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헤겔이 철학사에서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어 온 여러 용어들의 의미를 어떻게 미세하게 구분하고 있는지를 잘 이해하고, 이 용어들을 혼동하지 않고 구분하는 일이 어떤 장점을 지니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예컨대 헤겔은 “근거”와 “정초된 것”, “원인”과 “결과”, “실체”와 “우유”를 모두 구별하며, “정립”과 “규정”을 서로 구별한다. 헤겔의 용법에 의하면 정립이 규정보다 풍부한 함의를 지닌다. 존재논리학에서 성질의 짝 개념으로 등장하는 규정과 달리 정립은 정립하는 것과 정립되는 것이라는 두 항의 관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본질은 피정립존재를 정립하는 활동에 불과하지만, 본질논리학의 전개 속에서 점점 더 풍부한 함의들을 얻어가며, 정립자와 피정립자의 두 항 역시 점점 풍부한 특징을 지니게 된다. 본질은 반성 속에서 동일성, 구별,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대립 등의 함의를 얻는다. 이제 근거는 동일성, 구별 등의 반성규정적 특성들을 지니면서도 이전과 달리 정초된 것을 실재적인 피정립존재로 지닌다.
그럼에도 근거와 정초된 것 사이의 관계는 형식적이다. 즉 양자는 내용상이 아니라 형식상 구별되는 관계이다. 근거와 정초된 것은 상이하며, 양자의 상이성은 동일한 근거가 여러 다른 것들을 정초하고 동일한 피정초자가 다른 여러 근거에 의해 정초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근거와 정초된 것의 관계가 내용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로 말미암아 근거는 “객관적 원리”를 지니지 않으며 아직 목적도 목적인도 아니다.
원인과 결과 역시 내용에 대해 무관한 관계이다. 그러나 근거와 정초된 것과 달리 원인과 결과는 상이한 내용을 지닌다. 두 관계가 내용에 무관한 방식은 서로 다르다. 전자가 내용에 무관한 것은, 어떤 사태를 근거와 정초된 것의 관계로 분석할 때 양자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후자가 내용에 무관한 것은, 원인과 결과의 내용을 각각 분석해도 양자가 서로 인과 관계에 있다는 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엔치클로페디』 논리학의 구분을 참조한다면, 원인과 결과는 각각 상호 독립적인 실체이다. 실체들이 서로 맺는 관계는 우유적이므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 역시 실체들 간의 “우유적인 교차”(Winfield, 2012, p. 185)에 불과하다.
반면 목적과 실현은 내용적으로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왜냐하면 근거-정초된 것의 관계는 여러 내용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될 수 있으며 정초가 내용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목적은 실현을 통해 자기의 내용을 현실화하며 실현된 결과는 목적과 내용적으로 동일하다. 또한 목적은 목적을 실현하는 활동과 내용상 내적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형식적 구별인 근거-정초된 것의 관계와도 다르며, 상이한 내용을 갖는 원인-결과 관계와도 다르다.
근거와 정초된 것의 관계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범주는 실존이다. 근거 범주에서는 근거와 정초된 것 사이의 역할 전도가 (본질논리학에서 최초로) 일어나는데, 실존은 서로를 제약하는(조건 짓는) 요소들의 총체이다. 본질이 존재를 결여한 무에서 무로의 운동이었다면, 실존은 “매개의 존재하는 연결체”(Winfield, 2012, p. 185)이다. 실존에서 서로를 제약하는 요소들은 기체(Substrat)인 사물을 그 바탕으로 둔다.
