를 매개해주는 제3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제3자가 정말로 보편자와 특수자를 매개하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또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무한히 많은 제3자가 요구된다. 제3자 문제는 보편자와 특수자가 처음부터 분리된 두 개의 개념이라는 전제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제3자 문제를 극복하고 보편자와 특수자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설명하려면 보편자가 자기를 구별하고 스스로를 특수화한다는 생각이 도입되어야 하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발상이 바로 자기규정이다.
단일한 보편자와 하나 혹은 다수의 특수자 사이의 관계와는 별도로, 『논리의 학』에서는 다수의 보편자가 출현하기도 한다. 헤겔에 의하면, 우리는 이전에 도출되었던 모든 범주들은 그 반대 범주와의 관계 혹은 통일 속에서 고찰될 경우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 경우 각 범주들은 각기 다른 보편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범주들은 이행, 정립 혹은 전개를 통해 다른 범주와의 통일 속에 들어서는데, 범주들이 이러한 변증법적 운동 속에서 파악될 때 이들은 표상 속에서 범주들이 나타나는 방식과 구별되어 그 개념 속에서 파악된다.
사유는 표상과 달리 그 규정을 자체독자적으로 파악한다. 무언가를 자체독자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그것을 스스로 자기가 규정한 대로 되어가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사유는 대상을 자율적인 것, 스스로 운동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존재규정들과 본질규정들을 포함하여) 논리적 범주들이 그 스스로를 규정해나가는 것으로 파악되는 한 이 범주들은 개념으로서 파악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칸트의 구별에 따라 말하자면, 경험적이 아니라 선험적이다. 왜냐하면 논리적 범주들은 외부의 관찰자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와 상관없이 내재적으로 자기규정하고 전개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경험적 개념들이라 일컫는 것을 헤겔은 개념이 아니라 관념이라고 부른다. 헤겔이 보기에 관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적이지 않다.
헤겔은 두 가지 보편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먼저 다수의 특수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추상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보편자란 추상적 보편자이다. 추상적 보편자는 그 안에 특수자를 함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 스스로 특수자로 화할 수도 없다. 보편자가 이러한 추상적 보편자와 동일시된다면, 철학이 구체적인 실재와 실존을 도외시한 추상적 학문이라는 키에르케고르나 니체의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추상적 보편자와 비슷한 사례로 보편자를 집합과 동일시하고 특수자를 집합의 원소로 취급하는 관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보편자를 집합으로 본다면 그 안에 정확이 무엇이 그 원소로 속하는지, 각각의 원소를 다른 원소들과 변별해주는 개별화의 원리는 무엇인지를 해명하지 못한다.
반면 헤겔이 이야기하는 두 번째 보편자인 유는 특수자들을 종으로서 필연적으로 포함하며, 필연적으로 종으로 특수화한다. 다시 말해 유는 필연적으로 종으로 분화한다. 예컨대 수는 짝수와 홀수를 그 종으로 갖고 있다. 물론 종은 그 자신 유로서 다시 그 아래에 하위 종을 지니며, 이런 식으로 계속 분화될 때 가장 낮은 종(최하종; species infima)에 도달하게 된다. 최하종은 개별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하종과 개별자의 관계는 집합과 원소의 관계에 상응한다. 추상적 보편자, 집합, 유는 모두 각기 다른 종류의 보편자이며, 이들은 추후 상이한 판단 형식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한편 헤겔은 위의 세 보편자와는 다른 구체적 보편자 개념을 갖고 있다. 구체적 보편자는 유에서처럼 특수자의 특수성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개별자의 개별성 역시 규정하고 확보한다. 여기서 특수자와 개별자의 개념을 정확히 구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특수성은 무언가를 보편성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것인 반면, 개별성은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와 변별되도록 규정해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보편자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보편자를 특수자와 구별해주는 규정이 필요하며,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특수자를 다른 특수자와도 구별해주는 규정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보편자는 특수자와 개별자 없이는 성립할 수가 없다.
