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윈필드, 『헤겔의 논리의 학』, 제18장 「개념으로의 이행」

개념의 연역은 직관이나 관찰에 의해 수행될 수 없다. 비개념적 직관을 통해 개념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인식적 특권을 지닌 심급에 호소하게 되며, 이 인식적 특권의 출처는 의문스러운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보통 직관이란 대상과 의식이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방식이라는 뜻을 지니며, 이때 직관은 어떤 추론이나 매개 없이 대상을 아는 능력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대상을 주어진 바대로 직접 이해하는 능력이다. 직관을 옹호하는 자들은 개념화에 의해 내용의 개변과 왜곡이 발생한다는 점을 근거로 추론을 거부하고 내용을 주어진 그대로 포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들 직관주의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다시 직관에 대해 개념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이들은 우리가 직관에 호소해야 하는 이유와 방법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념에 의거하는 입장 역시 그 근거가 의문시되어야 하며, 철학은 개념 그 자신을 의문시할 수밖에는 없다. 니체가 지적한 대로, 이성의 자기비판에서는 비판의 대상으로서의 이성과 비판의 심급으로서의 이성을 나뉘고 후자의 근거는 의심되지 않은 채 남겨진다. 그러므로 이성의 자기비판은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이성에 의거하는 철학은 참된 것과 사유할 수 있는 것, 개념화 가능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한다. 이러한 이유로 키에르케고어와 니체 등의 철학자들은 이성적 사유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그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이성적 사유를 자신의 주장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이제 우리는 개념에 대한 헤겔의 논의에 발을 들였다. 개념이란 그 어떤 가정도 무비판적으로 전제해서는 안 되는 담화이다. 일단 개념은 필연성이 아닌 자기규정 및 자유와 연관된다. 이러한 특징은 보편성과 연관되고, 나아가 보편성은 주체성(주관성)과 연관된다. 개념은 왜 자유, 보편성, 주체성과 관계하는가? 그리고 왜 이 주제들은 존재론이나 본질론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인가? 헤겔은 이 범주들이 존재론이나 본질론에 등장할 수 없는 이유를 논증해 보인다.

이 논증을 들여다보기 전 우리는 네 가지 용어들을 추가적으로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먼저 개별성 및 특수성은 보편성과 관계되는 개념이다. 보통 다른 철학에서 특수성과 개별성은 구별되지 않고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헤겔은 개별성과 특수성을 구별한다. 물론 보편성, 개별성, 특수성은 추후 필연적으로 연관되는 개념들로 밝혀질 것이다. 또한 객관성과 이념 역시 존재론에서의 실재, 본질론에서의 실존, 현상, 현실성에 상응하는 개념으로서 언급되어야 한다. 객관성 역시 주관성과 대조되면서도 그 스스로 개념, 보편성, 자유를 함유하는 개념이다. 이념은 주관성과 객관성의 통일이다.

개념은 보편자, 특수자, 개별자에 의해 규정되며, 나아가 판단, 추론으로 전개된다. 이는 기계론, 화학론, 목적론을 포함하는 객관성에 관한 논의로 이어질 것이며, 목적론에 이르러 주관성과 객관성이 통일될 것이다. 이념에서는 개념과 객관성의 통일과 연관되는 진리 개념이 다루어질 것이다.

개념은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으로서 다른 방식보다 특별한 지위를 지닐 것이다. 무엇이 개념에게 진리에 대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가? 먼저 개념에 대한 헤겔의 최초의 정식화는 개념의 개념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까지의 논리학이 개념의 개념이 아닌 특수한 종류의 개념들(존재의 개념, 본질의 개념)을 다루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때 우리는 이전의 논리학이 어떤 점에서 개념규정이며 어떤 점에서 개념규정이 아닌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먼저 개념의 ‘연역’은 어디에서 이루어졌는가? 그것은 본질론에서 서술된 개념의 범주적 발생에 대한 논증에서 이루어진다. 본질논리학, 특히 실체의 인과성 관계의 상호 전도와 상호작용에서 개념으로의 이행이 개념의 연역에 해당한다.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성, 자기 제약적 현실성이 실체이다. 실체는 여전히 자기 안에 우유를 포함하는데, 이 우유성이 필연화될 때 실체 내의 인과성 관계가 성립한다. 원인과 결과는 실체들 간의 관계인 반면, 가능성, 현실성, 필연성은 실체 간의 관계이지 않다. 왜 그런가? 칸트가 말한 것처럼, 원인과 결과는 실체들의 상호 독립성을 동반한다. (근거-정초된 것의 관계와 달리) 원인과 결과는 상이한 내용을 가지며, 각각의 내용은 서로에 의존하지 않은 채 분리되어 있다. 그럼에도 후자의 발생이 전자에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양자는 관계 맺는다. 다시 말해 원인은 결과의 실체적 독립성을 유지시키면서도 결과의 발생에 관련하는 어떤 요인을 결과 내에 정립한다.

