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ndom, Robert (1994). Making It Explicit: Reasoning, Representing, and Discursive Commitment. Harvard: Harvard University Press. 547-583.
*개인적인 관심사 때문에 브랜덤의 주저 『명시적으로 만들기』(Making It Explicit) 중 일부 챕터인 "Epistemically Strong de re Attitudes: Indexicals, Quasi-indexicals, Proper Names"를 읽게 되어, 발췌해서 나름 정리해봤습니다. 분량이 길어서 3편으로 나눠 올리려고 합니다.
1.약한 대물 귀속으로부터 강한 대물 믿음으로
철학자들 사이에는 명제태도의 대물귀속이 의식의 지향성 또는 사유의 표상적 층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근본적 표현이라는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 한편 지금까지의 논의는 상당후 이러한 표현의 논점을 놓치고 있는 듯하다.
콰인은 최초로 “믿다”에서 개념적(notional) 의미와 관계적 의미를 구분하고, 개념적 의미를 대언귀속에, 관계적 의미를 대물귀속에 연결했다. 이 구분을 추동한 것은, 단칭어를 포함하는 믿음이 전부 특정한 대상에 대한 믿음인 건 아니라는 직관이다. 이러한 직관에 의하면, “『존재와 무』의 저자가 공산주의자이다”만을 승인하는 사람은 아직 구체적인 대상에 대해 믿음을 형성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존재와 무』의 저자와 『구토』의 저자가 다르다고 착각한 채 “『구토』의 저자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를 동시에 믿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A는 『존재와 무』의 저자가 공산주의자라고 믿는다”(A believes that the author of Being and Nothingness is a communist)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A는 『존재와 무』의 저자에 대해 그가 공산주의자라고 믿는다”(A believes of the author of Being and Nothingness that he is a communist)라고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A에게 대언 믿음 귀속은 가능하지만 대물 믿음 귀속은 가능하지 않다. 한편 사르트르라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지식을 지니는 사람에게는 대물적으로 믿음을 귀속시킬 수 있다.
한편 브랜덤은 “믿다”의 두 가지 의미 구분을 단일한 믿음 내용의 두 가지 구체화 방식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이 제안에 따르면 “『존재와 무』의 저자는 공산주의자이다”라는 믿음을 승인한 사람은 곧 사르트르에 대한 믿음을 형성한 것이다. 브랜덤이 옹호하려는 입장은 카플란(D. Kaplan)이 대물 믿음에 관해 발전시킨 (카플란 자신은 콰인이 견지했던 직관과 같은 이유로 기각했던) 입장과 같은 것이다.1
카플란은 대상에 대한 지칭(denote) 방식이라는 관계보다 강한 의미에서 대상과 관계하는 대물 믿음을 탐구하고자 했다. 한편 카플란은 믿음의 지칭적(denotational) 의미 또한 정식화했다. 카플란의 제안대로라면, S가 대상 O를 지칭하는 표현 a가 포함된 문장 s를 대언적으로 믿을 때, S는 O에 대해 s를 대물적으로 믿는다.
브랜덤은 이 설명으로부터 다음 세 단계를 거쳐 자신의 설명을 이끌어 낸다. (1) 언어표현의 유형(type)이 아닌 개항(token)에 관계하면서 직접 인용이 아닌 대언 믿음 귀속에 관해 보다 상세한 설명을 도입한다. (2) 명시적 지칭 관계를 대신해 대체적 언질(substitutional commitment) 개념이 도입된다. (3) 대언 귀속과 대물 귀속이 혼합된 채 다른 언질 속에서 되뇌어지는 상황을 적절하게 다루기 위해 설명 전체가 사회적-관점적 틀 내에서 이루어진다.