실체에는 아직 우유적인 요소가 남아있다. 실체의 변화하는 우유적 규정들은 실체의 힘에 종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체 내의 자기규정하는 원리에 의해 출현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는 자기동일적이기는 하지만 자유롭지는 않으며, 스스로를 전개할 수 없다. 반면 자유의 경우 자기규정에 의해 자기동일성을 확보한다. 자유에서는 선택이 성격에 우선한다. 물론 이는 선택에서 성격이 배제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자는 선택을 통해 선택의 결과로서의 성격을 스스로 발전시킨다. 그러므로 자기의 변화하는 상태들은 실체에서와 달리 우유적이 아니라 자기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자기의 상태 변화가 자기규정에 의거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여부는 자유 혹은 주체성(주관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기준이며, 개념론을 본질론과 변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상기의 설명에서 주관성과 자기규정,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관계가 잘 드러난다.
주관성과 보편성 사이의 관계는 자기규정하는 것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설명에서 잘 드러난다. 이와 관련하여 헤겔이 드는 대표적인 예시는 칸트의 초월론적 통각인데, 칸트는 개념들 사이의 필연적 연결(선험적 종합판단)이 경험이 아니라 오직 사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간파했으며, 주관의 통일이야말로 대상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근거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개념들의 종합이 직관의 다양을 매개로 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제약 조건을 부가했기 때문에 개념에 대한 참된 이해, 대상에 대한 자체독자적인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물론 칸트는 초월론적 통각에 자신이 가한 제약과는 대조되는 지성적 직관에 대해 말하기는 한다. 지성적 직관에서는 직관하는 활동이 곧 직관되는 대상의 정립과 동일하다. 그러나 칸트에게 이 능력은 신에게만 귀속됨직한 것일 뿐이다.
개념논리학의 제1편은 주관성이다. 주관성 장은 개념, 판단, 추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2편의 제목은 객관성이며, 이 장은 기계론, 화학론, 목적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3편은 이념인데, 이념이란 주관성과 객관성, 혹은 개념과 객관성의 통일이다. 이념 편에는 생명, 진리 인식, 선의지, 그리고 절대적 이념이 속한다.
개념론의 객관성은 존재론의 실재성, 본질론의 실존에 상응하는 범주이다. 그러나 다른 두 범주들과 달리 객관성은 주관성에 의속적이거나 실존에서처럼 다른 실존에 의해 제약되지 않는다. 객관성은 자기규정을 그 본성으로 하는 까닭에 다른 개념규정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오직 자체독자적으로 규정해나가며 자기전개하는 범주이다. 이처럼 자기전개하는 대상이야말로 진정한 진리 인식의 대상이며, 이는 개념의 자기전개하는 본성에 상응한다는 점에서 개념적 파악의 대상이다. 자체독자적으로 자기전개하는 대상은 바로 그 사실에 의해 이미 개념적인 대상이며 개념에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개념의 객관성은 개념이 완전히 자기규정적일 때 비로소 확보된다. 왜냐하면 개념은 자기규정 속에서만 자체적으로 또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고, 그렇게 존재할 때 비로소 자체적으로(있는 그대로) 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개념은 개념 자체(Begriff an sich)로 혹은 직접적 통일 속에서 나타난다. 그 다음 개념의 계기들은 판단 속에서 외적으로 관계한다. 그러나 판단은 그 전개 속에서 순전한 개념들의 외적 관계가 아니라 보편자와 특수자의 동일성을 나타냄으로써 개념을 규정하는 방식이 된다. 한편 판단 속에서 개념들을 통일하는 것은 개념이 아닌 계사이다. 이 점에서 판단 속 개념들의 통일은 직접적이다. 반면 추론에서 개념들은 다른 무엇이 아닌 개념을 매개로 해서 통일된다. 개념은 추론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매개하고 통일하게 된다.