실체와 우유의 관계에서 고려되는 건 여러 실체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단일한 실체 내에서의 정립과 피정립의 관계이다. 실체가 우유를 필연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이 다른 실체와의 관계를 동반한다는 점이 밝혀짐으로써 실체 간의 인과성 관계가 성립한다. 어떤 것과 타자 혹은 견인과 반발을 거듭하는 일자와 다수에서는 한 쪽을 다른 쪽과 독립시키면서 내용적으로 구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과성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앞서 서술된 바 있듯이, 원인은 결과를 통해 비로소 원인이 되며, 결과는 원인을 통해 비로소 결과이다. 이 점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전도된다. 실체의 인과성 관계 역시 마찬가지로 상호작용으로 전도되며, 두 실체는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인 것이 된다. 각 실체는 상대 실체에 작용하는 동시에 상대의 작용에 반작용한다.

이 상호작용은 곧 개념의 출현을 위한 직접적인 기반을 마련한다. 실체들은 각각 원인과 결과로서 구별되었으나, 이 관계가 전도되어 상호적인 것으로 변화하면서 각 실체의 역할은 구별 불가능하게 되며, 이는 정립하는 것과 정립되는 것이 통일됨을 뜻한다. 이제 정립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을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립한다. 정립한다는 것은 곧 스스로 정립된다는 것이다. 이는 실체의 측면에서는 자체독자존재와 피정립존재의 통일을 뜻한다. 실체의 독립성 내지 완전한 자기관계는 실체의 피정립존재와 완전히 동일하다.

이것이 어떻게 개념의 탄생을 의미하는가? 능동적 실체와 수동적 실체의 통일은 규정하는 존재와 규정되는 존재의 통일을 의미하며, 곧 자기규정의 구조가 성립함을 뜻한다. 이는 존재론에서 등장한 단순한 직접적 규정성이나, 본질론에서의 규정하는 것-규정되는 것 간 매개 관계와는 변별된다. 자기규정은 규정하는 활동에 의해 온전히 매개되어 있는 한편,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자기에 의해 매개된다는 점에서 직접적이다. 자기규정은 온전히 자기와만 관계 맺는다는 점에서는 독자존재와 닮은 점이 있다. 그러나 일자는 자기규정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주관성을 결여한다. 왜 자기관계는 자기규정이 아닌가? 자기규정은 한낱 자기관계와 달리 정립자와 피정립자가 완전히 통일되는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즉 자체독자존재와 피정립존재의 통일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자기규정은 자기를 자기로부터 구별하며, 그 가운데 자기 동일적으로 남아있다. 존재론에서는 한 범주에 이어서 다른 범주가 등장했으며, 본질론에서는 정립하는 것과 정립되는 것의 착종이 새로운 종류의 정립자-피정립자 관계를 산출했다. 개념론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구별 속에서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는 자기규정의 전개이다.

그런데 이것이 개념 혹은 보편성과 무슨 상관인가? 앞서 이야기했듯, 보편성은 개별성 및 특수성과 관련된다. 보편성은 자기를 다수의 개별자로 개별화한다. 여기서 핵심은 자기구별을 통해 산출된 개별자들이 각기 총체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각 범주가 교차적인 규정에 머무르는 존재론이나 구별을 통해 출현한 요소들이 총체성에 이르지 못하고 다른 두 층위로 양분되는 본질론과 달리, 개별자와 특수자는 보편자의 구성요소로서 보편자와 같은 층위에서 보편자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규정이 된다.

개념도 마찬가지로 자기규정의 성격을 지닌다. 헤겔에 의하면, 어떤 대상을 개념화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사유의 형식 속에 정립한다는 것이다. 개념화된 대상은 사유의 자기규정인 동시에 대상의 자기규정, 즉 있는 그대로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대상을 개념화한다는 것은 표상이나 직관, 상상처럼 어떤 대상 외적인 요인을 남겨두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특징이 개념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요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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