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성은 본질논리학에 이르러 존재의 영역 전체가 본질에 의해 매개된 것으로 드러남으로써 그 직접성을 상실하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부정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규정성은 본질논리학에서 피정립존재(Gesetztsein; positedness)의 형식을 띠는데, 이 피정립존재는 존재론의 현존재와 본질 사이에서 부정성과 규정성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먼저 피정립존재는 자립성을 잃어버리고 본질의 산물이 됐다는 점에서 현존재와 대조된다. 한편 피정립존재는 정립하는 것이 아닌 정립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규정성을 지닌 채 본질과 대립된다.
본질은 처음에는 존재의 내용을 구성하지 않으면서도 존재를 매개하는 것으로 드러나며, 이 점에서 본질은 본질적인 것으로, 존재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된다. 그로 말미암아 비본질적인 것은 본질에 의해 산출된 것이면서도 아직 일종의 타자성을 지니고 나타난다. 이처럼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의 대립이 회의론자와 독단론자, 주관적 관념론자들이 고수했던 이분법이다. 현상은 직접적인 것으로 드러나지만 그 배후에는 현상을 매개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매개되는 것의 소여성이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의 구별을 낳는다. 물론 이 전자에 우위가 부여된다는 점에서 이 관계는 어떤 것과 타자의 관계와 다르다.
본질은 자기가 정립한 것 속에 반영(반성)되며, 이로써 자기 내로 되돌아가는데, 이러한 자기관계가 본질을 반성으로 만든다. 물론 본질은 타자에 그저 관념성(이념성)만을 부여하고 공허와 관계 맺을 뿐인 일자와 달리 자기의 타자에 피정립적 성격을 부여한다.
반성에서 밝혀지는 것은, 본질이 자기의 정립작용 자체를 정립한다는 것이다. 반성하는 것은 자기로 되돌아가기 위해 산물을 필요로 하지만, 이 산물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반성에 의해 정립되는 것이다. 이제 본질에 의한 피정립존재의 매개성이 명확히 드러남으로써 피정립존재는 반성규정이 되며, 반성은 (단순히 피정립존재 속에서 가현하지 않고) 피정립존재를 규정하는 반성이 된다. 본질은 처음에는 자기가 정립하는 것의 내용을 전제하며, 이때 본질의 반성은 외적 반성이다. 그러나 이 전제된 것 역시 본질에 외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립활동에 의한 것임이 밝혀지면서, 규정하는 것과 규정되는 것의 구별은 반성의 자기관계 속에서 통일된다. 이때 규정되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닌 반성의 자기규정이 되며, 이로부터 헤겔이 본질성(본질태)이라 부르는 반성규정들이 출현한다.
본질성들은 본질이 자기 내 반성을 통해 얻는 본질의 규정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타자관계를 자기 내로 회귀시키는 피정립존재. 둘째, 피정립자의 직접성이 부정됨으로써 자기와 통일되는 자기-내-반성으로서의 본질.
본질은 피정립존재와 통일된 자기-내-반성이지만, 피정립존재는 그 속에서 본질 그 자체와는 구별된다. 이 두 가지 논제는 결국에는 본질에 의해 규정되는 피규정자가 본질을 규정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앞으로 살펴볼 것은 이 점이 어떻게 본질성의 장에서 논증되는지이다. 먼저 본질성에 이르러 본질은 규정된 본질이 된다. 본질은 정립작용으로서의 본질 그 자신을 정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질성은 반성의 형식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조화하게 된다.
반성규정은 본질이 단순한 자기관계 혹은 동일성이라는 점에서 시작한다. 어떻게 이 동일성은 존재나 현존재, 양 혹은 대자존재와 다른가? 본질론의 반성규정 장에서 동일성 범주가 출현한다면, 그 이전의 범주들은 동일성이라는 규정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 점이 앞으로 밝혀져야 한다. 구별, 상이성, 동등성과 부등성, 대립, 모순의 범주 역시 마찬가지의 물음에 맞닥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