카플란은 표현과 대상 사이의 지칭적 관계보다 강한 대상관계를 위해, 대상에 대한 다양한 특정 방식들 사이에 차등을 둔다. 내가 지니고 있는 지식이 대상에 대한 지식이기 위해 나는 “『존재와 무』의 저자”처럼 대상을 지시하는 표현에서 나아가 대상을 특정하는 특권적인 지시어들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수(數)와 인용 이름들이 그런 특권적 지시어이다. 기술구 “방정식 n2+1=10의 해가 되는 n”에 관한 지식은, 이 기술구가 “8”과 상호 대체 가능하다는 점을 아는 한에서만 8에 관한 지식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카플란은 콰인의 직관을 수용하여 강한 언어-대상 사이의 강한 관계를 설정하고자 했지만, 브랜덤이 보기에 카플란의 시도는, 언어-대상 사이의 태도 차이가 다시 언어표현의 차이에 의존한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산수의 기초』에서 프레게는, 다른 표현과의 상호 대체 가능성을 진정한 단칭어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여기에 근거해서 브랜덤은, 수적, 물리적, 허구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골라내는 어휘란 표준적 특권을 가진 어휘로 상호 대체 가능한 어휘라고 주장했다.2
이를 강한 대물 믿음의 기준에 적용한다면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특정한 믿음 담지자에게 단칭어가 지칭 이상의 방식으로 대상과 강하게 관계 맺으려면, 그는 해당 단칭어와 다른 단칭어 사이의 (사소하지 않으면서 참된) 동일성 믿음을 승인해야 한다.
이러한 비평등주의적인 입장은 “『존재와 무』의 저자”에 관한 위의 사례로부터 강한 대물 믿음 귀속을 성공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준은 최소 기준이며, 여전히 믿음 담지자에게 대상에 대한 ‘지식’을 귀속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가령 수사관보다 앞서 현장의 발자국을 발견한 홈즈는 수사관과 달리 “살인사건 용의자”와 “현장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에 관한 동일성 믿음을 승인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홈즈가 범인이 누군지를 아는 것은 아니다. 최소 기준을 넘어 요구되는 추가적인 기준과 관련하여 소사(E. Sosa)는 그 단칭어의 대체항이 “구별된 용어”(distinguished term)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데 “구별된 용어”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화용론적인 층위에 있다. 이 구별된 용어의 강력한 후보로서 지표적 표현이 철학자들의 관심사를 끌었다.
주로 70년대에 대두된 지표사 연구는 “직접 지시적 표현”이 강한 대물 믿음 귀속을 조건 지울 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버지(T. Burge), 페리(J. Perry), 루이스(D. Lewis), 카플란 등 일련의 철학자들은 지표적 표현이 개념적으로 매개되지 않은 채 믿음 담지자와 사유 대상 사이에 성립하는 직접적인 인식적 연결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한편 데이비슨(D. Davidson)은 대물 믿음이 유효한 개념 구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데넷(D. Dennett)은 대물 귀속과 대언 귀속을 표기법적 차이의 일종으로 보고 강한 대물 귀속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브랜덤의 제안은 두 입장 중 어느 하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데이비슨이나 데넷과 달리, 브랜덤은 대언/대물 구분이 명제 태도의 차이를 드러내는 중요한 구분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그는 강한 대물 믿음이 지니는 내용적 차별성은 지시사와 지표사의 사용에 의존한다고 본다. 브랜덤은 지표적 믿음들의 특별한 집합을 유의미하다고 간주하지만, 이 집합을 인정하는 이유는 다르다. 종래의 이론과 달리, 브랜덤의 이론에서 (1) 지표적 믿음들은 그 자체 독립적으로 이해 가능한 언어 놀이를 이루지 않는다. 또 (2) 지표적 믿음이 지니는 특별한 대상적 내용은 비개념적이 아닌 개념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지표사는 대상에 대한 개념적으로 명료화된 접근을 가능케 한다. (3) 말과 사유의 표상적 차원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강한 대물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 약한 대물 믿음의 형태를 띤 믿음적(doxastic) 관점들의 결합이다.
2.본질적인 지표적 믿음: “나”의 사용
카스타녜다(H-.N. Castañeda)와 페리는 “나”, “여기”, “지금”과 같은 지표사들이 비지표적 표현으로 대체될 수 없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지적한다. 이들에 의하면 나는 나를 다른 표현들을 통해 기술하고 지칭할 수는 있지만, 비지표적 표현에는 항상 동일하게 기술될 수 있으면서 내가 아닌 다른 대상이 존재할 가능성이 남는다. 그러나 지표적 표현은 그렇지 않다. 브랜덤 자신의 예는 아니지만, 아마도 카플란이 했던 사고실험을 변용해서 이 점을 명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3
질적으로 동일한 속성을 갖는 쌍둥이가 있다고 하고, 이름을 각각 카스터와 폴럭스라고 하자. 카스터는 비지표적 표현으로는 자신을 쌍둥이 형제인 폴럭스와 구별해서 자신을 지시하기 힘들다. 그가 자신을 특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술구들은 모두 폴럭스에게도 해당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스터가 오직 자신만을 성공적으로 지시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일인칭 지표사 “나”를 사용하는 것이다. 두 명이 아무리 질적으로 동일하다고 해도, “내 동생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태어났다”와 같은 문장의 의미는 둘이 발화할 때마다 다르며, 진릿값도 다를 것이다. 따라서 지표사는 비지표적 표현으로 환원될 수 없는 기능을 지닌다.