그런데 실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모든 상호 제약적 조건들을 통일하는 힘이 무엇인지가 설명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물은 그 특성들을 통일할 어떤 원리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각 특성들은 사물에 외적으로 덧붙여질 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실존으로부터 법칙과 현상의 구별이 등장한다. 서로를 제약하는 사물들은 그 배후에 사물들을 현상시키는 법칙을 전제한다. 헤겔에 의하면 법칙과 현상의 관계는 형식과 내용의 관계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현상은 질료와 달리 그 자신 이미 규정적으로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상은 아직 본질의 현시(manifestation)가 아니며, 본질은 현상과 변별되는 성격을 지닌 채 현상의 배후에 은폐되어 있다. 그러나 결국 현상의 배후에 숨겨진 법칙은 사실 그 자신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왜냐하면 현상을 정립하기 위해서 법칙의 내용은 현상 속에 반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은 더 이상 현상의 배후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현상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헤겔에 의하면 법칙과 현상의 관계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해당한다. 왜 전체와 부분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특성, 전체-부분, 유기체-기관이라는 세 가지 개념쌍을 서로 변별할 필요가 있다. 일단 사물-특성 구별과 전체-부분 구별에서 특성과 부분은 각각 사물과 전체로부터 독립성을 지닌 채 상이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유기체-기관 구별과 다르다. 다시 말해 부분은 전체로부터 분리되어도 자기 자신으로 남는 반면, 기관은 유기체로부터 분리될 경우 자기 자신이기를 멈춘다. 그러면 사물-특성과 전체-부분은 어떻게 다른가? 사물-특성 관계에서 사물은 그저 특성을 소유하고 있어서, 특성은 사물로부터 분리되어도 여전히 특성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부분은 전체로부터 분리될 경우 부분으로서 존재하지 못한다. 부분은 전체를 구성하고 그 속에서 다른 부분과 관계 맺는 한에서만 부분이다. 예를 들어보자. 짠 맛은 소금으로부터 분리되어도 짠 맛이며, 여전히 특성으로서 존재한다. 그래픽카드는 메인보드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컴퓨터를 구성하는 부품이기를 멈추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래픽카드 자신으로서 존재한다. 심장은 생물로부터 분리된 시점부터 유기체의 기관으로서도 심장으로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낱 썩어가는 고깃덩이일 뿐이다.
다시 전체와 부분에 대한 논의로 돌아오자. 부분은 전체 속에서 다른 부분과 변별되는 한에서만 부분이다. 그러나 이 관계 속에서 전체와 부분은 서로를 부정한다. 전체는 그 스스로 여러 부분들로 나뉨으로써만 전체이며, 부분은 자기의 상이성을 부정하고 전체에 속함으로써만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체와 부분은 상호 부정적으로 관계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힘과 표현의 관계에 해당한다. 힘은 자기를 상이성 속에서 표현하며, 상이성은 하나의 힘 속에서 통일된다. 법칙은 사물들을 정립하고 이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양자가 표현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힘과 표현은 목적과 실현의 관계와 달리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게다가 힘은 그 스스로를 실현하는 목적과 달리 외적인 유발(Sollizitieren)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자기규정이라고 할 수 없다. 힘과 표현, 원인과 결과, 필연성 등의 범주는 개념과 달리 정립하는 것과 정립되는 것 사이의 내용적 차이를 잔존시킨다는 점에서 여전히 맹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목적을 가진 사람의 행위는 목적에 의해 내용적으로 규정되는 까닭에 맹목적이라고 할 수 없다. 반면 표현이나 결과가 지니는 내용은 힘이나 원인에 의해 정립되지 않는다.
힘은 그 스스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형식적 성격을 지닌다. 이와 달리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은 자기 고유의 실존을 지닌다. 여기서 혹자는 원인-결과 구별에 시간적 선후 관계의 개념을 덧붙임으로써 이를 힘-표현 구별과 변별하려고 할 수도 있으나, 시간 개념이 논리적 범주가 아닌 자연철학적 범주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시간적 선후 관계는 논리적 관계가 아닌 자연적 관계이다. 원인-결과는 힘-표현과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변별된다. 힘과 달리 원인은 그 스스로 현실성을 지니며, 나아가 힘처럼 외적으로 유발될 필요가 없다.