헤겔에 의하면 개념은 그 자체로 볼 때 보편성, 특수성, 개별성이라는 세 가지 계기를 지닌다. 본질론에서 “피정립존재”라고 불렸던 요소는 이 세 계기들이 자기를 개념의 규정들로 정립하는 과정 속에서 변형된 채로 수용된다. 즉 본질이 정립자와 피정립존재라는 두 층위 속에서 작동했던 반면, 보편성, 특수성, 개별성은 개념의 규정성을 구성하면서도 각기 스스로가 전체 개념이기도 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편성은 개념의 세 계기 중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특수성과 개별성을 자기 내에 지닌다. 이는 특수성과 개별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개념규정이 개념의 계기이면서 전체일 수 있는가? 이는 각 규정들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기에 의해 행해진 규정이기 때문이다. 자기규정의 구조에 이르러서 각 범주는 비로소 계기이자 전체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똑같은 통일하는 자기의 각 규정들이다.”(Winfield, 2012, p. 218)
개념논리학은 보편성과 더불어 시작한다. 의아하게도 헤겔은 보편성을 보편적 개념이라고 칭하며, 특수성 역시 동시에 특수적 개념이라고 부르면서도, 개별성에 대해서는 개별적 개념 대신 개별자라고 칭한다. 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질 것이다.
이제 개념의 각 계기가 어떻게 동시에 전체로 존재할 수 있는지가 구체적으로 입증된다. 먼저 보편성은 개념 전체와 구별되는 규정적인 개념이라는 점에서 특수자이다. 같은 이유에서 개별성도 특수자이다. 또 보편성은 다른 계기들인 특수성 및 개별성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개별자이다. 같은 이유에서 특수성도 개별자이다. 한편 개념의 각 계기도 모두 특수하다면, 특수성은 보편성을 지닌다. 마찬가지로 다른 두 계기가 개별자로 입증되었으므로 개별성 역시 보편성을 지닌다. 이처럼 개별성, 보편성, 특수성은 서로의 성격을 모두 지닌 채 각자가 총체성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 속에서 개념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개념은 스스로 분화하여 분화한 것과 교통하며, 이런 방식으로 오직 자기와만 관계한다. 이것이 자기규정이 지니는 성격이다. 개념은 자기동일성의 기준을 자기 안에 갖고 자기의 모든 계기들을 포함하는 총체성이다.
한편 보편자는 자기의 계기들과 대조된다는 점에서 자기를 스스로 계기로 만드는데, 이는 보편자가 자기를 특수자로 정립함을 뜻한다. 한편 이 점은 다시 개념의 개별자로의 자기 정립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로부터 개념은 또 판단으로 자기를 정립하게 된다.
헤겔은 보편성의 자기규정적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해 개념규정들을 존재 및 본질규정들과 변별하는 데 많은 노력을 들인다. 개념의 피정립존재는 개념의 자기 내 회귀이다. 다시 말하면, 개념의 타자화는 자기화와 같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이는 본질이 갖고 있는 자기동일성과는 다른 개념의 절대적 자기동일성 때문이다. 본질의 정립 혹은 내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두 개의 다른 층위를 만든다. 반면 보편자는 자기구별 속에서 자기동일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먼저 처음에 보편자와의 구별 속에서 출현한 특수자(the particular)가 복수의 특수자(particulars)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자. 특수자는 보편자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보편자와 동일한 것이다. 한편 자기구별이라는 작용에 의해 보편자는 자기를 특수자와 구별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 특수자가 되면서 보편자에 속하는 하위의 종들을 산출함으로써 스스로 복수가 된다. 이 점에서 개념의 보편성은 집합보다는 유에 가까운 것이다. 이처럼 보편자는 자기 내에서 특수자를 구별함으로써 자기를 특수화하고, 동시에 두 규정성을 포괄하는 유적 전체로서 자기를 재생산한다. 이제 개별자가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알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