“나”가 오로지 나만을 골라낼 수 있다는 점은 무엇보다도 실천적 추론과 관련해서 그 의미가 명확히 드러난다. “나는 식후 30분에 약을 먹어댜 한다”와 같은 실천적 추론에 관련된 믿음은 “그 관절염 환자는 식후 30분에 약을 먹어야 한다”와는 다른 실천적 함축을 지닌다. 내가 관절염 환자(또는 주어 자리에 들어갈 어떤 단칭어든)에 해당함을 모르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실천적 규범들을 행해야 하는 것이 나라는 점을 모른다면, 나는 의도를 형성하고 행위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 브랜덤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지표사 “나”의 기능은 “언질에 대한 인정[acknowledgment of a commitment]을 표현할 때의 사용이다. ‘나’가 표현하는 것은 언질에 대한 잠재적으로 동기부여적인[motivational] 인정이다. [……] 실천적 언질에 대한 인정은, ‘나는 ~할 것이다’[I shall...] 형식의 문장에 의해 표현되는 의도 형성에 대응하는 의무적 태도이다.”(Brandom, 1994: 552. 원저자 강조)
이성적 행위는 브랜덤의 용어로 실천적 언질에 관한 신빙성 있는 비추론적 반응을 산출하는 성향들로 이루어지는데, 이때 행위자는 “나는 ~할 것이다”라는 일인칭 형식 문장에 대해 반응하도록 훈련받지 “[삼인칭 단칭어]는 ~할 것이다” 같은 삼인칭 문장에 대해 반응하도록 훈련받지는 않는다. 페리가 지적하는 “나”의 대체 불가능한 실천적 함축은, 행위주체가 일인칭 “나”와 공지시하는 삼인칭 단칭어에 관한 동일성 문장을 언질하지 못하거나 이 동일성 문장과 양립 불가능한 문장을 언질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으로부터 귀결된다.
브랜덤이 보기에, 믿음과 욕구의 표현은 “나”의 이차적인 용법이고, 일차적인 용법은 실천적 언질 즉 실천적 추론의 결론이나 전제에 관한 자격과 책임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몇몇 특수한 상황에서 “나”라는 지표사가 다른 공지시 표현으로 대체될 수 있더라도, 언질을 인정하고 떠맡는 실천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비일인칭 표현들은 어떤 행위자에게 언질을 귀속할 수는 있으나, 그러한 언질을 인정하는 것은 “나”가 수행하는 기능이다. 일인칭과 삼인칭, 인정과 귀속은 의무론적 점수기록 실천에서도 여전히 상이한 별개의 두 실천들이다.
한편 비슷한 발상을 배경으로 앤스콤(G. E. M. Anscombe)은 “나”가 지시 표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브랜덤의 용어로는, 앤스콤 식의 강한 결론의 도출 과정은 다음처럼 기술될 수 있다: “나”가 지시 표현이라면, “나”의 지시체인 자기(self)에게 언질을 귀속하는 일은 언질을 떠맡는 일과 같은 실천적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언질을 귀속하는 동시에 떠맡는 기능을 수행하는 표현은 없다. 따라서 “나”는 지시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브랜덤은 지표사의 지시적 성격 자체를 부정하는 강한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대신 “나”가 언질을 귀속하기만 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나”와 관련해서 앤스콤이 환기하는 바는 페리의 주장과는 다소 다르다. 그의 논점은 두 가지이다.
- 자기 자신의 행위나 “나”를 사용해서 표현될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비관찰적 지식을 지닐 수 있다.