앞서 전체는 부분으로 나뉘는 한에서만 전체이며, 부분은 전체에 종속되는 한에서만 부분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원인은 결과를 산출하는 한에서만 원인이며, 결과는 원인에 의해 산출되는 한에서만 결과이다. 이 점에서 결과는 원인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원인 역시 결과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원인은 결과를 생산함으로써 자기를 원인으로서 생산했”으며, 이처럼 “자기를 원인으로서 생산하는 원인”이란 자기원인(causa sui)이다(Winfield, 2012, p. 189).
원인과 결과는 상호 전도를 통해 상호작용(Wechselwirkung)으로 이행한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양자 사이에는 여전히 내용적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가 없어지고 정립자와 피정립자의 역할이 완전히 교환 가능해질 때 본질론이 종결되고 개념론이 시작된다.
앞서 이야기되었듯 힘과 표현의 범주에서 힘은 유발을 필요로 한다. 이는 힘을 유발하는 또 다른 힘의 존재를 요청하며, 유발하는 힘은 다시 그 자신 다른 힘에 의해 유발되어야 한다. 이는 사물의 운동이 자기운동이 아니라 외적인 요인에 의해 일어난다는 점을 보여준다.
힘과 표현의 관계는 힘의 내면과 외면의 구별을 요청하며, 내면과 외면이 통일되고 힘과 표현이 동일한 내용을 가질 때 바로 현실성(Wirklichkeit) 범주가 등장한다. 현실성은 본질과 실존의 통일로 규정된다. 현실성은 현상과 달리 자기 밖의 요인에 의해 매개되어 있지 않으며, 이 점에서 현실성은 자기 자신을 현시하는 실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성에는 여전히 정립하는 것과 정립되는 것의 구별이 잔존한다.
본질론의 제3편 「현실성」의 전반부는 현실성-가능성-필연성의 순으로 진행되며, 후반부는 실체와 우유-인과성 관계-실체 간의 상호작용을 다룬다. 왜 이 관계들은 개념론에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자기규정, 보편성, 특수성, 개별성의 범주를 포함하지 않는가? 그것은 가능성이 현실성과 맺는 관계의 성격 때문이다. 가능성은 현실적이 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화되지 않은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가능성은 현실적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우연성도 존재해야 하며, 가능성의 현실화 속에는 우연성이 개입한다.
헤겔에게 필연성은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처럼 실제로 현실화되는 가능성을 헤겔은 “실재적 가능성”이라 부른다. 보통 실재적인 가능성과 순전한 가능성을 구별하는 방식은, 후자를 단순한 논리적 가능성 즉 “구상 가능성”(conceivability)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논리적 규칙을 위배하지 않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것이다. 반면 어떤 것이 실재로 가능한지를 따지려면 단순한 논리적 일관성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정말로 현실화되기 위한 조건들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실재적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실재적 가능성은 어떤 것이 현실화되도록 해주는 현실적 조건들에 의존한다.”(Winfield, 2012, p. 192)
그렇다면 가능성이 현실성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다른 현실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실성이 성립하기 위한 다른 현실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나면, 현실성은 더 이상 자기가 현실화되기 위한 조건들에 매개되지 않는 직접적 존재를 지닌다. “현실성은 자기를 인도했던 과정의 제거에 기초해 현실성을 지님으로써 […] 그냥 존재한다.”(Winfield, 2012, p. 192) 이처럼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성은 “자기 제약적”(Winfield, 2012, p. 192)이며, 이 지점에서 현실성은 실체가 된다.
헤겔의 실체는 스피노자와 비슷하게 우유를 지닌 채 자기 스스로의 필연성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체가 여전히 우유와의 관계 속에서 필연성을 지니는 까닭에, 그것은 아직 자기규정하는 주체가 아니다. 실체의 우유가 필연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유들의 내용이 필연적 원리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체는 아직 주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