- “나”를 사용해서 표현되는 종류의 주장은 식별 실패(misidentification) 가능성으로부터 면역이다.
다시 말해, 나는 지각하지 않고도 나의 의도, 행위, 동작 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이처럼 비관찰적으로 얻어진 지식이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인지 모를 가능성은 없다. “나”를 사용해서 잘못된 대상을 지시하는 일, 즉 자기식별(self-identification)이 실패할 가능성은 없다. 브랜덤은 “나”에 관한 이 논점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논점이 반드시 대상과 주체를 존재론적으로 분리하는 형이상학으로 귀결될 필요는 없다.
앤스콤은 “나”가 지시 표현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언어(AL이라 하자)를 상정한다. AL에 속한 표현 “A”는 해당 표현의 발화자를 가리키는 표현인데, “A”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행위자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관찰을 해야 하며, 이 때문에 행위자에 대해 오류를 저지를 가능성이 존재한다. “나”로 표현되는 인식적으로 강한 대물 믿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AL에서 “A”가 “나”의 핵심적인 성격을 지닐 때까지 단계적으로 요소들을 첨가해보면 된다.
이제 AL를 사용하는 공동체에서는 이름을 다음의 규칙에 따라 사용한다고 하자. 각각의 AL 사용자에게는 등 뒤에 스스로가 확인할 수 없는 이름이 적혀 있으며, 타인은 서로를 지시하기 위해 등 뒤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이를 “B”라고 하자). 한편 “A”는 각각의 손목에 적혀 있어서 스스로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이다. 이제 이들은 서로를 부르고 서로에 대해 반응하기 위해 “B”를 사용한다. 한편 “A”는 자기 자신의 행위에 관한 문장을 형성하기 위해 사용된다. “나”와 달리 “A”는 원리상 관찰을 통해서만 확인 가능하기 때문에, 손목에 적힌 글씨를 잘못 보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식별 실패가 가능하다.
“A”와 “B”는 AL에서 의무적 점수 기록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AL 화자들은 추론적으로 또는 비추론적으로 주장을 한다. 특정 사태에 대해 특정한 문장을 언질함으로써 신빙성 있는 차별적 반응 성향을 보일 때, 점수기록자는 이런 사람들을 그 사태와 관련하여 신빙성 있는 관찰자로 자격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주장에 대한 도전-정당화 등과 같은 신빙성 주장이 명시화될 필요는 없다.)
이들은 서로의 행위에 대해 관찰 보고를 할 수 있다. 이제 (관찰 보고를 포함한) 주장을 서로에게 귀속할 수 있는 어휘가 AL에 추가되었다고 하자. (이 어휘는 비추론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신규 어휘를 통해 T는 S의 관찰 보고 p에 대해 “S는 p임을 지각적으로 주장한다”(S claims-perceptually that p)라고, 나아가 “S는 p임을 지각한다”라고 보고할 수 있다. 이제 AL 사용자들은 관찰 보고에 관한 도전과 정당화의 언어놀이를 명시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예컨대 p가 도전받았을 때, T는 “S는 p임을 지각한다”를 이용하여 반응할 수 있고, S 자신은 “A는 p임을 지각한다”를 이용하여 반응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점수기록자는 지각적 보고 p에 자격·언질이 귀속될 때 S에 대한 p의 A-귀속 문장(“A는 p임을 지각한다”)에도 언질이 귀속될 수 있음을 안다. 예컨대 “A는 p임을 지각한다”를 언질한다는 것은 “S는 p임을 지각한다”, “누군가 p임을 지각한다” 등 해당 문장과 추론적 관계에 있는 문장들을 동시에 언질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A-귀속 문장의 용법이 확장되었다고 하자. S는 환경에 대해 비추론적 관찰 보고 p 대신 “A는 p임을 지각한다”를 통해 차별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이 확장은 “A”의 문법에 중요한 변화를 유발하는데, “A”는 비로소 확장된 사용 속에서 비관찰적으로 사용된다. 이전까지 “A”의 사용은 손목의 표식을 확인함으로써만 올바르게 사용될 수 있는 관찰적 용어였으며, 이에 따라 식별 실패의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그러나 확장된 사용 속에서 “A”에는 그러한 실패 가능성이 없다. “S는 p임을 지각한다”는 식별 실패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반면, “A는 p임을 지각한다”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손목의 표식과는 달리, 자기의 반응 성향이 자기의 것인지는 관찰 등을 통해 확인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각(언어-도입)에 대한 신빙성 있는 차별적 반응 성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행위(언어-이탈)에 대한 신빙성 있는 차별적 반응 성향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자격 있는 지각 담지자가 상황에 대해 믿음적 언질을 하듯, 자격 있는 행위자는 실천적 언질에 대해 적절한 행위를 산출함으로써 반응하는 (비추론적) 성향을 갖는다. 그리고 “S는 p임을 지각한다”를 통해 서로의 지각 보고를 관찰하듯, 서로의 의도적 행위들을 관찰하는 행위자적(agentive) 어휘들이 있다. 예컨대 “S는 q를 한다”는 특정한 실천적 언질에 대한 S의 신빙성 있는 반응을 나타내는 문장이다. 그리고 지각에서와 마찬가지로 행위자는 자기를 지시하기 위해 “A는 q를 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A”의 사용은 여전히 관찰에 의존하며, 식별 실패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점수기록자들은 “A는 q를 한다”라는 A-귀속 문장이 “S는 q를 한다”를 승인할 때 더불어 언질됨을 알게 된다.
그 다음 단계에서 이 어휘의 용법을 확장해서, 특정한 실천적 언질에 대해 q를 행함과 동시에 (비추론적으로) “A는 q를 한다”를 언질함으로써 반응한다고 해보자. 이 경우 지각에서와 마찬가지로 “A”의 용법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A”는 비관찰적으로 사용된다. 현재 발현되고 있는 실천적 반응 성향이 나의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관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식별 실패의 가능성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통해 AL 화자들은 기초적인 일인칭 대명사를 갖게 된다. 일인칭 대명사 “A”는 자기의 지각과 행위에 관한 직접적, 비관찰적 지식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이런 지식이 오류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올바르게 얻어졌을 경우 그들은 이 지식을 비추론적으로 안다. 더구나 이 지식들은 식별 실패로부터 면역이다. 즉 해당 지식이 무엇·누구에 대한 지식인지 틀릴 가능성은 없다. “q를 행한 게/p임을 지각한 게 A라는 것이 확실한가?”와 같은 의문은, “A는 q를 한다”가 관찰에 의해 보증되는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부당한 의문이다.
위의 이야기는 앤스콤의 논점뿐만 아니라 페리의 논점까지도 설득력 있게 뒷받침한다. “A는 q를 행한다”에서 보듯, “나”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행위 q에 대한 동기부여적(motivational) 역할을 수행한다. “A는 q를 행한다”에 관한 논의를 보다 확장해서 “A는 q를 행할 것이다”(A shall do q)의 형태를 지닌 선행 의도(prior intention) 문장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실천적 언질에 관한 인정이 비관찰적 형태로 형성될 때, “A”가 나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순전한 행위를 넘어선 의도이다. 최종적으로 “나는 ~할 것이다”와 “나”라는 어휘가 도입되고 “A는 ~할 것이다”와 “A”와 관련된 추론에서 완전한 대체물로 기능한다면, “나”는 의도와 행위에 관한 언질을 떠맡는 고유 표현이 된다.
이때 “나”가 다른 삼인칭 지시 표현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점 또한 명확해진다. 최종적으로 도입된 일인칭 대명사 “나”는 삼인칭인 “S” 등으로 대체될 수 없다. 왜냐하면 “S는 q를 한다”와 같은 문장은 실천적 추론 속에서 “A는 S이다”가 보장되는 한에서만 나에게 동기부여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 Kaplan, David (1968). “Quantifying In.” Synthese. Vol. 19, No. 1/2. 178-214.
2 Making It Explicit의 7장 1-2절.
3 원래 이 사고실험은 “사유 대상”과 “인식적 유의미성”을 구분한 뒤 둘의 차이를 논증하기 위해 제시되었으며, 지금 사용된 맥락과는 완전히 다른 의도를 가지고 도입되었다. Kaplan, David (1989). “Demonstratives: An Essay on the Semantics, Logic, Metaphysics, and Epistemology of Demonstratives and Other Indexicals.” Themes from Kaplan. Ed. Joseph Almog, Jonh Perry and Howard Wettstei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481-564. 531.